신학잡지 '목회와 신학'에서 목사 이중직이란 말이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일을 하는 개념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80%가 미자립 혹은 자립했으나 넉넉지 못한 교회들이지요. 그런 면에 있어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과거 한량처럼 목회만하고 사모들이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목회사역 외에 일을 해야겠다는 인식이 많아졌습니다. '목회와 신학'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요. 목회자들 '이중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골자로 했습니다. 결과는 과반이상의 이중직 찬성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이중직?을 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 볼때 대단히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o. 잘못된 노동에 대한 인식.

 대부분 '이중직'에 대한 찬성을 보낸 이들이 가지는 잘못된 인식 중 하나가 바로 노동에 대한 인식입니다. 목회를 위한 도구로서 '일'을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편해야되고, 시간적 효율이 높아야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외국에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직업'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관계'과 자신의 '꿈과 계획'을 위한 것이니 말이죠. 하지만 이 대한민국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죽을 만큼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거든요.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목회를 위한 수단,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니 말 다했죠.

 몇몇의 목회자들은 '개혁'의 수단으로 이중직 혹은 노동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런 분들이 하는 이중직의 내용 역시 '카페' 정도에 머무르고 있지요. 결국 목회를 위한 '공간'과 목회자의 '여유'를 생각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반증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학교(대학, 신대원)에서부터 이러한 이중직에 대한 커리큘럼을 만들자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방법론'이지요. 이미 이런 방법론은 사실 너무도 많거든요. 신학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니면.. 이미 커리큘럼은 그 안에 다 있어요. 사실 그런 목회를 하면서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적인 커리큘럼을 배우기 이전에, 노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배웠으면 합니다. 
 제가 속해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의 전국 일곱개 신학대학교에서는 현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경제이론, 그리고 생명과 노동에 대해서 매 학기마다 1-2과목이 개설됩니다. 그리고 1년에 한번 전국학교에서 수강한 이들과 이들을 가르친 에큐메니칼진영의 교수님들이 모임을 가지기도 하구요. 노동이 얼마나 가치있고, 이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인지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중직' 즉, 목회하면서 개혁이나 생계를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o. 현재의 교회론으로 과연 이중직이 가능한가?

 그네들이 말하는 '시간'과 '여유' 그리고 '육체적 노동이 적은' 일을 하게 된다면.. 과연 현재의 교회 목회가 가능한가 저는 질문하고 싶습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기도, 주일예배 그리고 여러 심방들과 회의, 주보작업 등. 이게 가능한지요? 가능하다면, 당신이 하는 '이중직'은 대체 무엇입니까? 

 저는 '노동'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다면, 현재의 목회, 교회, 교회론이 수정되지 않고서는 유지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이중직을 찬성하는 목회자 대다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지요.

 보통들. 교회공동체라고 생각하면 많은 예배와 많은 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공동체성이란 것이 그런 것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요? 
 제가 커뮤니티활동을 하면서 '숑숑숑'이란 닉네임의 목회자란 것을 사람들이 알았을때, 많은 쪽지와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쪽지와 메일은 그들의 삶에서 비롯된 많은 고민들이었구요.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쪽지와 메일을 보낼때 꼭 적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에게는 물어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공동체성'이라고 볼 수 있는지요? 수많은 예배와 일방적인 설교, 그리고 수많은 봉사를 함에도, 사소한 질문하나도 못하는 그것이 공동체랄 수 있는지요? 유교적 의식 좋습니다. 권위적일 수 있다? 좋습니다. 저는 적어도 교회란 곳은 그리스도 안에 모두가 한 형제 자매라고 믿습니다. 또한 다들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힘들기도하고, 지치기도 하며, 부족하기도 하고.. 그리고 똑같이 노동을 하고, 가정의 생계를 걱정하기도 하며, 좀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도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도 동일하다고 봅니다.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것도 좋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교회가 유지가 되어야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점에서 결국 이러한 현재의 모습만이 옳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이웃교회를 개척하면서, 저는 슈퍼를 운영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주일에 이웃교회는 모입니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같이 이야기도 하고, 식사도 하고, 신에게솔직히 팟캐스트 녹음도 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가정에서 모여서 강단이 아닌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목회자 역시도 일에 지쳐서 실수도 하는 설교를 하고, 예배 후에는 허심탄회하게 설교에 대한 부분을 질문하거나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신학적인 이야기, 사회이슈나 교회이슈, 교회역사에 대한 공부를 녹음을 이유로 하기도 합니다. 일주일에 몇시간 밖에 안되는 시간이지만, 저는 이런 것이 더 교회공동체성을 질적으로 향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을 하며 목회를 하니 일반적인 교회와 다른 것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면 좋죠. 하지만 많으면 불편합니다. 두번째는 헌금이 얼마가 모이든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헌금은 점심식사비와, 구제를 위한 모으는 것밖에 없습니다(구제에 대한 부분은 향후 토의예정). 세번째는 목회자가 아니라 나 역시 성도란 생각에 자유롭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면, 현재 이중직을 생각하시거나 찬성하시는 목회자분들. 너무 현재 교회론에 얽매이지 마세요. 교회공동체성은 많은 시간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부터 생활전선에 처절하게 뛰어들고 지쳐보기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o. 그렇다면, 정당한 노동을 하며 목회를 할 수 있는가?

 넵. 가능합니다. 저 같은 경우 슈퍼를 합니다. 오픈은 오전7시, 클로징은 밤 12시입니다. 집에 가서 누우면 새벽 1시, 기상은 6시입니다. 목회자일때와 기상, 취침시간은 같지요. 다만, 하루 일과가 힘듭니다. 문 열고 9시까지 도매에서 살 물건들을 체크합니다. 도매점, 과일, 야채시장을 돌면서 장을 봅니다.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돌아와서 정리를 하고, 12시까지 장사를 합니다. 쉬는 날은 없어요. 토요일이면 더 힘듭니다. 평일동안 시간이 날때마다 준비한 설교와 주보를 완벽히 준비합니다. 평균 새벽 2시 좀 넘어서 잡니다.주일이 되면 문을 열고 아르바이트가 올때까지 장사를 하다가, 1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교회로 갑니다. 교회 생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올때는 2시간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바로 슈퍼로 다시 가지요. 그렇게 매일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화요일에는 팟캐스트 업데이트를 약속했기에 주말늦게는 그것 편집도 합니다. 쉼없는 나날이라 너무 피곤하지만, 제가 늘 이야기 했듯 시간은 만들면 납니다. 기존 목회의 완벽함을 생각하면, 우리 목회자 외 일반 성도들의 일반적 삶과 노동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삶과 노동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덜 자고 더 노력해서 목회를 할 수 밖에요. 이 관련된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와 대안점은 앞으로 업데이트될 '목사이중직 2부'를 들으시면 될듯합니다.

 이중직이란 말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인간은 그저 살아가거든요. 목회를 직업으로 인식하지 않는 분들이 개혁이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이중'직이 된다는건 웃기지 않는가요? 제가 슈퍼를 하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목회란 것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게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삶 전체가 바로 목회이고 노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이중직이란 말은 틀린 것이지요. 대한민국에서 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 아니, 그저 이 지구에서 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불확실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 분들. 그 불확실성으로 투신하십시오. 그게 정말 목회자로서의 삶이요,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ps. 이 글은 이중직 관련된 녹음을 풀어서 설명한 것이며, 이 내용 외에 교단적 대안이나 다른 이야기들도 많이 있으니 팟캐스트를 함께 들어주시면 더욱 도움이 될 듯 합니다.


Posted by 숑숑숑~






 목회자는 다른 직업이 필요하다. 당연하다. 당연해. 그런데, 단지 '돈' 때문이라면 웃기지 않는가? 물론 돈은 필요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는 '돈' 혹은, '신자유주의'적 마인드를 따라가는 것 아닌가? '돈'이 필요하다면, 목회 안하고 돈 벌러가면 된다.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현재 한국교회 문제의 근본 핵심은 '목회자'다. 그리고 그 목회자의 문제 핵심은 '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아니다. 진짜 핵심은 '목회자'라는 특수한 삶의 자리가 있다는 착각의 문제이고, 이것은 한 인간으로서 삶의 자리에 대한 유리이다. 목회자라는 특권의식에서 오는 삶의 자리의 유리가 현재 한국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리고, 그 부패에 대한 반감에서 오는 쇄락이 목회자의 '돈' 문제를 생성시키고, 교회를 영업장으로 인식하고 돈에 의해 운영되도록 생각하며, 결국 현 사회패러다임에 종속되고 마는 것이다.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는 투잡은 불가능하다. 이게 현실이다. 한국은 말이지,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번다. 그렇지 않는가? 투잡? 과연 목회와, 일에 모두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목회를 위해 다른 곳에서 돈을 번다는것은 이 나라에서의 노동을 비웃는 거다. 한번 해보라. 하나의 일도 죽도록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경쟁이 있는 곳에서 목회하며 일한다라.. 내가 만약 사측이라면 그렇게 두진 않을것이다. 이 사회는 자신의 일에 집중해서 돈 벌 인력은 넘치고 넘치기 때문이다(사회구조를 비꼬는 의미이니 이해하시라).

 이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투잡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말하기보다, 목회자들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일할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이고, 이것은 이제까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성도들의 삶을 너무 쉽게 본 착각에서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돈은 이 한국사회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피와 땀이 있어야 겨우겨우 쥐꼬리만하게 나오는 것이다. 그것으로 성도들은 헌금을 한다. 하지만, 목회자는 그런 헌금의 의미를 알리 만무하다. 전도사 때부터 그런 헌금으로부터 나오는 사례비를 너무도 쉽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막힌 경험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과거 신대원을 다닐 시절, 졸업여행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있다. 거기서 우리 학년들은 졸업여행 코스를 국내 선교지탐방에서부터, 제주도, 일본, 중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안들이 나왔다. 웃긴 것은 제주도나 외국을 가자는 의견에 대해서 '너희들 매번 학비가 비싸다느니, 책 값이 비싸다느니, 사례금이 적다느니, 생활하기 어렵다고 매번 말하면서.. 어디서 그렇게 비행기타고 갈 돈은 있느냐?'의 질문에, '교회에 말하서 지원받자'는 대답을 들을때는 정말 이 놈들이 나이를 많이 쳐먹든 적게 쳐먹든 거지새끼와 다를 바 없구나.. 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게 현실이다. 


 2. 물론 위의 예와 다른 목회자들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시라. 과연 나가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진짜 이 대한민국 현실의 삶의 자리와 마주한 적 있는가? 돈은 사례금 받듯 쉽게 나오지 않는다. 죽을 만큼 일한다면, 과연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절대 할 수 없다. 물론 현재의 교회의 모습과 그 시스템, 그리고 목회자의 일과로는 말이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기도, 심방, 주일예배.. 그것과 일이 병행될 수 있는가? 자,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 모습으로는 절대 병행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현재 대형교회화를 추구하는 모든 교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습지 않는가? 돈이 필요하니 일하고, 목회는 대형교회를 쫓아가니 현실은 불가능하다는거다.


 3. 방법은 없는가? 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제발 자신의 전문성을 놓지말라. 그리고 작게 나마 피부로 삶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라. 시간은 만들 수록 늘어난다. 현재의 교회시스템을 쫓지말라. 한 마을와 상생하는 작은 교회를 추구하라. 교회공동체성은 심방이나 수많은 예배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자. 가난한 목회자가 투잡을 해서 돈을 번다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조류에 편승하는 현 교회 시스템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실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한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삶의 자리에서 유리된 목회자의 문제이다. 그러니, 교회여 윤허해달라, 장로들이여 윤허해달라는 말보다.. 목회자 자신이 노동과 성도의 보편적인 삶의 자리를 피부로 느끼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 나는 목회자다. 어려서부터는 대형교회에 있었고, 부모는 목사였고, 나 역시 기존의 교회에서 모든 일을 순종으로 다 해보았다. 하지만 내가 봐왔던 목사들은 하나같이 성도들의 돈을 우습게 보았다. 그러면서도 돈을 가장 좋아한다. 그게 싫어서 편안하게 생활할 자리를 나왔고, 지금은 슈퍼운영을 한다. 목회는 물론 기존의 교회처럼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목회는 교회 안에서의 것만은 아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그네들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 목회라고 생각한다. 성도들과도 다른 무엇보다 그런 직접적 삶을 나누는 것이 교회공동체를 위한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또 성서의 내용을 '종교적 언어'가 아닌, 그 삶의 자리에서 정말로 귀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통해 얻어진 '삶의 언어'로 나누는 것이 설교라고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여한다는 목적으로 다른 직업이 필요하다는 걸 넘어서, 모든 인간의 삶의자리를 존엄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부딪히는 목회자가 많아지길 바란다. 그게 이시대 한국교회가 해야되는 최우선의 개혁 아닐까?




이 관련 글들과 팟캐스트.


Posted by 숑숑숑~



[정교분리]

흔히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부패와 문제) 때문에 이 말을 많이들 합니다만, 사실 정교분리란 정치와 교회의 유착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정치적이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되지요. 교회란 그런 인간의 공동체.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이것 역시도 사회 안에 있기에 정치적이지 않게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정교분리'란 단어가 언제부터 쓰여졌는지 안다면, 정교분리란 말을 쓰는데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것입니다. 
일제 침략기 1890-1910년 사이 한국교회는 '한 손에는 성경책을, 그리고 또 한손에는 태극기를!'이란 말을 할 정도로, 또 '삼천리 금수강산 3000교회만 있다면 독립이 될것이다'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교회의 사회참여는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압력에 의해 선교에 차질이 있을 것이라는 선교사들의 우려와, 총독부의 회유의 결과로 총독부가 주장한 '정교분리'가 교회내 정책적으로 채택되게 된 것이죠(그대들은 선교만 하시오, 우리는 나라를 돌보겠소)
이후 한국교회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회의 관심에 눈과 귀를 닫고, 내세적 지향을 가지며 개인의 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지요. 한 예로 춘원 이광수의 발언들을 보면 1910년 이전에는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조국의 희망으로 보지만, 이후로는 한국교회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사라져야 된다고 까지 합지요(물론 이광수 역시 시대적으로 많은 얼굴을 가진 이이긴 합니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현실과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개인의 복과 안위를 생각하며, 삶의 복잡함을 단순한 이분법적 이해를 가지며 적 설정을 하거나 영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게 되지요. 거기다 앞서도 말했듯, 현재 '정교분리'를 말하며 정치와 종교의 야합을 반대하는데, 그러한 야합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바로 '정교분리'에서 시작된겁니다. 사회를 보는 눈은 없고, 개인의 복과 교회의 덩치를 생각하게 되면서 기득권화 되어가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정치 기득권과 함께 유착하게 된거죠. 정말 사회적 인식 즉, 정교를 분리하지 않고 통전적으로 바라봤다면, 이런 현실의 문제까지도 생기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교분리되지 않고 정치적 입장을 교회는 어떻게 취해야 할것인가?'는 고민이 생기게 되죠. 답은 쉽습니다. 예수를 보세요. 쓸데없는 종북이니, 빨갱이니, 좌파니 이런거 말하면서 사탄이니 영적 전쟁이니 그런 모호한 융합하지 마시고 예수의 가치을 바라보세요. 예수가 큰 교회에서 편하게 그 삶을 사셨던가요? 아니면 가장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아니, 아예 그들'이' 되었던가요? 
예수는 예수의 가치를 묻던 율법교사의 말을 옳다 말했고(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으스대며 율법교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 예수께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가장 첫 질문인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이 도와야할 대상(이웃)'을 물었지요. 그런 예수는 도리어 묻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고 말이죠.
우린 이 현실 속에 삽니다. 이 사회 속에서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면 분리가 아닌, 하나의 인간 그것도 예수의 가치를 발언하며 행하고 살아가는 인간이어야 되지 않을까요? 한국교회가 진정 개혁이 되려면, 꿈에서 벗어날 생각부터 해야될 겁니다. 그리고 구분과 분리가 아닌, 하나의 같은 인간이란 인식(죄인이라 생각하고, 의인처럼 행하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정교분리' 그 말은, 더이상 이 땅에서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Posted by 숑숑숑~




진짜 오랫만에 편의점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끼리끼리'란 말이 있는데, 흔히들 비슷한 사람들이 만난다는 말이지요. 저 역시도 그렇게 그렇구요..

군대를 가서 처음으로 전혀 다른 이들과 만났고, 목회를 하면서 또 저와 다른 분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의점을 하면서는 세상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낍니다.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제가 봐왔던 이 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모습과 전혀 반대되는 옹졸하고 이기적이며 어쩌면 동물같은 모습말이죠. 이성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말이죠. 

이 지금 현실의 불의나 모순적 부분이 힘과 권력에 의해 왜곡된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 역시도 그런 정치인들과 권력 기득권의 행태를 똑같이 하고 있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모습'이란 생각을 합니다. 

물론 좋은 분들 상식적인 분들도 많이 뵈었습니다만, 그런 분들은 열의 하나입니다. 마치 시청 앞에 촛불을 들거나, 북아현동이나 강정에 있는 분들 정도처럼 말이죠. CK니 뭐니 청바지 유명하다해도 우리나라 청바지 판매율 부동의 1위는 '뱅뱅'인거 처럼 말이죠. 그게 현실이란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어쩌면 우물 안에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해봅니다. 비슷한 이들과 함께라면 그곳에서 할 일은 그다지 없습니다. 고립되어 썩기밖에 더 하겠어요?

이게 아마도 현실의 개혁을 말하는 이들의 모습 아닐까 합니다. 사회 뿐 아니라 교회도 역시 말이죠. 지식인 역시도 알아듣지 못할 말 지들끼리 해대며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자신의 '삶의자리' 참 중요한데, 우린 현실 '속에' 있는거 같지 않습니다. 이상(理想)을 말하며 어쩌면 비현실 속에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아닌, 삶은 커녕 '비현실의 자리'에 놓여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어쩌면 정말 삶을 바라보고 나의 '삶의자리'를 찾는것인지 모릅니다.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는 꽃밭이 아닌 원수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했듯 말이죠.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신다면 이리 물으실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주를 '따른다'며 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도 꽃밭에서 좋은 것 자기 바라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자여, 그대는 누구인가?"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사 이중직에 관해  (1) 2014.05.20
정교분리의 역사적 이해.  (0) 2013.08.31
편의점, 대한민국, 그리스도인  (0) 2013.08.31
목회자 딜레마.  (0) 2013.05.09
유아세례에 관련하여  (9) 2013.04.10
교회에 대한 의문점  (0) 2013.03.12
Posted by 숑숑숑~




목회자로써 과연 목회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택시운전, 편의점 등등 일을 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다(나 역시도 그렇다). 그러나 한간에 워낙 부패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봐왔던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지는 환상 중 하나로 일명 투잡을 하면 진정 목회자라는 인식은 틀린 것이다.


먼저 목양과 설교.. 진짜 해보신 분들은 알거다(이 나라의 모든 부교역자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것 하나만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하다. 정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의 대형화다. 왜 담임목사는 부교역자에게 자신의 할 일은 떠넘긴채 주일 설교만 하는가? 그러다보니 배가 부르고 기름이 차서 현실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상한 피상적인 말들만 지껄이고, 부패하며 교만해져버린 것이다.


왜 교회가 커져가길 바라는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개풀뜯어먹는 소리고, 사실은 자기 이익과 만족 그리고 팬심의 극대화아닌가? 왜 한 마을을 살리는 파출소같은, 동사무소같은 교회를 꿈꾸지 않는가? 선교의 확장이 아닌 고립이라서? 개풀뜯어먹는 소리다. 담임목사 본인이 목양의 어려움을 몸소 겪어보지 않는 삶과 동떨어진 착각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일명 투잡을 하는 목회자는 뭔가? 뭐 많은 이유들이 있을수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생계를 위해서다. 언론에서 대형교회들만 떠드니 피부로 잘 와닿진 않겠지만, 한국교회 80%는 미자립교회이거나 100명이내의 자립교회들이다. 만약 특수한 이유없이 생계를 위한 일은 그 자체로 책임이 따르는 '일'이 되기에 목회와 함께 하기 어렵다. 전적인 관심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교회라는 공동체성을 중점으로 성도와 목회자가 함께 이해하고 공유하며 해결해야될 문제이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목회자가 투잡을 하면 목회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 한국교회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외국에서야 투잡이 가능하다. 왜 다르냐고? 이해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외국과 한국은 시간이 다르게 간다. 필자는 외국생활을 오래했었지만 이 나라에만 오면 왠지 모르게 시간은 '없고, 쫓겨살게 된다'. '일'의 개념도 다르다. 우리에게 '일'은 처절한 삶의 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외국에서는 여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목회자를 슈퍼맨으로 보지않길 바란다. 목회만으로 충분히 벅차다. 둘째, 목회자를 신으로 보지 않길 바란다. 목회자는 실수투성이인 똑같은 인간이다. 그렇기에 목회자를 신으로 보는 순간 목회자는 '병'신이 된다. 셋째, 목회자를 장식장에 장식된 고귀한 인형으로 보지 않길 바란다. 목회자도 밥 먹다 밥풀을 묻히고 침을 튀기고 그런다. 과거 선배목회자들은 친히 성도들의 염도 해주었다는 점을 잊지말라.


진정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한낱 별다를것 없는 죄인이라는 자각과, 삶과 일치를 잊지않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만약 대리운전이니, 택배니, 택시니 편의점 같은 일이 그러한 몸부림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기에 되도록이면 목양을 중점으로 성도들 교회공동체가 피상에 매몰되지 않게 사회에서 소외된 사건과 현장에 가까이 가고 , 그 상처받은 이들과 같은 마음을 교회공동체가 함께 가질수있는 그런 우리 삶 주위에 관심과 행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크고 먼것이 아닌 작고 사소하고 가까운걸 둘러보는게 삶이기 때문이다.




모조록. 목회를 최우선이며 투신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내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단순히 '일'을 하길 바라는 요구보다, 목회자들이 사회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또 그런 인식들이 그 교회공동체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며 목양할 수 있게 도움이 되도록 채찍질과 기도를 바랍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편의점 목회자 숑숑숑.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교분리의 역사적 이해.  (0) 2013.08.31
편의점, 대한민국, 그리스도인  (0) 2013.08.31
목회자 딜레마.  (0) 2013.05.09
유아세례에 관련하여  (9) 2013.04.10
교회에 대한 의문점  (0) 2013.03.12
성서의 저작과 사본의 문제  (0) 2013.03.08
Posted by 숑숑숑~




 유아세례는 이레니우스의 문헌에서 언급된 것을 시작으로 어거스틴에 이르러서는 광범위하게 교회에서 행해졌습니다. 유아세례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 이전에는 유아세례에 관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는데, 사실 초기문헌이 원래 많이 남아있지 않은 점을 보면 그 근거는 희박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후 종교개혁 당시 루터나 칼빈은 유아세례를 지지했고 제세례파가 반대함으로서 논쟁이 있었으며,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에서 유아세례는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견해로 베풀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성서적이지 못하다보다는 침례교 생성배경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와 성결을 강조하다보니 나왔다고 봅니다).


  사실 성경적 유래를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축복하시며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며 세례없이 구원(천국)을 언급하셨다는 것에 유아세례가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즉, 초기 교회에서는 유아세례가 구원의 증거라기보다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아이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과부와 나그네, 어린이). 그런 존재 자체도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과 교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당시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속한 자녀임을 인정함으로서 공동체의 책임성과 생명을 강조한 것이죠.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오면서 국가교회로 바뀌게 되고 종교와 국가가 일치되면서 유아세례가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고 보여집니다(부모의 의지에 의해 한 아이가 세례를 받음으로서 교회의 교인, 국가의 국민이 됨). 이런 종교, 정치적 행태가 교회 역사 가운데 계속 유아세례 논쟁을 낳게 된 것이죠.


  즉, 다시 말한다면 유아세례의 정신은 이해하나, 그 행위 자체가 구원의 방법으로 이해되면 그건 그리스도교적이지 못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원이란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회개가 선행되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고, 세례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으로 인식된 자가 예수를 따르기 위한 결심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면 '유아세례 예식' 자체는 어떤 구원의 행위로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아세례가 잘못되었다라곤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아세례를 받을때 고백은 그 유아가 아닌 부모와 그 공동체에게 있기 때문이지요. 즉, 이 유아에 대한 책임성이 강조되는 것이지 유아자체의 구원에 대한 증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보면 교회 공동체라는 성격에 가장 부합되고 있는 것이 유아세례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것은 유아가 아닌 유아를 위한 공동체의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유아세례'의 예식(행위) 자체가 구원의 증표가 될 순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유아세례는 중요하다. 1. 한 어린 생명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 2. 교회공동체의 공동체성에서 공동체 일원이 가져야 할 책임성.


다음의 부분은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헌법에 있는 유아세례에 대한 이해부분입니다. 헌법의 부분도 제 견해와 비슷함을 가지네요 ㅎ


  "구약시대에 할례를 베풀어 유아도 은총의 언약 아래 있게 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 들어가는 표인 세례를 유아에게 주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유아세례는 그들이 신앙으로 응답할 수 있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임을 증거하는 표이다. 이 세례는 부모 가운데 한 사람 이상이 세례교인일 때 베풀 수 있다."


Posted by 숑숑숑~




첫째.술,담배 왜 안되는가?
이건 항상 생각하던 문제 였는데요.
술,담배라는것이 사회적으로 이미지가 안좋아서 그냥 교회에서도 하지말라는건지,
아닌 율법에 어긋나는건지 궁금합니다,

둘째.헌금 꼭 내야하는 것인가?
제 주위사람들 전도를 할려고 하면 걸리는게 역시나'돈'입니다.
십일조,감사헌금,헌금...돈내는게 많다 그래서 싫다.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군요..;;

셋째.편견인가?
어릴때 부터 느낀건데, 교회에서 얘기를 하다보면, 이런얘기를 간혹 들었어요.
"담배피고, 술 먹는 그런 애들...."담배피고 술먹는다고 다 나쁜 사람처럼 싸잡아 말하는 경우,
씁쓸하더군요..

넷째.권위
목사님의 권위가 궁금합니다. 같은 사람으로써 주님의 아들로 봐야하는건지 아님 우리보다 위의 사람으로 봐야하는건지.
여담이지만 예전 제 룸매가 JMS를 신봉하길래 목사님께 부탁하여 통화를 하게했으나 목사님이 전화 한통화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 녀석에게 자신에게 전화를 하게 하라 라고 말하더군요.이미 제가 할 수 있는 선을 넘어 
결국 룸메는 JMS를 따르고 말았습니다.
나쁜길로 빠진다면 목사님이라도 먼저 다가가야 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권위 때문에 그런 건가요?

다섯번째.결정?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홍수가 심하게 난 마을에 어떤 한 청년이 지붕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위에 물은 계속 차오르고 있었어요.
그때 보트가 한척이 옵니다. '청년 어서 타세요~'
청년이 말합니다.'주님이 저를 구해주실 겁니다. 그냥가세요'
보트가 가고 물은 계속 차올라 지붕을 덮을려고 했습니다.
그때 소방헬기가 왔어요'이제 더 이상 구조를 못해요 어서 타세요'
청년이 말합니다.'주님이 저를 구해주실 겁니다. 그냥가세요'
결국 청년은 물에 빠져 죽었지요.
하늘에 올라가 주님을 만난 청년은 물어봣습니다.
'주님 어째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나요?'
'아들아,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보트도 보내고, 헬기도 보내지 않았느냐.'

이 이야기를 들으니 주님의 뜻은 정말 주님 밖에 모르리라 생각이 들더군요.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결국 자신이 판단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 비전과 드림
이건 들어도 들어도 차이점을 모르겠습니다.쉽게 풀어써주실분 없나요?





1. 술과 담배의 문제.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지 100여년정도 되었습니다. 당시 나라가 어려운 시기였죠. 많은 부패들이 있었고, 일본의 침략도 있었죠. 이때 역사를 보면, 어린아이도 담배를 물고 있었고, 일본의 강압적 수입정책으로 술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 예산의 1/3의 돈을 술을 사는데 소비했었습니다.
 즉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신자체를 망가뜨리려 했었죠. 그러다보니, 당시 개신교에서는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때였고, 이러한 일본의 정책에 문제를 지적하면서 선교사들과 한국지도자들 모두 금연금주 운동을 했었습니다. 심지어 찬송가에 금주가, 금연가가 있었을 정도였죠.
 그런 것들이 역사적으로 흘러흘러 내려와서 지금처럼 어쩌면 율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한국 교회역사적 부분이 그러했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다니는 사람이 술담배한다고 하면 교회밖의 사람들도 의아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죠. 그렇기에 자제하고, 안하는 것이 덕을 위해 더 좋은 것이라 판단합니다. 단, 술담배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은.. 잘 몰라서 그러는 철부지들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2. 헌금의 문제.
이 부분은 전에 답변을 드린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인용하여 대체했습니다.
구약에 부분에서 성전의 운용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제사장)들에 대해 나머지 지파들이 십일조와 각종 제사 재물로 그 운용을 했었지요.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교회공동체로 바뀌어집니다. 덧글들을 보니 구약이 끝났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무슨 십일조냐? 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십일조' '감사' 등등의 헌금 이름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실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도 헌금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기초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성립 자체부터.. 였고, 이후 사도행전 4장 말미부터 6장까지에도 그 모습이 나오며,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것이 나옵니다.
 요점은 바로 이겁니다. 날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교회 '공동체성'.  

헌금을 하는 이유는 교회가 잘 살자. 배부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여, 교회 안의 가족들을 돌보고, 그 가족들이 모이는 곳을 정비하고, 이웃들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교회가 성립할 당시 처음 하던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었고, 예수를 믿는 이(전과 같이 자신만의 삶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삶을 시작한 이들)들 젤 먼저한 것이 이것이죠.
 그리고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도.. '공동체성'이 아닌 '개인' 소욕에 따름으로 해석해야 되죠. 성령을 훼방 -> 예수를 따르지 않은 -> 공동체성상실.
 교회란 철저히 머리된 예수를 따르는 지체들의 공간이요 모임자체요 공동체성입니다. 개개인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의식, 함께 돕고 함께 나눈다는 의식이 가장 중요하기에 헌금을 하는 것이죠.
성찬의 의미도 그런 데에 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럼에 있어서.. 헌금은 교회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공동체를 위해 해야할 의무가 되겠지요. 하지만 마음과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하되 개인의 소욕을 우선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한국개신교 내의 헌금에 대한 문제는 두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헌금의 운용을 성경적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
둘째, 성도들이 헌금에 대한 인식과 성경적 지식 그리고 신학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목회자들이 헌금을 강요하기보다, 교회 공동체 내의 각 개인 참여와 의무를 교육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들고, 그렇게 모여진 헌금들이 과도한 부동산이나 교회건축이 아닌, 공동체 내의 나눔과 돌봄 그리고 이웃에게 돌아갔음 하는 마음입니다.

3. 편견의 문제
이거 정말 문제지요. 분명히 성경에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란 말들이 있는데.. 마치 예수시대에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때라고 생각이 듭니다. 외식하여 남을 판단할때는 술 담배를 말하면서, 자신의 추악함을 가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죠. 이 부분은 교회에서 제대로 교육이 안되어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주와 부가 바뀐 것들이 현 개신교에 많이 있어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보단, 자신만의 구원이 중요하니.. 문제지요.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지, 자신이 판단할 것이 아닌데.. 판단하다보니 남도 판단하게 되는 듯 합니다.

4. 권위의 문제.
목사의 권위는 말씀 대언의 권위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각 지체로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이지요. 만약 목사가 자기 권위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문제는 권위 문제라기 보다, 관계적인 문제이거나, 의사소통의 문제 혹은, 그 목사님의 업무과다의 문제 같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목회자이지만, 교회가 커지면.. 1명의 목회자가 감당할 수있는 인원이 참 많아지죠.. 그렇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도 있는 듯 보입니다.

5. 결정?의 문제.
이 예화는 저도 어릴 적부터 많이 들은 것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결정의 문제라기 보다, 책임성의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비슷한 예화로 공부는 전혀 안하고 기도만 하면서 1등하게 해달라고 말한다면 들어주실까요? 신앙은 자신이 그 자리에 가만있으면서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바른 삶이겠지요?


6. 비전과 드림.
사실 국어적 의미로는 별반 다른게 없지만..  일반적으로 신앙으로 성도분들이 이야기하는 비전과 드림의 차이란.. 제 생각에는 비전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소명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 같고, 드림은 말 그대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일반적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길 원하시는 것이 소명이며 그것을 알고 그 일을 준비해나가는 것이 비전의 길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꿈꾸면서 준비해나가는 것이 드림(꿈)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맞나 모르겠네요.. 일반 성도님들이 생각하시는게..


마지막으로..
교회는 앞서 헌금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면서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여러 이야기들(신앙, 궁금점, 교회역사, 전통)을 나눔으로서 각개인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교회지요. 만약 교회에서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없다면.. 우선은 자신을 그리고 교회의 교우들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Posted by 숑숑숑~




(본 글을 뽐뿌커뮤니티 종교포럼에서 말씀보존학회분들과 논쟁으로 쓴 글입니다)


제가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중요점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성서의 각 권의 이해


신구약 66권, 혹은 가톨릭 형제들에게는 66+7.
이 각 권의 저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설명할까 합니다.

보통 '성경'을 생각하면 한권으로 이해하겠지만, 사실 각 권은 저마다 기록시기, 기록동기, 문학적 성격이 다 다릅니다. 그렇기에 성경 각 권을 읽을때는 필수적으로 각 권의 '성격'과 '배경'만이라도 이해한다면 참 좋겠죠.

모세 오경(창출레민신) - 구전으로 전해졌다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 필사되었습니다.
역사서 - 여호수아-열왕기하까지의 신명기역사서와, 

             느헤미야-에스라-역대상하까지의 역대기역사서 

             신약에서는 사도행전도 이 분류로 들어갑니다.
지혜서 - 잠언, 욥기, 전도서 등
시가서 - 예레미야애가, 아가, 시편 등 시적 운율이 있는 책들입니다. 

             시는 시로 이해해야 더 좋겠죠? 
예언서 -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말라기
묵시서 - 에스겔, 다니엘, 요한계시록
복음서 -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서신서 - 로마서~요한3서


기록 시기는 구약은 수 천년, 신약은 AD50-200사이로 추정됩니다.


2. 성서 정경화작업.


 구약의 경우 AD70년경 예루살렘성전이 멸망당하면서, 성전 중심에서 회당 중심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럼에 있어서 종교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점이 '같은 성경'을 읽어야되는 점이 되지요. 그렇게 해서 AD90년경 Jamnia얌니아회의를 통해서 구약정경화작업이 끝납니다.
 우선 위에서 말씀드린 모세오경은 구약시대부터 가장 먼저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에스라시대), 다음은 예언서가 정경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주전 2세기경 : 이때는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불리고 가톨릭정경들이 1차적으로 정경이 되었었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5경과 예언서들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이 회의에서 비로서 유대학자들로 정경으로 채택되었죠.

 여기서 잠시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약정경 수가 다른 이유를 설명해야되는데요.
 개신교는 이 Jamnia얌니아 회의의 정경수를 따르고 있고(39권), 가톨릭은 예수시대 흔히 읽혀졌던 7권들도 정경에 넣고 있는 차이가 있지요. 이에 반해, 신약성경의 경우는 기록연대가 AD50-200년 사이이고, 정경확정의 시기가 AD300-400년에 이루어집니다. 구약성경과 달리 신약성경의 정경확정 이유는 말시온이라는 이단 때문인데요. 이들이 먼저 자신들이 유리한 문서들만 정경작업을 함으로, 기존 정통교회도 정경화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경화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몇가지 점이 있는데,
 1. 사도성(사도의 기록이 중요), 
 2. 정통성(예수의 말씀본질과, 교회전통에 맞는가)
 3. 보편성(방대한 지역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많이 읽었던 기준)
 이 세가지 기준을 가지고 정경화작업이 되었습니다. 한가지 재미난 점은 당시는 지금처럼 인쇄작업이 쉽지도 않았고, 이동이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공동체 서로간의 대화도 쉽지 않았는데 대서양 전역에서 현재 27권의 성서 중 요한계시록을 뺀 26권은 거의 동일하게 정경으로 읽혀졌고 주장되었다는 점이죠.




3. 성경 사본에 관해.

 앞서 1번과 2번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성경은 통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각 권의 저자가 있다.
둘째, 이 낱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정경의 형태를 띄게 되었고(AD200경부터),
        AD400년경에 정확히 지금의 정경형태를 갖추었으며,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관련하여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간의 마찰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쪽복음 즉, 사본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AD400년 이후 성경전체(신약성경)를 갖춘 사본들도 발견이 되었지만, 그 이전 사본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 본문 전체의 사본보다, 각 낱권의 사본들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여러분 1번과 2번을 자세히 읽어보셨으면 어렴풋이 눈치를 채셨겠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인쇄기술이 발달되지도 않았고, 이동의 기간이나 교류가 빠르고 넓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즉, 신약성서의 저자의 손에서 나온 원래의 문서 그 자체는 오늘날 하나도 보존되어 있지 않고 후대의 사람이 그것을 손으로 베껴 쓴 이른바 필사본(筆寫本)들만 남아 있다는 것이죠. 

 한 예로 그리스어 필사본을 조그마한 조각들까지 합치면 수가 5,500개가 넘는데요, 이 필사본들끼리 비교해 볼 때 본문이 똑같은 것이 단 두 개도 없으므로 어느 것이 원본문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인지 저절로 식별되지 않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문서의 재생산은 오직 필사 작업에 의존했는데, 필사 작업이라는 것은 아무리 정확하게 원본 그대로 베껴 쓰려고 노력하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흔히 생길 수밖에 없지요. 
 어떤 낱말이나 어구를 누락하거나 반복하는 것, 어떤 낱말을 그와 비슷한 다른 낱말로 착각하여 바꾸어 적는 것 따위는 비고의적 실수에 속하는 것들이 있고,(한 예로 불가타성경에서는 모세에 관한 부분 중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씌었다는 부분이 '뿔'이란 단어로 적혀서 유럽의 모세상을 보면 뿔이 달린 모세상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와 달리 필사자가 대본을 자기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고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한 예로 난해한 말을 쉬운 말로 풀어 쓰거나 어색한 표현을 좀더 정교한 표현으로 고쳐 쓰거나 어떤 낱말을 다른 낱말로 대체하거나 어떤 낱말이나 어구를 다른 위치로 옮기거나 어떤 내용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교리적 해석을 덧붙이거나 하는 것 따위는 비록 선한 동기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고의적 변개(變改)에 속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쇄술 이전 시기에는 각 지역에 따라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다른 필사본들이 그들 각각의 성경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물론 한 명의 저자가 각 낱권을 성령을 통해 기록했지요. <- 이것은 변개되지 않은 성경의 모습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현재 원문은 남아있지않고, 각 지역공동체마다의 필사본들이 있을 뿐입니다. 앞서 설명했지만 5천개가 넘는 필사본 중 완전히 똑같은 것은 단 두개도 없습니다. 왜냐 고의든 비고의든 공동체의 상황과 문화에 따라서 필사본이 첨가 삭제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원문성경 즉 변개되지 않은 성경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비평방법이고, 석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와 달리 정말 변개되지 않은 사본을 주장하면서 특정한 번역성경 혹은 사본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인 사본에 대한 이해도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좋은 사본들이 발견되어왔고(사해사본-밑의 사본군 참조바람 등), 그것에 따른 성경작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약 특정한 사본에 의한 특별한 성경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한다면, 앞서 제가 설명드린 1-3번의 내용을 보시면 이해되지만 이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성경을 우선시하고, 그 성경의 우위를 위해 특수한 사본들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니 말입니다.

 그런 분들은 변개되지 않은 사본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원문의 중요성을 나타내면서 번역성경을 원어성경보다 더 중요시하고, <-뭔가 앞뒤가 맞지 않죠. 단순하게 비평학 및 사본학에 대해 '짧은게 더 중요하다', '오래된 게 더 중요하다'는게 말이 되냐고 따지지요.

 정말 궁금한 것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변개되지 않는 사본군이 무엇이며, 그 외에 다른 사본들은 어떤 기준으로 잘못된 변개된 사본군이라 주장하는지 의문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사본군에 대한 설명


더보기

Posted by 숑숑숑~



가톨릭은 성서를 구약 46권, 신약 27권 총 73권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는 성서를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이라고 말하구요.


가톨릭과 개신교는 왜 구약 권수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먼저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약 차이는 

가톨릭이 토빗, 유딧, 집회서, 바룩서, 지혜서,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 이외에 

에스더서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를 구약성서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이것들을 구약성서에 포함하고 제2경전이라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이것들을 외경이라고 하구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성서권수가 다르게 정해졌을까?

당시의 사회와 교회는 구약의 부분에서 70인역에 있는 각 권들을 정경으로 인식했었지요.
그런데 팔레스테인에서 유대인(유대교)들이 주후 1세기 무렵 정경확정을 할때에는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7권 그리고 다니엘서와 에스더서의 확장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즉, 종교개혁이 있고 개신교에서 구약을 39권으로 지정할 때는 

사실상 주후 1세기때 유대인들 정경확정 목록을 따른 것이죠.
하지만 루터는 '성경하고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쓸모있고 좋은 책들'이라 평가하면서, 

'외경'이라 이름지어 신약과 구약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외경에 속한 책들을 전제한 경우가 있기에 

읽어보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Posted by 숑숑숑~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 이후 교회공동체는 생겨났다.

  그것을 그리스도교 교회라고 하고, 우리는 분명히 머리된 예수를 위시하여 그 공동체성을 발현한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 교회 공동체성과, 2천년전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성은 과연 동일할까?

  특히 이 나라 현재의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과 지금 현재 교회 공동체성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에 대해 분명한 정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성





  그리스도교가 생성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과 승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두려웠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여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절기를 맞아 리더를 잃었던 현재의 상황을 어찌할 바 모른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래 이스라엘공동체성을 알아야한다. 그들의 과거가 곧 현재이며 그들의 그 현재를 통해 그리스도교 교회와 그 공동체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공동체는 종교공동체로 그들을 인도하여주시는 '야훼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공동체성'을 가진다. 그 이스라엘공동체성은 토라 및 신명기역사서를 중심으로 4가지 강조점을 가진다.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뭐 공동체의 중심이 당연하지. 이걸가지고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에 시각을 돌리는데 사실 이스라엘공동체로부터, 향한, 위한 개념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했음 좋겠다.(구약이란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스라엘공동체를 '위해'있음을 안다면)


둘째, 타 공동체성 배제 

보통 가나안 배척이라고들 표면적으로 말하는데 사실 타공동체성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서 자신들의 공동체성 유지를 그 목적으로 가지지. 이것은 다른 국가와 민족이 가지지 못한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성서에서 말하는 악한 왕들의 개념이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라기 보단(물론 표면적으로 우상숭배맞다) 이스라엘공동체만의 '왕'의 개념을 고수하지 못하고 타 공동체성 안의 왕의 개념을 가져온 자 혹은 '야훼'공동체성을 배제한 경우 '악하다'라고 평한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셋째, 성전 강조

이것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강조함으로서 (사실 이 강조는 드러나는 표면적 '장소'의 강조보다, 그 '장소'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라 말할 수 있다) 야훼공동체 즉, 이스라엘공동체의 구심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외의 예배장소를 배격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타민족공동체성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다.


넷째, 사랑의 공동체

필자는 이 네번째 부분을 주목하고 싶은데, 앞서 위의 세가지는 이스라엘공동체성의 구심을 말한다면, 이 네번째 것은 그 구심으로부터의 시작되는 공동체성을 말한다(신25:1-11). 토라 및 신명기역사서의 많은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공동체 구심인 야훼 하나님은 철저하게 가난한 이들(고아 과부 나그네 레위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함으로서 공동체적 내적 구심인 야훼하나님을 통해 이스라엘공동체의 외적 구심을 가짐으로서 그 공동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네가지 부분은 '오택현'교수의 논문과 연구에 동의하며 인용, 나름의 해석을 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의 승천이후 유대절기를 맞아 또 그 난처한 상황 속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여있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두려워 떨던 그 무리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

  마치 성부 하나님을 구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시작처럼(신25:5-9), 또 그 이스라엘공동체에게 성령 하나님을 통해 약속하신 말씀(욜2:28-29;행2:17-18) 그것을 이루려는 것처럼.. 율법은 예수를 통해, 할례는 성령을 통해.. 더이상 역사 속에서 그 야훼공동체성이 훼손될만한 여지(기득권)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가시적 하나님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고(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그들은 당시 문화에 의한 계급과 차별을 배격했으며(둘째, 타 공동체성 배제), 그들은 모여 함께 떡을 떼며 잔을 나누고(행2:42)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들의 구심을 잃지 않고 분명히 인식하였으며(셋째, 성전강조), 그들은 그러한 내적 구심점을 가지고 현실의 환경을 뛰어넘는 외적 구심을 만들어냈다(넷째, 사랑의 공동체).



  자, 정리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교 본래의 공동체성은 어떠한 건물이나 지도자에 의한 구심이 아니라, 오로지 말 그대로 역사속 현현하신 성자 하나님을 자신의 이해가 아닌 교통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서 그리스도교회 공동체성의 내적 구심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된다.

  또한 내적 구심을 통해 그들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공동체가 된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바로 당시 문화적 가치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현실의 공동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이루어냈다(행2:44-46).






교회공동체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교회공동체는 이런 공동체성을 잃어버릴때가 많았다. 예전에 사랑의교회 건축관련한 토론의 발제를 맡아 적은 글을 첨부해볼까 한다. 제목은 '대형교회에 구원이 있을까?'다. 갑자기 필자가 글을 쓰기 귀찮아져서(배가 고프다ㅋㅋㅋ)라곤 말못하겠다.ㅋㅋ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특별히 교회공동체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 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간다. 교회공동체 또한 예수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한자에 대한 이해를 교회 공동체를 통해 곤고히 한다.


  그럼에 있어서 교회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제도적인 굳어짐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고, 사회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적도 많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보다 교회공동체 자체의 존립을 더 중요시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교회공동체는 제도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 한 예로 예수시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이 그러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 개신교가 그러하다.


  일찍이 본회퍼는 교회를 ‘사귐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 보았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의 일원인 우리의 사귐을 통해 그리스도는 존재하시는데, 그 사귐이란 예수께서 원수들 가운데 사셨고, 자기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 위에서 홀로 조롱당하시며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셨듯, 우리도 '예수를 따름'으로 원수들 가운데 사는 것(사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보면, 교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를 나타내신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딤전3:15)이요, 그리스도의 몸(엡1:23)이며, 성령의 전(고전3:16)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인데 이를 가르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라 한다. 교회는 두 가지 구별이 있으니,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보이는 교회는 온 세계에 산재한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이다“

  이렇게 헌법을 통한 교회공동체의 정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로서 인간 스스로 틀로서 교회를 넘은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신앙은 무엇이며,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공동체성 없는 개인구원이 과연 진정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뜻하는가?



자, 현재의 한국교회를 보자. 그리고 그 안의 공동체성을 생각해보자.
앞서 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이 과연 한국교회에 있는가?

흔히들 말한다.
"너희 교회는 얼마나 모여?"
"나 00 교회다녀? 이름들어봤지?"
"목사님이 대단하신 분이신가보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한다.
"큰 교회, 좋은 차, 좋은 옷 무슨 대기업도 아니고.."
"저렇게 큰 교회지을바에는 주위에 사람들 돕겠다."
"주위에는 허름한데 교회만 번쩍거리는 구나"

  위의 글상자처럼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교회자체와, 목사들을 들먹이며 '공동체성'을 논한다. 또한 믿지 않는 이들은 교회를 보며 '다른 공동체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가 가는가?
자, 쉽게 다시 정리해본다.

1. 무엇이든지 자신들의 교회 자체'만'을 보거나, 그것이 대형화되면 그것은 본질과 비본질의 주부를  바꾸어버릴 위험이 생긴다. 즉, 유지를 위해 원래의 본질을 버릴 수 있게 된다.

2. 체계화된 시스템은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예수가 가르치고 삶으로 보인 사랑의 요소' 혹은 '예수에 의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성'을 현격한 법과 규율로 바꿔버릴 수 있다.

3. 그렇게 되면 교회는 두 가지 관(view) 중 하나를 가지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첫째, 교회의 유지를 위해 소수의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위주로 움직일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교 공동체성 즉 머리된 예수가 아닌 교회 안에 수많은 여러 시각과 주관적 가치관, 운영의 모습, 가운데 매우 보편적인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법적인 매임의 관점하에 움직일 것이다.

  자.. 이해가는가?
  필자가 설명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은, 현재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같지 않다. 현재 한국교회 공동체성은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이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성이라 말할 수 없다. 스스로의 유지와 부흥과 목적을 위해 있는 도구일 뿐이지, 더이상 예수를 머리로, 또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들이 모인 몸'이라 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어느 교회의 중심이 된 '삼박자 구원(요삼 2절)'은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샤머니즘적이고 기복적인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몰핀인가?
  어느 교회의 중심이 된 '제자화'는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을 위한, 역사 속 현현의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한 그 '제자화'가 맞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모이는 교회라는 곳을 위한 '제자화'가 맞는가?
  어느 목사의 논문표절은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편안한 왕좌를 위한 스펙쌓기 일 뿐인가?
  어느 목사의 성추행과 사임 그리고 새로 개척한 ㅎ대ㅅ교회는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성서비스를 받기 위해 혹은, 목빠를 위한 해소장소인 것인가?
  복 받기 위해 교회가고, 신비한 혹은 기적적인 은사주의와, 열광주의적 신명남을 위해 교회에 가고, 정보교류의 목적, 사업의 목적으로 교회가고, 목사가 어떤 잘못을 하든 '주여'라고 울부짖으며 용서하는 분들은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위해서 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고 생각하고 만든 스스로의 '교회'와 스스로의 '하나님'을 잃지않고 유지하기 위해서인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이 없는 어떤ㅋ 일부의ㅋ 한국교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그렇다면 님들 좋아하시는 그 '구원'을 위해 지금 해야할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요약 : 한국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은 한국교회 공동체성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의 상실에서 온다. 공동체성이 다르다는 건 교회 머리되신 예수의 의미도 다르단 소리고, 그럼 구원은 어디있나? 

Posted by 숑숑숑~





ps. 본 글은 '신에게솔직히 3-1화'를 베이스로 적은 글입니다.
     사실 논지를 다르게 해서 쌔딱하게 적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몸도 아팠고(아프고), 방송을 녹음하다보니 
     방송에 치우쳐서 도무지 자신이 나지 않아 결국 이렇게 씁니다;; 

 



Intro.

 


사실 난 '박성업'이란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무엇이 대단해서 내가 그에 대해 글을 적어야되나 싶었다. 그가 무슨 말시온이나 근래의 신천지정도 되는가?

그러다가 내가 방송하는 팟캐스트 '신에게솔직히 3-1'를 준비하면서 신학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의 5가지 패러다임을 설명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레 그 패러다임들 속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를 끄집어 내면서..

이게 왠걸? 여기저기서 박성업이라고는 딱히 말하지 않아도 그가 강조하는 궤적이 묘하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얽혀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그리하야 자의든 타의든 어찌 되었든 이번 방송이 '박성업 헌정방송'이 될 듯하고, 이렇게 글까지 끄적거리게 된 것이다 젠장.

 

본 글 적기에 앞서 필자는 그냥 간단하게 박성업에 관련된 현상만 잘라서 적고 싶지만, 그래도 방송을 준비하며 왜 그런 현상들이 나오게 되었나?’는 본질이 중요한 것 같아 길고 딱딱한 내용을 먼저 서술하게 되는 점 이해하기 바란다.

 

딱히 이 부분을 읽고 싶지 않으면 결론만 보라. 대신 자신 역시 박성업이 되었단 걸 잊지말라. 히힛.

 

 

1. 신학이란.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체계적 진술'이다. 사실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 없다. . 없고 말고. 내가 만약 신을 이해한다면 내가 신이거나, 아님 그 신이 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을 어렵게 말하자면 바르트 옹이 좋아하는 '전적 타자에 대한 질적 차이'란 말.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 신은 우리네 역사 속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왔고, 그 중 몇몇은 그 신을 직접 경험했다.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들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을 하게끔 했다. 하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신이 이 인간역사에 온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것은 역사 가운데 들어와 산 ''은 입체적이었으나, 우리는 (그 신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가치관으로 기록된) '성서'에 의해 읽고 이해하기 때문에 다시금 그를 평면적이 이해하고 있다. 왜냐?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과 문화 그리고 패러다임을 뛰어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고 이해하는 '예수' 2천년 전이 아닌 오늘날 21세기의 가치관과 패러다임으로 이해한 '예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기에 2천년이 지난 지금 그 성서를 읽는 우리도 '예수'를 오해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온 그 하나님 예수를 다시금 '그리스도'로 올바르게 고백할 수 있을까? 그건 바로 신학을 통해서다!!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 안으로 들어온 유일한 참 인간을 참 하나님으로 고백(주는 그리스도시다 행 2 : 36)의 역사이고, 이 고백의 역사는 바로 교회의 역사이다. 또한 이 교회의 역사는 역사 속으로 오신 신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의 합. , 신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2천년의 삶의 자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면적인 성서 속 예수와, 2천년 동안 수많은 패러다임 속에서도 동일하게 고백된 신앙 곧 신학을 함께 보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

 

 

2. 한스 큉의 5가지 패러다임.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에서 교회 역사를 다섯가지 패러다임으로 구분한다.


(ㄱ)  첫번째, 묵시문학적 패러다임.


초대 원시그리스도교는 온갖 박해 속에서 묵시묵학적 패러다임을 가졌다. 그것은 이스라엘민족이 나라를 잃고 포로생활과 지배를 받으며 생긴 '묵시문학'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을 가진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묵시문학과 사상이란, 처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혹은   하나님이 다른 신들보다 약해서 이 나라가 망했거니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인정했으나 그들은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또한 이 세상의 삶에서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기에 인간 역사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종말이 오길, 심판이 있길, 구원이 있길(메시아사상) 바랬던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묵시문학적 사상이다.


이 구약의 묵시문학적 사상의 초월개념이 '공간적(하나님이 역사속으로 개입-메시아론)'이었다면,신약의 묵시문학적 사상의 초월개념은 '시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미 구약의 초월개념인 '공간적' 초월의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극복되었기 때문이다(판넨베르크, 몰트만 인용).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이미 구원과 종말은 그리고 심판을 위한 준비(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시작되었다.당시 원시그리스도교 성도들이 가진 상황은 박해의 상황이었다. 신앙을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도 희망이 없었다.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이었다.


우리는 박해를 당해 죽을지 몰라도 예수처럼 마지막 날,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날이 도적과 같이 온다고 약속하셨다. 곧 임박한 종말이 올 것이다(초월의 '시간적'개념). 그랬기에 초기 원시그리스도교 성도들은 임박한 종말의 (자신의) 부활을 위해서는 예수가 누구셨는지, 그의 삶과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 고민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ㄴ)  헬레니즘 패러다임.


바울로 대표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중심이 되어가면서 초기교부시대까지 헬레니즘적 패러다임을 가졌다. 유대인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은 헬레니즘적 사고를 이용하여 당시 그 문화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의 구조 역시 '' ''이 아닌 '전인적'이다. 바울이 말한 '육적'이란 말은 육신을 뜻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하나님 뜻을 벗어나 행동하는 인간을 가리킨다(자세한 건 신에게솔직히 1 영적전쟁참조바람). 바울이 말한 '영적'이란 말은 영혼을 뜻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령에 사로 잡힌 인간'을 뜻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울이 그토록 영지주의 및 헬레니즘적 이단을 경계 했음에도 그 사후 고대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적 이단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그 핵심적 내용은 바로 '기독론 논쟁'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이신가? 인간인가? 반신반인인가? 인간이라면 그 육은 더럽지 아니한가? 아니면 혼령인가?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순서로부터 그의 본질 모두가 공격대상이었다.


하지만 교부들은 다시금 본질(예수는 그리스도시다)을 고민했고, 헬레니즘적 재해석을 이루어냈다. 한 예로 니케아 신조의 '빛으로부터 빛'은 동일본질에 대한 고백인 동시에, 헬레니즘적 사고의 결정체이다.


(ㄷ)  중세로마카톨릭 패러다임.


교회가 국교회가 되면서, 또한 헬레니즘적 이단들과 논쟁을 극복하면서 교회는 권력이 되었고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은 '장미의 이름으로'란 책을 보면 잘 묘사되어있다. 교회의 권력이 커지면서 황제 위에 군림하기도 했고, 황제의 힘에 눌리기도 하면서 권력싸움을 해나갔다.


신학적으로는 기독론 논쟁이 일단락되면서 '삼위일체론'이 관심을 받았고, 일명 '필리오케논쟁'을 통해 로마카톨릭과 정교회는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 분리로 '교황'권위가 세워지게 되고 교황에 관련된 이념들이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증대는 당시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었던 사제들의 나태함과, 외적으로 큰 교회를 건축함에 따른 재정난을 면죄부로 채우기도 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권력의 증대 속에서도 경건한 이들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고, 중세로마카톨릭 패러다임에 의한 신학 재해석 작업 역시 그들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원래의 신관과, 신플라톤주의 등의 철학적 신관을 함께 이용하여 신앙과 이성이 조화된 재해석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시작은 어거스틴이요, 그 완성은 아퀴나스였다.


(ㄹ)  종교개혁적 패러다임.


교회의 비대함과, 나태함은 그 속의 사제들의 개혁을 일깨워냈다. 물론 그전부터 종교개혁적 움직임은 많았으나, 인쇄술의 발달 등으로 인한 시기와 맞물리면서 루터 등에 의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루터는 로마가톨릭의 제도적 보완이나 사회개혁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관심은 잘못된 구원론과 기독론이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요 부분은 신에게솔직히 3-1를 들어라. 사심으로 홍보하는 것 맞다. ). 루터는 교황 등 교회론 중심의 사고에서 다시금 성서 중심의 사고적 전환을, 권력의 정점에 의한 판단유무(기독교전제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계획을 말했다. 루터 자신은 결코 가톨릭 밖으로 나가길 원하지 않았으나, 가톨릭은 그를 정죄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개신교의 시작이었고, 가톨릭은 이후 반종교개혁을 통해 내부적 종교개혁을 이루어나갔다.


(ㅁ)  계몽주의적 패러다임.


계몽주의는 모든 인류의 자기사고적 전환을 이루어냈다. 신론 중심의 사회를, 인문학중심의 사회로 바꾸어냈다. 그러자 교회는 적지않은 당황을 했고, 당시 사회가 가졌던 계몽주의적 패러다임을 답습했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악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을줄 알았다(슐라이에르마허, 하르낙 등). 칼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2판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아닌, 오직 전적 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을 말한다(이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2판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파티장에 폭탄을 던졌다고들 한다).


칼 바르트, 본회퍼, 틸리히, 판넨베르크, 몰트만 등 이들은 신정통주의로 계몽주의적 패러다임 속에 다시금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며 신학을 재해석했다.

 

 

3. 신학의 부재에서 신학의 부정으로 박성업현상



교회사에 있어서 크게 5가지 패러다임을 나눈 한스 큉은 그 다섯가지 패러다임에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시대적 패러다임 안에서(시대적인 상황과 고착화과정)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교의 변하지 말아야 할 본질(예수는 그리스도시다)을 추구하고 그 시대적 재해석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가졌던 패러다임들 속에서 단 한번도 본질을 추구하거나 매개하거나, 재해석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것은 2천년이 넘는 시간 속에 5가지 패러다임이 있었던 세계교회에 비해 100여년의 시간 안에 5-6가지의 패러다임들이 강요되었던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에 충분히 이해를 해야 할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 100년의 한민족 현대사는 전 세계의 근현대사의 집중이자 요약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다른 나라의 1000년이상의 역사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우리네는 100년 안에 강제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치부할 사안이 아니다. 여기에는 시대적으로 기득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여 이러한 패러다임적 혼란을 만들고 교육시킨 점도 있기 때문이다.


, 어쨌든 그렇다면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해 나가보겠다.


처음에 개신교가 전래가 될 때 온 신학은 근본주의적인 신학이었고, 또한 너무 어린 나이(20대초반)에 온 제대로 된 신학적 수업을 받지 못했던 선교사들 중 대부분은 민족지도자들이 자신보다 더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1890년 당시 선교정책).


워낙 처음부터 근본주의적이고, 또 그런 선교정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학적 토양이 뿌리내릴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가 당시는 일제의 박해 상황 -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이 오는 가운데서도 어떤 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본질로 나아가거나 희망으로 나아가기보다, 요한계시록 같은 것을 그 문서가 기록될 당시의 배경이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하고 설교를 함으로서 종말은 본질이 아닌 공포, ‘희망이 아닌 무서움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신학적 기반이 약한 목회자들은 성도들 앞에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 공포, 강요를 쓰기도 했다(‘내 말 들어 이대로 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식의..).


원래 우리민족은 샤머니즘 성향이 강한 민족이다. 도를 닦던 이들도 많았고, 정화수(정안수)를 떠놓고 비는 이들도 많았으며, 동짓날의 팥죽이나, 아기가 태어날 난 대문 밖에 숯이나 고추를 매다는 등 삶의 전체가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이것은 마치 헬레니즘 패러다임에서 고군분투했던 교부들의 시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는 교부와 같은 신학적 기본이 있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초기 민족목회자 중에는 샤머니즘적 생활을 했던 이들도 많았다(길선주 - 도교 혹 선교). 그들이 목회자로 전향을 했다고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이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한 예로 새벽기도의 태생 역시 그러한 부분이 있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이 관련하여서는 신에게솔직히 2-1를 들어보라). 즉 신학적 토양이나 기본도 없었고, 샤머니즘 적이었던 초기 목회자들은 어떤 착각을 했을까? 삼위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도구처럼 부리기 시작하고, 신비주의적이고 열광주의적인 또한 기복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또 어떤 패러다임이 있었는가? 바로 반공주의적인 패러다임이 있었다. 일제침략기 중후반에 이루어진 사회주의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갔고, 이후 갑작스러운 해방과 분단으로 이념 다툼이 생기고, 또 전쟁 그리고 독재로 인해 당시 독재자들과 권력들이 자신의 독재와 기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념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했을까

한국교회는 원래 기본적 신학토양도 없었고 전쟁을 통해 수백만명의 참혹한 죽음을 실제로 경험 경험했기 때문에 반공의 패러다임을 견뎌낼 힘이 없었다. 거기다 첫 대통령이 장로였기 때문에 교회의 힘과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러다 보니 교회는 더 이상 자신의 적이 없어지게 되었고, 적이 사라진 교회는 권력이 되어갔으며, 또 독재의 시기에 교회는 개발과 맞물리며 정치와 야합하기 시작하면서 대형교회화 되어갔다. 이 부분은 마치 종교개혁의 시대처럼 교회는 덩치가 커지고 권력이 되고 신학이 고착화되어 발전이 없게 되다 보니 더 이상 구원론이라던지 기독론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덩치가 커질까’, ‘어떻게 하면 자신들을 따르게 만들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성도들도 어떻게 하면 내가 복이나 은사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고, 고침을 받을 수 있을까?’ 라는 에고(ego)에 바람만 생기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따름)?’와 같은 본질적 물음보다도 자기만족을 위한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가 있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4-60년대에 신학을 한 이들이 자신의 신학의 지평을 넓히기 보다 외적 치장에만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후배들이 새로운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끼며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단절시켜버렸다. 목회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교육하기를 신학은 필요 없고,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믿으라 한 것을 믿고 복 받고 천국 가는 것을 바라라고 말함으로서 성도들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부정을 강요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5가지 패러다임들에서도 알 수 있듯 신학은 곧 신앙이며, 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그 본질이지 복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쨌든 이러한 풍토에서 신학무용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처음에는 신학이 부재한 채로 개신교가 들어왔고 어느 순간부터 종교기득권과 권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덩치가 커지면서 신학의 부재를 느꼈다면 신학적 사고를 해 나가야 할 것인데, 기득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 신학이 필요 없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학무용론의 수준이 아닌 신학의 부정이다. , ‘신학의 부재신학의 부정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신학의 부정이 무엇인가

 곧, 교회의 부정을 말한다. 기독교의 부정을 말하고, 예수의 부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2천년 전에 예수께서 그 당시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를 위해서 왜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 이 순간,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바라는 예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2천년 전에 말씀으로도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이 역사 가운데 오신 그 은혜, 우리보다도 더 낮은 삶을 사셨다는 그 ,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죽음, 우리로 하여금 그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분을 주는 그리스도시다고백을 하게 끔 해주신 그 부활’.. 2천년 전 그 예수는 지금 이 땅에 없다. 그저 2천년 전 성서기자가 적은 그 낱말과 문자로서 예수와, 2천년 동안의 빈 공간, 그리고 현재 21세기가 있을 뿐이다.

 

 , ‘박성업이라는 사람이 나오게 된 이유, 또한 박성업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바로 신학의 부정에 있다. 한번도 본질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은 종교기득권들의 교만하고도 야비한 행동의 결과에 이 박성업과 같은 이들과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부정은 그들이 근래에 와서 많이 사용하는, 마치 다원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란 것은 어떤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목적이나 규칙이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종교다원주의란 것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쉽게 말하면 산의 정상은 한 군데지만, 그 정상으로 나가는 길은 여러 군데가 있다는 것이다. , 어떤 신을 믿든 진리로 이르는 것은 똑같다는 말이다.


 신학의 부정종교다원주의


 자, 집중해서 읽어보길 바란다.


 예수가 없다

 2천년전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 또 죽음과 부활을 잘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다. 단순히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그 가치관으로 그 성서의 문자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명제로의 예수만 있지, 예수의 본질은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상자 안에 장미꽃이 잔뜩 있다. 그리고 그 상자 밖에는 장미라고 쓰여진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상자 안에 장미가 전혀 없으면서 겉면에 장미라고 붙여진 스티커만 보고 저건 장미다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들에겐 본회퍼가 우려했던 종교화된 껍질만 있지 그 안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예수는 없다.’


 신학의 부정을 말하는 자들이 예전 자유주의신학이란 말로 신학을 부정했다면, 현재는 종교다원주의란 말을 애용하는데.. , 한 가지 물어보자.

그전에 다시 종교다원주의를 쉽게 정의하면, ‘다 다른 것을 같은 진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가 아닌데 예수가 아닌걸 보고 예수라고 말한다면 그건 종교다원주의 아닌가?”


어떠한 교회전통이나 역사적인 이해 없이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적 이해로만 

만들어진 예수를 말하는 것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앞뒤 문맥 상관없이 자신이 필요한 구절만 인용하면서 자기타당성을 말하는 것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교회의 전통을 부정하고 스스로 예수를 물질적 복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자신만의 천국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 되시며 참 진리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신이 보고자 듣고자 하는 대로 

자기가 바라는 예수를 만들어놓은 것이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른가?”


삼위 하나님 되신 성령 하나님을 도구부리듯 하고

은사 받기 위한 영이라 생각하고 마치 성령이 자신에게만 말하는 냥 

남 앞에서 으스대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성서의 원래적인 의미와 교회의 전통은 다 내버려두고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이란 낱말 하나를 방패로 

자기만의 예수, 자기만의 성령, 자기만의 하나님을 믿는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자와 뭐가 다른가?”


 천년만년 해먹으려고 아들을 담임목사로 추대하면서 

성령의 인도라 말하는 당신이 믿는 그 성령은 누구입니까?”


 예수라는 이름만 남았지 예수의 본질은 없는 그것, 그것은 종교다원주의 아닌가?”


열광주의, 신비주의, 기복신앙, 반공주의, 묵시문학, 신자유주의 등 여러가지 패러다임이 섞여있는 한국교회가 그렇게도 당당하게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는 대체 누구인가?


소위 말하는 박성업현상그것은 박성업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박성업을 있게 한, 박성업현상을 있게 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이다. 본질이 없고 중심이 없는 우리 가운데 예수가 없는,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예수로 만드는 것은 다원주의적이며 흔히들 그들이 많이 말하는 우상숭배아닌가

, ‘박성업현상은 신학의 부재에서 시작해서 신학의 부정을 당당하게 말하는 한국교회의 현재이다. 더 이상 박성업현상과 같은 것이 없기 위해서는 본회퍼의 고백처럼 지금 현재 바로 이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고민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숑숑숑~



1. 사람들많이 모인다고 그게 '공동체'가 되느냐? 묻는다면, 난 '아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할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그런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그리스도시다!'란 것을 고백하며 시작된 공동체는 다양한 패러다임 속에서도 그 본질(주는 그리스도시다)를 놓치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의 시간동안의 고백을 인정하지않고 그저 모였다고 공동체라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주의 몸이란 '공동체'는 그저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또한 신앙을 정의하기에 있어서 내가 믿은 것이라 말한다면, 난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보고 내가 깨닳은 것은 나의 가치관과 이 시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해석한 한낱 '나의 감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나와 신의 질적차이를 그렇게 쉽게 단정짓는 가벼움이 아니다.

3.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사귐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신앙 혹은, 나와 비슷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의 부정이다. 신앙이란 2천년전 그네들의 가슴벅찬 고백 '주는 그리스도이다'의 현재성이며, 공동체란 그 고백의 중심을 패러다임에 빼앗기지 않고 꿰뚫는 이들의 따름과 합이다.

4. 난 이 시대적 패러다임을 한스 큉의 5가지 패러다임을 넘어 여섯번째 개별다원주의적 패러다임이라 말하고 싶다. 마치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각자 소견대로 행했다'의 재림이라 생각한다. 이어져온 공동체성도 신앙성도 아닌, 뚝 떨어진 자기만의 주장과 시대적 패러다임에 함몰을 신앙이라 말하고 믿음이라 말한다.  모두들 단어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나 진정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단지 각 개인이 만들어낸 자기의 '신'일 뿐이지.

5. 어릴적.. 그것도 아주 어릴적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을 대구 지하도 헌 책방에서 사서 읽었다. 초딩에게 헤르만헤세니 버트란트러셀이니 그런 책들이 취미였다니 우습지만. 어쨌든 난 '좁은문'을 읽으며 도무지 이해가 어려웠다. 이해가 안된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돌직구의 삶이 아니라 죽음과 기다림을 선택한 것인가가 이해가 안가서였다. 그러나 목회자인 지금 이해가 된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한, 그리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의 '좁은문'을 선택한 것이겠지.

6. 예수의 좁은문.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팔복의 설명 중 말미에 좁은문을 말씀하신다. 좁은문의 구체적 의미는 팔복을 받는이들의 상황 속에서 해석되어야한다. 가난한 마음을 품고, 애통해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는 사람 등 그런 이들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 이들이다. 예수는 아주 친절히 자신의 삶으로 좁은문의 의미를 직접 몸으로 말씀하셨다.

7. 비록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에서 나온 주인공의 결단은 자신의 삶의 자리 안에서 자신에게만 이해되어지는 좁은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 자신이 믿고자 한것을 믿은 것이라 볼 순없다. 하지만 오늘날 종북좌파척결을 말하고, 말도안되는 자신만의 성령론을 구사하여 무지한 이들을 꾀어내거나, QT를 통해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성서의 절대적 해석으로 이해하거나, 자신의 힘든 과거를 해소하는 동호회같은 모임이 '좁은문'이라곤 말 못하겠다. 그들에게 '예수'는 2천년전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을 경험하고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한 이들의 '예수'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없는문'을 좁은 문이라 꾀는.. 마치 가라지를 덧뿌리는 '원수'의 모습아닌가? 그들은 시대의 패러다임에 함몰된 가치관으로 시대의 조류에 넘실거리는 이들을 낚고 그것이 '신앙'이라, '공동체'라 하고 있지 않은가?

8. 우리에게 신앙이란, 홀로 믿어진 것이 아닌 너무도 값비싼 은혜의 선물인 동시에 2천년전 이들과의 동일한 고백이다. 우리에게 공동체란, 동떨어진 나만의 생각이 아닌 철저히 전적 타자의 질적 차이를 경험한 겸손한 이로 2천년전 '우리가 그를 죽였다'의 고백의 현재적 모임이겠지. 

9.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말은 나'만'이 아닌 '우리 함께' 그것도 수천년을 이어져온 신앙(고백)이며, 공동체(삶의자리)에게 하는 말씀인지 모른다.



그대들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좁은문을 향하고 있는가?




ps. 박성업의 이름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딱히 그 사람만 까고 싶은 가치를 못느끼기 때문이죠.
      다만, 그로 대표되는 혹은 그와 비슷한 모순의 한국기독교 문제가 많기에 
      제목에는 그 이름을 좀 써봤습니다.
      더 적나라하게는 '신에게솔직히 3-1화'에서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몸이 아파 녹음을 하다말다하는게 함정이지만.. ㅠ

Posted by 숑숑숑~




'장례'라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살아오며 가장 예를 갖추는 몇 가지 의식 중 하나 일 것입니다.
어떤 시대와 문화와 가치 속에서도 동일한 것이 바로 '장례'에 대한 '예'겠지요.
그만큼 '장례'라는 것은 슬픔을 당한 가족들이나, 조문을 하는 손님에게나 매우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가진 교리적 부분, 성서적 본질을 가지고
한국문화 속 '장례'와 그와 빼놓을 수 없는 '제사'의 부분을 한번 건드려볼까 합니다.



1. 고인에 대한 '절'의 문제가 생긴 배경.
보통 가톨릭 형제들은 장례식에 가면 영정 앞에 절을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 절은 하지 않고, 국화를 두고 고인을 위한 기도로 대처하고, 절은 상주에게 '예'로서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큰 범주에서 고인에 대한 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있습니다.
쉽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가톨릭은 고인에게 절하는 것을 '조상공경 - 문화'로 인식했고, 
개신교는 '조상숭배 - 우상'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요 관련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실질적으로 '고인에게 절'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인식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덧붙입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란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가톨릭도 개신교도 모두 참배했던 쓰린 일이 있었죠
(장로교 고신측과 몇몇 개신교 목회자 및 성도들은 거부했습니다.)
사실 일본 내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을때, 
개신교는 당연히 거부했고 가톨릭 역시 거부(1917년 나가사끼교구 반대사건)했었습니다.
이게(신사참배) 우리나라에서도 강요될때 개신교는 두 말 할것 없이 반대했고(성서에 대한 문자적 이해의 장점이랄까나..),
가톨릭의 경우도 1925년 교리교사를 위한 <교리교수지침서>를 통해 거부선언을 했었습니다.
당시 공립학교마다 신사참배문제로 가톨릭과 개신교 학생들의 자진퇴학 및 휴교 등이 많았죠.
그러다 개신교는 1930대말 각 교단별 총회에서 일제의 무력과 협박으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고,
가톨릭은 1932년 일본 천주교회 동경 대주교가 신사참배가 애국심을 위한 시민적 예식인지 종교의례인지를
문부대신에게 물었고 시민적 예식이라는 답변을 통해 일본 주교들은 이를 근거해 신사참배를 허락했습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이 1936년 5월 18일 신사참배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고,
교황사절 마렐라(Marella)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감상(感想)>이란 서한을
통해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지요.
사실 이 관련 역사적 배경은 바티칸의 경우 당시 이탈리아와 일본은 동맹국이었음으로
정치적 배경에서 신사참배가 허용되었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겁니다.
물론 교황청의 훈령에도 가톨릭 형제 중에서도 개신교 형제들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처형된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역사적 부분이 아직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죠.
먼저 개신교의 경우 이 신사참배 가결건이 총회자체 의지가 아니였기에 매우 부끄러운 부분이었습니다.
(가결 이후 적극적 친일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로교 교단분열문제에도 이 신사참배에 대한 사죄여부가 분열이유가 되기도 할 정도였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폭력과 강압에 의한 가결이었기에, 
타의에 의해 그 가결을 선택한 이들의 치리문제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이 신사참배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잘못했던 과오임을 알고 
강압에 의해 선택되었기에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자신들이 사죄하는 것은 거부한 개신교 목회자들은 
이 관련 부분에 대해서도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런지 강경한 입장을 내세웁니다.
바로 '절'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며 '우상숭배'라는 강력한 입장을 내세우죠.
저는 장례에서 고인에게 절하는 것이나, 제사 때 조상에게 절하는 것에 대해 
그토록 한국개신교가 반대하는 역사적 배경이 바로 이 신사참배의 트라우마에서 왔다고 봅니다.
물론 그 트라우마에 우상숭배(십계명)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첨가되었지요.
가톨릭의 경우, 교황의 결정이 절대적이었고 번복이 어렵다는 점.
그리고 그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장례와 제사의 부분에서 몇가지 부분을 유의하면 '문화'로 받아드린점에서
(공의회 결절의 내막에는 1791년 신해교난 등의 각 나라에서 비슷한 경우로 온 박해와 고통이 있었기 때문)
개신교보단 교리적으로 확정된 부분과 유연한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가톨릭은 '조상공경 - 문화'로 인식, 개신교는 '조상숭배 - 우상'로 이해가 되어진 거죠.
 


2. 제사와, 장례에서 고인에게 절하는 것이 '조상숭배'인가?의 문제
원래 그리스도교가 조상에 대해 배타적인 전승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존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 이해가 다름에 따라 제사나 장례의 절 문제를 다르게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개신교, 가톨릭)가 공통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인식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가톨릭의 경우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 '문화'로 인식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몇몇 부분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입니다.
첫째,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독립된 실체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
둘째,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영이 현세에 살아있는 인간과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는 것.(김동건 교수 책발췌)
이 두 부분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가 부정하는 부분입니다.
가톨릭의 경우 이 부분을 제외하고 '문화'로 인식하고, 
개신교는 각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부분을 절대적으로 보고 반대하는 것이죠.
(하지만 교단적 차이가 있긴 합니다. 한 예로 고 문익환목사님의 경우 고인에게 절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세부적 이해로 넘어가겠습니다.
제사에서 ‘지방’이란 것이 있죠. 귀신을 불러들이는 것은 위의 이유로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반대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도 ‘제사’에 대한 개념을 ‘관습’ 혹은 ‘문화’로 볼 때는
‘지방’을 붙인다던지, 문을 열어 귀신을 불러들인다던지의 그런 것들은 배제되었을 때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무조건적인 ‘관습적’인정은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개신교도 동일합니다. 
다만, 개신교에서는 이 제사에 대한 ‘관습’ 자체도 귀신에게 복을 비는 행위라고 보고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죠.
그러나 ‘제사’란 것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국가가 드리는 일종의 ‘기원’의 방식이었고,
이것이 각 지방과 가정으로 내려오면서 겉으로는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지만
사실상 당시 먹고살기 어려운 가족들이 그 날만은 함께 모여 나누고 먹고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였죠.
그럼에 있어서 이 제사나 장례의 개념이 
조상을 생각하며 미래를 각오하고 가족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정도라면 '조상숭배 - 우상'라고 볼 수 없죠.
즉, 제사나 장례에 대해서 죽은 영혼을 믿고 숭배하는 모임이 아닌,
가족이 함께 모이는 행사의 일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조상공경 - 문화'로 인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은 자와 산자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하나님 안에서(마22:32, 막12:27, 눅20:38, 행10:42, 롬14:9) 
살아있는 부모님을 공경하듯(출20:12, 신5:16, 엡6:2-3) 돌아가신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일정한 형식과 예배가 있다면 문제가 안됩니다.
하지만, 제사에서 강신, 초헌, 사신 같은 절차나 지방을 붙이고 문을 열어놓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3. 세부적 궁금점들.
첫째, 그럼 고인에게 절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건가요?

가톨릭의 경우는 제사에서 지방이 없는 경우, 허용하고
장례식에서 고인에게 절하는 것 역시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고인에 대한 존경과 공경의 의미, 즉 문화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구요.
개신교의 경우는 두 가지 모두 통념상 반대하고 있죠.
사실 개신교에서 이 부분들을 반대하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적 문제의 트라우마와 문자주의적 해석이 있습니다.
또한 제 개인적으로 '절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ㄱ. 제사는 배제하고 장례의 경우 고인과 일면식이 별로 없을 때 존경과 공경의 의미로 절을 할 수 있는가?
ㄴ. 절을 안하는 것도 덕이 안될 수 있으나, 현 개신교에 대한 문화적 인식상 절을 하는 것도 덕이 안된다(롬14-15장 참조).

둘째, 절하고 싶지 않을때, 부득이하게 절해야될 때는 어쩌죠?

마음에서 절하고 싶지 않을때,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상황에 의해 해야한다면
열왕기하 5장 18-19절의 나아만과 엘리사의 대화를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중심에 누가 있느냐 겠지요?

셋째,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은 우상의 제물로 볼 수 있나요?

먹어도 됩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로 부터왔기 때문이죠(고전 10:25-26).
음식 자체는 문제가 안됩니다만 나의 믿음 때문에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8:9-13).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누군가 실족하거나 상처받는 것은 피해야겠죠?

넷째, 장례식에서 국화가 없을때, 향을 피우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요?

가톨릭의 경우 향을 피우는 것을 허용합니다.
개신교의 경우는 국화가 없다면 고인의 위해 기도만 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향을 피우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 과거 집안에서 상을 치룰때 시체의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서.
둘째, 혼령을 초청하고 그 연기를 따라 하늘로 가게하는 강신적 의미로.
가톨릭의 경우 첫번째 이유 즉, 문화적 배경으로 허용하고 있고,
개신교의 경우 두번째 이유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앞서 여러질문들과 같이 자신의 믿음대로 하되, 실족케 하지 않는 행동을 하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숑숑숑~




아마 이 글을 적음에 있어서, 몇 가지 부분을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의 경우 우선 원론적 정의를 알려드릴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신학적 입장의 경우 크게 분류하면 3가지인데, 딱 이 분류로만 볼 수 없다는걸 유념하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정의부분은 객관적 정의는 첫 부분에, 그 뒤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보는 종교다원주의입장을 적었음을 이해바랍니다.
'2. 구원에 대해'의 경우 구원론의 개념이 무척이나 방대하기 때문에 
제가 적은 글'만'으로 구원을 다 이야기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등 너무 방대한 교회적 전통과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적다보니 조금 산만합니다 이해바랍니다.

 


1.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우선 다원주의는 가치의 다양성이 허용되고 존중되어 소수의 입장과 가치관이라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사상 혹은, 
개인이나 여러 집단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는 14-16세기 르네상스 이후로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한 문화나 종교권이 아닌 다른 문화와 종교 간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생겨난 것으로  
절대적인 종교나,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다원성과 다수의 진리를 말하고 주장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렇게 21세기가 되면서 넓게는 세계, 좁게는 대한민국 역시 커다란 하나의 인류공동체를 인식합니다. 
그러자 언어, 문화, 이념, 종교는 충돌할 수밖에 없고,
어떠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서 현 시대는 다원주의적인 모습으로 화해와 화합을 종용하는데, 
그럼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과거 어떠한 상황보다도 혼란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입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딱 이 세가지로 분류되거나 나눠지진 않습니다. 즉, 위의 분류는 이해를 돕기 위한 단순분류라는 말이죠.)

배타주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인격적 만남과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고백을 동반한 믿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1970년의 프랑크푸르트 성명에서 사도행전 4장 12절의 성경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지요. 
오직 참된 종교도 하나이며 나머지 종교는 오류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포용주의는 칼 라너에 의해서 주장되는데, 
그에 의하면 기독교가 구원을 위한 절대종교인 것은 틀림없지만 타종교들도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위한 정당한 종교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타종교들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죠. 
즉, 라너는 타종교들 속에서 그리스도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라너는 기독교만은 타종교들과는 달리 그 무엇에 의해서도 추월될 수 없는 절대적 종교라고 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과 죽음, 그리고 부활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계시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타종교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더욱 풍성히 알도록 경험하게 하는 단계로 진입시키는 것이 선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라너는 타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간과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의 역사는 수많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역사 중 하나일 뿐이지 
그 역사만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역사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힉, 니터, 파니카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구요. 
특히 폴 니터는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수 있듯이 구원의 길도 다수일 수밖에 없다는 파니카의 비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존 힉은 모든 종교는 동일한 신을 섬기며 여호와, 알라 등은 동일한 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다원주의를 주장했습니다.

 

2. 구원에 대해.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할 때, 아주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점을 이해하셔야 큰 시야에서 '구원'이란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구원'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두번쨰, '구원'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세번째, '구원'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이 관련 글을 적은적이 있으니, 짧게 짧게 가겠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링크 글을 참조하시면 될거 같습니다;
첫번째, 구원의 결정권자는 '하나님' 한 분 입니다.
두번째, 구원이란 뜻은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때가 이르렀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란 것이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뜻하는 것은 단순하게 한가지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1. 마음.
2. 죽고나서 가는 나라.
3. 이 현실 그 자체.
이 세 가지 모두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이해할때 이 세가지 모두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도 단순히 '죽어서 가는 곳에 대한 결정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창조목적대로 회복됨을 뜻합니다.

세번째, '구원'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바로 요 부분을 오늘 집중적으로 다뤄볼 생각입니다.
자,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결정지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왜냐하면 역사에서 하나님은 늘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가 그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성취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6:46 참조)

그럼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예수'란 분이 가장 중요하지요.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제 의도를 아시겠지만.. 모를 분들을 위해 설명드립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신 동시에, 살아있는 '말씀' 그 자체시요, 우리가 바라보고 쫓아가야 할 '지표'이며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별 생각없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예수님'이 왜 중요하냐고 물으면(좀 과격하게 말해본겁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만 말합니다. 
틀린 말 아니예요. 맞는 말인데.. 답으로 말하자면.. 주관식의 답이 아닌, 객관식의 답 정도이죠.
왜냐? 굳이 전지전능한 그 분이 '예수'란 이름의 인간으로 오셨는가(태어나시고, 사셨는가)?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물론 똑같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시기 위해서'라고 앵무세처럼 말씀들 하겠지만.. 
이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성에서 '신학화된 한 부분'이란 거죠.
역사에서 보면 한 사건의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원인, 발달, 과정이 있습니다.
덜렁 '예수'의 존재의 중요성을 말할때 앞서 말한 죽음과 부활'만' 말한다면 그 전의 예수의 삶과 말씀은 무엇인가요?
단순 그 삶의 과정이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의미없는 한 과정이었을 뿐일까요?
왜 이 부분이 중요할까요? 
예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성장하시고, 사셨고 말씀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이 통전적 예수의 삶이 중요한 이유는
위 1번에서 언급한 종교다원주의의 부분에도 매우 중요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이것(기독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믿는 사람들이나, 타종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게 '왜 예수가 굳이 왔냐?' 이겁니다.
조금 달리 우리스스로들(그리스도교인들)에게 묻는다면, 왜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겁니까?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그 '말씀'으로 창조된 한낱 피조물을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죄 없으신 분이 죄있는 한낱 창조물을 위해 '죽기 까지 섬기셔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아이러니 때문에.. 이 아이러니한 의미만 우리가 진정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지, 또 예수께서 왜 '구원자'가 되시는 것인지 정말 이해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우리에게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호하게가 아닌 뚜렷히 알수 있을것입니다.
쉽게 말해, 왜 인간으로 오셨는지 이해해야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 죽음&부활만이 아닌 그 삶 전 과정을 주목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빙빙 둘러 이야기하는거 같네요. 그 만큼 하나하나가 많은 신학적, 교회사적 의미를 내포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자, 관점을 조금 바꿔보죠 ㅎㅎ('구원=예수'니.. 구원의 개념과, 예수에 대한 이해를 함께 설명해보죠)

역사 이래로(구약부터 현재까지).. 구원은 한 개인에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댓글에서 '공동체적 구원'이란 단어를 언급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구원이란 공동체성에서 이뤄진다'가 맞겠죠.
우선 구약부터 봅시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현재에 대한 구원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니.. 나눠서 설명하겠습니다.
 (이걸 구약=하나님, 신약=예수님, 현재=성령님 같은 이해로 생각하시면 안되요. 저는 세대주의자 아닙니다.
  다만 구원의 개념발전에 대해서 설명드리면서,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왜 가장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해마세요. ^^)
구약에서는 '예수'란 존재가 없습니다(성육신 존재를 뜻합니다. 물론 삼위하나님은 계시죠 ㅎ). 
다만, 특정한 이(선지자, 예언자, 왕 등)에게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던 그들이 그들의 문화, 가치관과 이해를 가지고
자신들이 '말' 혹은 '글'로서 이스라엘 혹은 이방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즉, '구원'이란 자체가 어떤 특정 이를 위한게 아닌 공동체적 의미란 거죠. 
그러나 아무래도 직접적으로(하나님 -> 모든 이) '말씀'이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가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역시 자기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말씀은 오해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배는 드리는데 마음은 하나님께 가있지 않았고 나라는 멸망했으며 도무지 주님의 뜻을 알수없게 된거죠.
그리곤 사람들은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임마누엘)'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길을 이룰 수있을거라 말이죠.
그래서 '메시아 사상'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의 바램에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아이러니하죠? 응답자는 우리여야되는데..)이 '예수'입니다.
즉, 구약에서 '구원'이란 공동체적 개념이었으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했고, 
그래서 '말씀' 그대로이신 창조주께서 직접 '함께 하시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보았고 그 분이 결국 오셨습니다.

신약에서는 특히 복음서에서는 '예수'란 존재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그 자신이었으나, 인간이란 한정된 육체를 가지셨죠.
과거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 사람이 이해한 '구원의 말씀'이 백성에게 다시 전달되는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님 그 자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말씀'하시고, 삶으로 보여주시게 된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게, 아니 아주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평범하게 성장하셨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란 말씀을 계속 하십니다.
그리곤 삶으론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함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알려주셨구요.
그러나, 사람들은 말씀 그 자체가 말씀하시고, 몸으로 보여주셨는데도.. 
그 분의 말씀과 삶을 창조자가 만든 우리 피조물 원형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피조된 이후 자신들의 삶에서의 지식수준, 돈, 권력, 이해관계 등을 가지고 이해하다보니(죄된 모습)
  (쉽게 이야기하면 각자마다 다 다르게 하나님을 도구화했던 종교화적 모습들로  '메시아'란 개념을 이해했죠..)
결국 '말씀'은 커녕, '예수'란 존재도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며 그를 죽이기 까지 했던 겁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그렇게도 소망한 것이 이뤄졌음에도.. 
그 메시아가 이런 모습인 줄은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망가고, 공회는 그를 죽였죠.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감히 한낱 피조물이 요구를 했는데(메시아), 
은혜로 친히 누추한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셨음에도 저마다 자기 맘대로 이해하고.. 
그가 오셔서 함께하시면 구원에 이를 줄 알았는데..
'구원'은 배척당하고, 배신당하며, 홀로 남겨져 죽임을 당했다는거..
즉, 예수 시대때는 말씀 그 자체,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이 '구원'에 대해 몸으로 입으로 말씀하셨고(구약과 다른점),
그 말씀의 대상은 '모든 이' 즉, 공동체적이었다(구약과 동일점).. 
하지만 한가지 전제가 있는데 바로 '그(예수)를 따라 살때' 가능하단 것이고,
그 따라 삶의 예와, 구원의 결정의 예를 예수께서는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다시말해, 구원의 공동체적 의미는 구약과 동일하나, 다른 점은..
구원 그 자체가 이 땅에 오셨다는 점이고,
구원 그 자체이신 예수는 앞서 말한 구원의 전제조건의 예를
그의 삶과, 그를  따른 이들로 보여주셨단 겁니다(복음서에 나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의 승천 이후 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성립된 것이죠.
사실 누가, 요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흩어져있었지만..
여자들에 의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의해 부활한 예수의 소식을 듣게되었고
제자들은 모이게 되었죠. 그러나 불안했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죠.
그러던 중 제자들 중에 나타나신 예수는 '성령 하나님'을 구하길 말씀하셨습니다(요20:22).
이후, 제자들이 '살 방법'은 모여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보았으니 주님을 따라 살긴 해야겠고, 
따라 살려니 대제사장과 기득권이 주시하고 있었음으로 예수처럼 그렇게 담대하지도 못했죠.
그래서 그들은 승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담대하지도 않았고,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러던 중 '성령 하나님'께서 '살 방법'을 두고 기도한 이들에게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변했습니다. 
육체현현(예수)를 보고서도 저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주님을 이해했고, 그래서 주님을 따라 살지 못했던 이들이
함께 모여 성령 하나님과 동행할 때, 과거 두려움이 불안은 기쁨과 확신 그리고 나눔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립된 것이지요.
즉, 전해진 말씀(구약)으론 부족하여 말씀 그 자체(예수)가 오시고 그래서 구원을 이루는 분명한 삶의 지표(목표)는 드러났으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가슴(마음)은 없었는데(신 10:12,16) 말씀 그 자체가 그 마음에까지 친히 오셔서 함께하셨다(임마누엘)는 거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을 이루는 삶을 가능케 하신 성령 하나님의 본질도 이야기해야 되겠네요.
보통 AD400년가량까지 예수가 누구인가는 기독론 논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참 인간, 참 하나님'이란 개념을 사람들은 저마다 문화적 선이해를 가져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를 반신 혹은 영적 존재 혹은 인간으로만 오해해서 이단들이 창출되었죠.
그리스도교는 외적으로는 로마의 탄압과, 내적으로는 이단과 싸웠습니다.
우리처럼 '예수는 누구신가?'란 고민없는 이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치열하고도 고백적 시대였죠.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보신 분이 계시겠지만.. 
요즘 우리 인간이 살아갈때 별 중요치 않는 것을 어거스틴은 고민했었는데(악, 영혼, 죄 등)..
사실 이러한 고민들이 진정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너무 우리네가 복과 천국가는 것만 구하는 예수를 나의 도구화시키는 것에 비하면 
정말 겸손한 한 인간의 고민이었기에 존경받는 고전이 된거죠.
말이 다른 곳으로 가네요.. 암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가 누구신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성령 하나님을 고민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면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설명 중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는 부분이 유일하고, 
성자 하나님의 부분은 탄생부터 죽음 부활 모두가 있고(당연히 그게 논쟁 중이었으니..),
성령 하나님의 부분은 교회와 함께 나오며 '교통'하는 특성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오순절운동(성령운동)이 벌어지면서 성령 하나님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는 좋은 점도 있으나,
각 나라의 문화에 따라 샤머니즘적 성격을 가진 '영'으로 이해되거나,
은사와 능력을 받기 위한 도구로서 받는 '영'으로 인식되는 문제점들을 가지게 된 것이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서론이 길었는데, 
성령 하나님의 본질과 성격 즉, 우리에게 어떤 것을 위해 오신 하나님이신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선 성령 하나님의 본질은 '각 사람에게 말씀 그 자체로 우리의 지표가 되신 그 분(예수)를 이해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이상 문화, 시대, 가치에 따른 인간의 이해로 오해되어 인식하는 인간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 스스로 응답하는 인간에게 찾아가시는(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시죠.
또한 성령 하나님은 '공동체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시죠.
율법의 최고 계명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시죠.
누군가는 이렇게들 말을 하죠. '성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
또, 누군가는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셨는지, 자신이 만들어낸 내적 소리인지.. 어떻게 구별하냐'고 묻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마치 직접계시나 특별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좀 심하게 말하면 무당이 신받듯 말하고,
후자의 경우는 그럼 성서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구별할 수 있냐? 그냥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 않냐고 말합니다.
근데요. 분명한 것은 '성령님의 본질과 성격'이 아닌 것이라면 그 행동이나 말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서 전반에 '성령 하나님'에 관한 내용들이 나오죠. 
구약에서는 '루아흐'란 단어.. 한글로 생기 혹 생령, 하나님의 영으로..
신약에서는 '프뉴마'란 단어.. '성령'..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한 경우 한 개인의 역사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일하신다는 거죠(마18:20).
특히 신약에 와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성령의 열매'나 '성령의 은사' 역시 
한 개인 차원의 도구가 아닌, 공동체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갈5:22이하)가 한 개인을 위해 주어진 것인가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열매들이 나 자신만을 위해 얻어지는 것인가요?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위해 가져야 되는 것인가요?
성령의 은사는 어떠한 가요(고전12:4이하)? 하나님께서 주시는 개인의 능력을 말하나요?
그 은사들은 모두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지요.
또한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값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 '겸손'하게 구할 때 가능해집니다.
행여들 부흥회나 가보면 성령체험 운운하면서 말 흐리며 기도하기, 방언받기 하는데 우스울 따름이죠. 
그거 무당 신받는거랑 뭐가 다릅니까? 
'은혜'란 단어는 '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은사'란 단어는 '카리스마'이구요.
'카리스'란 단어는 보편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말할 때 그 '은혜'라 함은..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거저 주어진 것.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스스로 자신을 계시한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정말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함'을 구할 때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러했듯 
다른 모든 피조물(롬8:19-24)을 사랑하라고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사란 단어 '카리스마'의 경우는 각 개인의 특성마다 다르게 주어진 선물을 뜻합니다.
그건 단순히 한 개인에게 주는 선물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겸손한 자로 이웃을 사랑하는 첫 열매로서의 임무에 주어진 군대 주특기? 같은 거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공동체를 위해 써야만 하고 그것의 본질은 '사랑'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최고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인 동시에 이웃을 위해 가져야할 우리의 마음이기때문이죠)
은사의 내용이 있는 고린도전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은사주의가 팽배했습니다.
그러자 은사를 가진 이들끼리 누가 더 위인지 뛰어난지 으스대면서 하나되지 못했죠.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한 성령이 각자의 특성마다 주신 것으로 '사랑 =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보시죠. '성령 하나님'의 본질과 성격이 이해되십니까?
쉽게 '성령'운운하며 마치 요술공주 밍키가 가지고 있는 요술막대기처럼 도구화하는, 
능력화하며 남들 중 자신이 우월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같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마치 자신의 말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뜻인냥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비 성서적, 비 성령적, 비 그리스도교적인지 아시겠지요?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말씀에서 무지한 우리의 오해와, 성자 하나님의 자기현현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는 오해를 
깨어주시는 지혜의 영인 동시에, 구원에 이르기까지 간구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창조목적)를 이루기 위해 함께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롬8:26-30) '구원의 주체'가 되십니다.

다시 '구원'의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지한 우리들에게 참 다각도로 
'창조 목적을 알려줌', '자신을 따름', '하나님 나라를 이룸'에 대해 계시하신걸 알수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을 성전삼으시는 성령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이유는 유일회적 현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오해되기 쉽고,
또 성령 하나님의 내재가 '본질과 성격' 외에 가시적 기준이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유일회적 육화하신 하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따름'에 대한 외적 기준을 분명히 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것이 또 다른 행위주의 혹은 율법주의가 될까 성령 하나님을 통해 내적 기준을 채워주심으로서
한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충분한 자기 계시를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쉽게 말해 삼위 하나님은 다각도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 계시를 하시고,
인간의 오해로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님 본질을 서로 채워줌으로서 우리에게 말씀과 각오 그리고 따름을 요구하십니다.
특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중요한 이유는..
단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신학화된 포인트 만이 아닌,
인간이 지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외적 현현(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번째, 값없이 주신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않는 겸손함
두번째, 삼위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
세번째, 내외적 기준(성자, 성령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 입니다.

 

3. 그렇다면 한국교회와 우리들은 구원에 이르고 있는가.

앞서 1번에서는 객관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살짝 정의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세 가지 개념을 정의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이해하는 개념을 말씀드렸죠(타 종교분들은 이해바랍니다).
다만, 세 가지 부류의 장단점을 말씀드렸는데, 딱 이렇게 나뉘어지지 않는다는거 
그리고 교회전통과 성서적 입장에서보면 이 세 부류 어느 쪽만 '옳다'고 할 수 없단 점을 말씀드립니다.
배타주의의 경우, 기본적으로 구원론의 교리적 원리는 상응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 즉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개념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 
그리고 교회전통에서 말하는 '교회'의 개념 즉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측면에서 보면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가시적 교회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한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비가시적 교회란 하나님 만이 아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말하며 앞으로 세워질 선택된 이들의 교회를 말합니다.
이 개념은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과 상응하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어거스틴의 주장이기도 하며, 교회헌법에 명시된 교회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가시적 교회가 배타주의를 가지면, 그 일을 통해 비가시적 교회(미래적 교회)를 인정치 않고 무시함으로서
또다른 바리새적이고 율법적 개념만 남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포용주의의 경우, 성령 하나님의 교통과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에 대한 이해의 장점은 있지만,
결국 타종교를 '선교'해야된다는 결론은 동일한 감춰진 우월적 인식을 가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경우, 성자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현현이 마치 타 선지자 중 1인으로 인식됨으로서
창조주의 성육신(육화)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개념 중 인간의 응답인 '따름'을 상실시키며, 
결국 자기합리성을 추구함으로서 종교적으로 가장 합리적 대화는 할 수 있지만,
더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닌, 자신이 믿는 어떤 것도 다 하나님이 되는 오류를 가집니다.

2번에서 제가 적은 '구원'의 내용과, '삼위 하나님'의 본질로 앞의 세 가지 개념을 보자면,
분명 세 가지 개념에서 어느 쪽'만'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외적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시화된 진리 그 자체이며, 은총의 외적 역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의 개념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과 역사의 개념으로서는
배타적 태도를 가지거나, 선교적 공격성을 가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비가시적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고 내 증인이 된다(마28:18-20;행1:8)'는 전도와 선교의 개념에서 최우선 되어야할 것은 
제자를 '삼는'다가 아니라,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는 '삶' 즉 '따름'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래 죄인이었으나 주님을 통해 의인이라 칭해짐을 깨닮는 그 '사랑'
하나님 그 자신 자체인 '사랑'을 마음에 둠(성령과 함께 함)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자녀됨을 겸손히 감사함으로 '삶(따름)'으로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신10:12-22(특별히 18-19절참조).
즉,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이를 어떻게 하기보다 어떻게 '사는지(삶)'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누가복음의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외침이 이 시대 속에 가슴 울림이 됩니다.

자, 마지막으로..
종교다원주의의 개념과, 구원의 이해를 하다보면 아이러니하게 한국 개신교 문제와 겹침을 봅니다.
배타주의와 포용주의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자신들의 우월성으로 만들고 하나님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면,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껍질로 결국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믿든 모두 구원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자기이해로의 구원을 말하죠.
이렇게 봤을때,
한국 개신교에서 그렇게도 '종교다원주의'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교회전통과 역사적 이해없이 문자주의, 근본주의적 이해로만 당신들의 종교화된 '예수'를 말하면서..
마치 자신들의 주장'만' 참 진리인채 하는 당신들은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앞뒤 문맥따윈 상관없이 자신이 필요한 구절만 인용하며 자기타당성을 말하는 
당신은 이단과 뭐가 다르며,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의 전통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교의 형제된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예수를 물질적 복을 주기위한 도구를 만들고, 
자신 만의 천국을 위한 도구로 삼는 당신들은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이 되시며 참 진리가 되신다고 말하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려고하는 종교화된 '예수'를 믿는 당신들은 종교다원주의자 아닙니까?
삼위 하나님되신 성령 하나님을 도구부리듯 하고, 은사 받기 위한 영이라 생각하고,
마치 성령이 자신에게만 말하는냥 남 앞에서 으스대는 당신들이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결국 성서나, 교회전통은 다 버려두고..
만인제사장(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은 님들이 말한 그것과 다름요)이란 낱말 하나의 방패로
자기'만'의 예수, 자기'만'의 성령, 자기'만'의 하나님을 믿는 그것.. 종교다원주의자와 뭐가 다릅니까?
천년만년 해먹을려고 아들을 담임목사로 추대하면서 성령님의 인도라 말하는 당신이 믿는 그 성령은 누구입니까?
그건 자기를 믿는거 아닌가요?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믿는 것 아닌가요? 
결국 삼위 하나님은 사라지고, 나의 욕구와 만족 내가 원하는 것을 보기위한 '도구'가 되지 않았나요?
본회퍼가 이런 말을 했소. 
'신 없이, 신 앞에'
'종교화'된 신 없이, '참 진리'되신 신 앞에 나오시오!
추사 김정희 선생이 '入古出新(입고출신)'이라 했소. 근원으로 본질로 돌아가시오.
부자청년은 '슬픈 기색'이라도 띄며 돌아갔거늘, 당신들은 '즐거운 낯짝'으로 자신이 뭘하는지 모르지 않소!

우리는 진정 구원에 이르고 있습니까? 당신들의 매 순간은 누가 당신 중심에 있습니까?

 

 

 

 

* 글을 마치며..
사실.. 아주 복잡한 교리들이 함께 나온거라.. 머리 정리를 해가며 적었지만, 적고나서 보니 여전히 산만한 글입니다.
머릿속에서는 큰 맥을 두고, 맥에서 맥으로 이어나가다 중요 교리부분은 설명을 해야되고하다보니 무척 길어지네요.
강의로 했다면.. 지금 글에서 적지 않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들과, 교회사 특히 AD400년이전의 기독론 논쟁과 신조들, 
그리고 성령운동의 역사적 이야기들을 더 많이 자세히 다룰텐데..
글은 역시 어렵습니다. 단어 하나가 끼치는 오해와 영향력을 생각하니.. 괜히 적었나 싶기도 합니다.
평안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숑숑숑~




사실 저희교회에서도 이 무상급식에 대한 부분이 이리저리 스믈스믈 말들이 나왔어요.
그리고 많은? 분들께서 제게 '신학적'으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물어보신 분들도 많았구요.
그래서.. 뭐. 제가 아는대로 왜 교회가(?) 무상급식에 반대하는지 조금 적어볼까 합니다.

무상급식 반대하는 이유?

사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부류는 한국개신교 내에서 아주 무슨 규격처럼 딱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째, 대형교회.
둘째, 대형교회 목사들.
셋째, 정치적 기독교단체 or 친정부(현) 기독교단체
요 세 부류이구요.
뭐 넷째까지 넣자면, 그다지 생각없으신 목사분들과 그들을 추앙?하는 생각없는 성도들이 추가되겠네요.
이 세 부류 혹은 네 부류들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이유가 각각있습니다.
요 부분은 제가 목회자임으로 목회자 세계?에서 흔히들 있는 이야기들과, 
대한민국 현대사 & 대한민국 현대교회사를 공부하고 취미로 논문을 적어본 근거들을 종합하여서 적어봅니다.

우선, 대형교회의 무상급식 반대이유는.. 쉽게 설명하자면 돈줄쥐고 있는 분들의 교회내 정치적 개입에 의한 것입니다.
제가 제 글에서 누누히 말씀드린 부분이지만.. 
신학적으로 이 대형교회(mega church)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는 뜨거운 논쟁 속에 있습니다.
왜냐? 교회가 대형화되어가면서 전통적으로 '사귐으로서 공동체'의 성격은 사라지고,
목회자가 성도를 돌아보는 것에도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또한 대형화가 시작되면 그 가운데 물질적 힘이 사회와 같이 체계화되면서
그것은 본질(사귐을 통해 이뤄지는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과 비본질의 주부를  바꾸어버릴 위험이 생기게 되죠. 
즉, 유지를 위해 원래의 본질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체계화된 시스템은 유지를 위해 예수가 가르치고 삶으로 보인 사랑의 요소를 현격한 법과 규율로 바꿔버립니다.
더이상 목회자나 성도들은 예수를 따르는 삶보다, 
구원으로 이르는 방법을 사고 파는 거래소 혹은 구원을 이미 얻었다는 기득권적인 이중적 태도만 남을겁니다.
이로써 대형교회는 두 가지 관(view) 중 하나를 가지고 행동하게 될 겁니다. 그 거대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첫째, 소수의 교회의 유지를 위해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위주로 움직일 것입니다.
둘째, 대형교회 안에 수많은 여러 시각과 주관적 가치관, 운영의 모습, 
        가운데 매우 보편적인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법적인 매임의 관점하에 움직일 겁니다.
이렇게 대형교회는 현실의 대한민국 모습에 대한 함축적 상황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대사적으로 보면 대형교회의 태동이 군사독재와 개발에 의한 점을 보면, 꼭 현대사의 대한민국과 흡사하죠)
다시말해, 
대형교회는 더이상 그리스도교적 본질보다 그 덩치유지를 위해 존재함으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온 교회유지를 시킬 수 있는 세력들이 힘을 가지게 됨으로서 그들의 말이 예수 위에 있게 되죠.

그럼 대형교회 목사들은 왜 무상급식에 반대하느냐?
당연히 대형교회 목사들은 순진한 성도들에게는 '신(예수)'처럼 추앙받으면서,
교회 내 정치적으로는 교회덩치 유지를 위해 
위에서 언급한 사회기득권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교회가 작고 모든 성도들과 목사가 함께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목사를 신처럼 추앙하지도 않을 것이며, 교회유지를 위해 돈이 많은 이들에게 힘이 몰리지도 않을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는 '장독'과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말짱해보여도 작은 구멍과 흠만 있어도 '깨진 독'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유지를 위해 사회기득권들의 사회적 요소를 교회 공동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버리면
더이상 목사는 목사가 아니요, 교회는 교회가 아니게 되고 단순히 이익을 위해 모인 사람과 단체가 될 뿐입니다.
이처럼 대형교회 목사들은 자신들이 허울좋게 사는 법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원래 대형교회의 태생자체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친일독재, 군사독재, 경제개발에 빌붙어
기득권에 아첨하여 등장했으니 더더욱 그렇죠.
현실에 와서는 지난 10년간 대형교회가 점점 쇠퇴하면서 이들 목사들은 당연히 자신의 유지를 위해서
기존의 세력과 더욱 연결되고 긴밀한 협의가 있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이죠.

'정치적 기독교단체 or 친정부(현) 기독교단체'가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얼까?
지난 10년의 세월동안 어느때보다 정치적 성향이 짙은 기독교단체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기독교단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대형교회 목사들이 모여있다.
둘째, 원로목사(은퇴한) 목사들이 모여있다.
셋째,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목사들(신학대 및 신대원 졸업자가 아닌..)이 모여있다.
보통 이 세 부류가 정치적인 기독교단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이 정치적인 기독교단체를 이루고, 현 정부의 행태와 친일수구기득세력을 적극 지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앞서 언급했듯 대형교회 목사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과거부터 친일수구기득세력과 연결되어 
        세력유지차원과 맹목적 신앙으로 아주 평생 왕노릇 신노릇 하기 위해서(친일수구기득세력과 비슷함)..
둘째, 교회 안에 틀어박혀 사회정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경제개발 박정희 만세와 장로대통령 만세 
        그리고 전쟁경험에서 오는 극단적 '빨갱이 단어'혐오론자들에 추가로 은퇴로 생활자금이 아주 많이 부족해서(어버이연합과 꽤 비슷)..
셋째, 한국 개신교의 주류 목회자에 끼지도 못하고(목사안수 돈주고 산게 걸려서..), 
        밥 벌이 할려니 예전처럼 병고친다니 예언한다니 그런 것도 안먹히고 
        사회에 눈을 돌리니 여기가 노다지란 생각에..

마지막으로.. 생각없는 목회자와 생각없는 성도들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이유는?
왜.. 우리나라에도 정치에 관심없고 지 먹고 사는 것에만 혈안이 된 분들이 많이 있죠.
또 왜.. 그냥 소탈하니 정치 같은 큰거 생각하지 않고 삶만 살아가시는 분들도 꽤 많이 있죠.
거기다가 왜.. 나랏일은 나랏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긍정행복주의자님도 꽤 있죠.
똑같습니다.
그저 교회 일만 생각하고, 자기 구원이나 신앙에만 관심이 있다가..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에,
평소 책이나 티비를 통해 자주 본 유명한 목사님들의 주장이라는 것에
아무 생각없이, 성경적 고민없이 그저 따라가는 분들.. 정말 많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요.
대한민국 목회자들과 성도 중 거의 대부분이 이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선교사들이 일본의 힘에 눌려 '정교분리'를 외치며 
독립운동하던 한국목회자들을 정죄시키고, 선교사들의 논리를 쫓던 이들이 주류가 되어서
그때부터 '성경에 의한 정치적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인은 절대하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게 있습니다.
틀리든 맞든, 종교가 있든 없든, 정치적 견해는 꼭 있어야 되고,
목회자들은 더더욱 성경에 의거하여 바른 정치적 견해를 주장함으로서,
70-80년대 대한민국 사회와 민주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앞장선 선배들을 따라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무상급식에 대한 성경적 근거 


1. '선한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눅 10:25-37).
사실 이 비유는 바리새인의 이웃에 대한 개념의 오해를 풀기 위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의롭기 위해서 이웃에 대한 구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구제란 것은 이웃과 자신을 구분짓고, 위에서 아래로 주는 것이지요.
그런 이해의 개념을 예수께서 바로 잡기 위해 이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은 '내가 도와줄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도와줄 이웃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는 모습이죠.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마지막에 도리어 대답하기보다 바리새인을 향해 다시금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도와줄 이웃과 자신을 구분하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예수는 신 앞에 이웃과 자신은 동일함을 말하고 있지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이란 남는 떡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함께 울고 함께 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2. '오병이어' 사건.
뭐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개로 남자만 오천을 먹였다는 그 이야기 다들 아시죠?
남자'만' 먹인 것이 아니라, 남자인원만 5천가량 먹였다는 말입니다.
여자 아이 노인을 포함한다면 수 만은 족히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인 이들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하위 50%에게 준게 아니라 모두에게 주었고
마 14:20, 막 6:43, 눅 9:17에는 '먹고 '다' 배불렀더라'라고 적혀있지요.
또한 처음 물고기 둘과 떡 다섯개를 모을때도 한 아이의 희생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무상급식이 행여 세금폭탄이더라도 성경적 배경으로는 감당해야됩니다.

Posted by 숑숑숑~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계보랑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계보랑 왜 다른거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면 그 내용이 동일해야 할텐데 말이죠

우선 이 점을 먼저 말하고 답변을 자세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긴 하지만,
참고로 여기서 '하나님의 영감'에서 '영감'이란 원어로 '데오프뉴스토스'를 뜻하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입김에 의한'이란 의미로
저자가 성경을 쓸 때 하나님의 격려, 고무, 감화, 감동, 계시 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적극적 감화에 따라 이끌려 쓰여지기도 하고(예언서 같은..),
고무되어 어떤 상황을 기록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기록될 때의 저자의 의도와 저자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 그리고 인식과 지적 수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서의 야곱의 식구수와, 실제 창세기의 야곱식구수는 다르죠.
그것은 스데반이 기초로한 자료가 셉투아젠트라고 불리는 70인경이었고, 70인경에 75명이라는 명수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스데반이 참고한 70인경에서 75명과, 히브리본문 창세기의 70명의 차이를 알고 있음에도
75명이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라도 그 말을 한 스데반의 설교를 정확히 보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75명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저자의 의도와 자료, 그리고 저자의 지적 수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시고,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의 계보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실 예수의 족보에 대한 자료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전 그 훨씬 이전의 기록들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족보에 관한 자료들 또한 달랐을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마태와 누가복음서의 성격에 따라 
  (복음서마다의 저자의 의도가 다 다른 것, 
   예를 들어 마태복음서는 구원자로서 예수를 강조, 누가복음서는 가난한 이와 이방인 모두의 예수를 강조)
저자들은 이 정확지 않은 족보들을 매우 신학적으로 다룬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마태복음의 예수의 계보에 관해.
마태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숫자상징법을 밑바탕에 깔고서 작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각 자모에는 수 값이 있는데, '다윗'이란 이름을 나타내는 히브리자모들이 지닌 수 값을 다 합하면 14가 됩니다.
히브리어 자모의 수 값이라든지 이런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매우 흔한 것으로 시편의 시 내용중에도 이런 식의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9-10편, 119편의 경우 히브리알파벳에 순서에 따라 절의 단어나열이 순서대로 이죠..
아무튼 히브리 자모의 수 값에 따라 예수님의 계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이 열네 대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서(마1:17),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의도하고 선포하려고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강조한 것이죠.
숫자 상징법을 살리려 하다보니, 8절에서 요람과 웃시야(아사랴) 사이에 아하시야와 요아스와 아마샤 세 임금이 빠트려지기도 하죠.
하지만,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계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거나(라합, 룻), 죄인으로 통했던(다말,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여자 네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계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죄인들도 들어있음으로,
이스라엘 아닌 사람들과 죄인들도 처음부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28:19; 9:1-3 참조).
즉, 유대의 참 구원자로서 예수님은 죄인이나 이스라엘 밖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낸 것이죠.

2. 누가복음의 예수의 계보에 관해.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눅3:21-22에서 예수님의 인격에 담긴 하나님의 비밀을 밝힌 뒤에 3:23-38의 계보를 통해,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시는 위치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 계보의 밑바닥에도 숫자 상징법이 깔려있는데, 마태복음과는 달리 완전수인 숫자 7과 숫자 12를 사용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및 인류의 역사를 모두 77(7세대씩 11부분)세대로 만들어서 그 근원이신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 것이죠.
이렇게해서 예수님을 새로운 부분, 곧 열두 번째 부분의 첫머리에 둠으로써 예수님에게서 인류역사가 완성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마태복음이 유대의 구원자, 참 왕으로서 예수를 중요시해서,
예수 계보에는 다윗 계보의 왕들의 이름이 이어지는 반면,
누가복음의 계보는 유대인 뿐 아니라 가난한 자, 이방인들의 구원자로써 예수를 중요시하다보니 다윗이외에는 왕의 계보가 없죠.


사실, 마태복음의 예수계보와, 누가복음의 예수계보는 세부적으로 엄청나게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이 다른 점은 신학적 의도에 따라 다른 것이고(사실 세부적 계보를 당시에 알 수 있을 확률은 없죠.),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계보의 내용 중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전통, 아브라함 후손이란 것, 스룹바벨 후손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인 것이 동일한 것은,
그것은 왕이요, 선택된 자의 약속된 자손(갈3장 참조), 제사장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숑숑숑~


1. (가톨릭)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개신교)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2. (가톨릭)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개신교)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3. 개신교가 유독 가톨릭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
    (단, 일부 개신교는 가톨릭에 호의적인 교단도 있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사도신경(Credo)에 대해 짧게 설명하려 합니다.
제가 과거에 사도신경에 대해서 짧은 논문을 적은 적있는데, 그 논문을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1. 사도신경의 역사
  사도신경은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열흘만에 열 두 사도들이 작성한 것이라고 하나,
 오늘날 전승에 동의하는 학자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에게 연원되는 사신을 총괄적으로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도적이다.”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사도신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메시지가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는 것이죠.
 사도신경은 실제로는 일찍부터 현재의 내용과 문장대로는 아니지만 세례문답으로 사용되고 고백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200년경 로마에서 사용한 문답례의 한 실례가
 히폴리투스가 쓴 ‘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에 사도신경의 원시형태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로마신경'(Symbolum Romanum, The Old Roman Creed)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사도신경(Apostles' Creed)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의 글이었으며,
 현재의 사도신경 본문은 3-4세기에 로마에서 사용한 세례신조와 비슷하며,
 그 최종적인 형식은 6세기말 또는 7세기초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확립되었죠.
 이것은 점차 세례신조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것을 범교회적으로,
 범국가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샤르망(Charlemagne, 742-814)대제 때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서방 로마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 진술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모든 신조와 신앙고백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조라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역사에 있어서도 사도신경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데, 
 루터는 1529년 대소요리문답(The Small & Large Catechism)을 작성할 때
사도신경, 주기도, 십계명의 순서로 풀이하였으며,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구조적으로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는데 곧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의 순서를 취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등도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사도신경을 해석함으로서 기독교의 신앙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 사도신경의 이해
 이렇게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개신교 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 및 동방정교회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신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것들을 단순한 성서적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가장 자연스러운 순서인 하나님과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부활과 영생으로 끝맺고 있죠.
 또한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적인 구성으로 되어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즉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그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교회에 대한 고백이 그 뒤를 잇고 있으나,
 오늘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된 3세기 로마공동체의 세례고백은 그것들을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병렬시켰습니다. 
 즉,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근원적으로 신앙고백의 전승에서 삼위일체적인 세 주제가 핵심이며,
 따라서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되는 죄의 용서,
또 기독교의 희망이 성령 하나님의 항목에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모든 시대와 모든 분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와 같으며, 
 이러한 사도신경이 2천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신앙의 모든 것을 바로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도신경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개신교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세상의 모든 교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죠.

  3. 사도신경의 구조(라틴어, 가톨릭와 개신교 번역부분)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 
가톨릭)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개신교)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Et in Jesum Christum, Filium ej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descendit ad iferna; ter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ad coelos; sed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
가톨릭)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개신교)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Credo in Spiritum Sanctum;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remissionem peccatorum; carnis resurrectionem; vitam oeteram. Amen.
가톨릭)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개신교)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1. 가톨릭 사도신경이 정확히 맞는지.. 제가 확신이 없네요. 조금 틀렸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2. 제가 라틴어 본문에 진한 색으로 칠한 부분이 질의 1과 2의 내용부분입니다. 참조해주세요.

 

질의 1. (가톨릭)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개신교)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에 대해
           '저승'이라는 부분이 개신교 사도신경에 빠져있는 것에 대한 답변.

우선, 이 부분은 사실 역사적으로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죠.
그러나 분명히 4세기의 신앙 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고,
이 고백문은 이런 진술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 판넨베르트의 사도신경해설 인용.
즉, 이 당시의 그리스도교는 기독론 논쟁이 중점이었죠(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냐? 인간이냐? 반신이냐? 에 대한..)
우리가 위에서 보듯,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2/3이 예수에 대한 부분인 것을 보면 확실하지요.
질문하신 '장사되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에 대한 부분이 왜 빠져있냐면,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이 부분이 있으나, 공인전 당시 많은 본문에는 이 부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어에는 있으나, 한글에는 없는 이유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가르칠 당시
우리말로 번역된 저승이란 단어자체가 가지는 어감때문에 임의삭제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으로 사실 역사적으로 여러 오해들이 있어왔었죠(삼위일체론적 문제 등).
이 여러가지 이유가 함께 이해되어야 한국 개신교에서 이 부분이 빠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학적으로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 부분은 우주론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즉,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임으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질의 2. (가톨릭)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개신교)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에 대한 부분의 오해문제에 대한 답변.

이 부분은 라틴어로 보면 이해가 쉬울 거 같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칼 바르트는 개신교의 신학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때 참석요청을 받고 공의회를 도운 신학자입니다)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즉, 가톨릭에서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란 부분
 그리고 개신교에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를 믿으며'란 부분이죠.)
우선,sanctam ecclesiam catholicam의 부분은 예수를 머리로 한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뜻합니다.
과거 가톨릭에서 가톨릭만을 추구했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하나님 안의 형제된 모든 교회를 말하죠.
sanctorum communionem; 이 부분은 물론 가톨릭에서는 통공의 교리가 있고,
개신교는 그러한 부분이 우상숭배의 오해가 될 수 있기에 없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즉, 거룩한 공교회 혹은 거룩한 보편된 교회를 설명하는 '성도의 교제'라고 말합니다.
교회란 우리의 눈에 보인 것만 다가 아니죠. 우리 눈에는 과거와 현재의 교회, 가시적 교회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비가시적인 성도의 교제'가 있기 마련이고,
교회공동체란 교회라는 단어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일때 
성서적인 머리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로서 교회일 수 있겠지요. 공동체성 없는 교회는 교회로서 부족함을 말합니다.
이 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이 부분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은  
역사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모두 앞의 구절인 '성령'에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되는 죄의 용서, 또 기독교의 희망이 귀속됨을 이해할 때,
진정으로 교회의 의미와, 성도의 부분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질의 3. 개신교가 유독 가톨릭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
           (단, 일부 개신교는 가톨릭에 호의적인 교단도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은 정말 단호히 말하고 싶습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뿌리이며, 한 형제이며, 머리된 그리스도의 한 지체입니다.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부분과, 교황무오설 같은 부분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즉, 삼위일체되신 절대자에 대한 부분은 같다는 겁니다.
만약 가톨릭을 근거없이 부정한다면, 그것은 개신교를 근거없이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대형교회들과, 몇몇의 개념없는 보수교단과 이단들이 가톨릭을 부정하고 헐띁느냐면,
그건 마치 이 시대에 기득권들이 '반공'만을 외치며 기득권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거라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것입니다.
더이상 신학이 없고, 제대로된 성경해석도 없고,
기복주의만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의지할 것이란 적을 만드는 것 뿐이죠.
이 점에 대해서는 목회자로서 정말 가톨릭의 형제들에게 머리숙여 죄송함을 전합니다.

Posted by 숑숑숑~
우선 몇가지 명제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1. 나는 천국을 간다. 나는 지옥을 간다. 이것을 확실히 규정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요?
2.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를 믿음에 대한 규정은 누가 할 수 있나요?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분법적으로 단순히 이것을 해석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지요.

내가 천국을 가는지, 남이 지옥을 가는지 누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지, 구원을 얻었는지 누가 결정을 한단 말입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꼭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 교만하게 천국간다. 믿음있다.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기 삶에 편의대로 예수를 끌어다가 살지 않는가요?
그것이 믿는다의 범주에 들고, 천국에 가는 티켓처럼 이해된다면 정말 성경과 예수의 성육신과 삶을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천국에 가는지, 내가 구원을 얻었는지를 아시는 분은 단 한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쉽게 남과 자신을 구분하며 천국과 지옥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합니다.
교만한 바리새인과 같은 행동 아닐까요? 성경의 자기편의 잣대로 해석하며 우위를 가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죠. 그만큼 '믿는다'는건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스스로 믿으라고 말씀하시기보다, '나를 따르는 삶'에 초점을 맞추셨지요.
그 삶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웃과 나누는 것, 함께 대화하는 것들이 포함된 예수의 삶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해보신적 있나요?
굳이 신이 왜 사람이 되어서 삶을 사시고 죽었을까..?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이 되지 않고서도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저는 예수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 안믿는 분들에게 이렇게 성경을 설명합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때, 인간에게도 신이 원하는 창조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며 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맘대로 자기식대로 살기 시작했죠.
신이 아무리 의인(노아)을 들어 구원을 해도 그 의인은 범죄할 뿐이고,
평범한 한 사람을 뽑아서 신의 의도를 알려주시고자 수많은 어려운 과정을 가지고
그 자손들로 신의 뜻대로 살길 원했지만, 그 자손들은 계속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이들을 그 사람들에게 보내주어도 사람들은 계속 그 대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했고,
기본적으로 알려준 신의 말씀은 법이 되어 사람과 사람을 구분짓는 도구로만 쓰여지게 되었죠.
역사적으로 구원자라는 메시아의 개념이 싹트자,
신은 그 스스로 인간이 되어..
아주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때 그 목적대로 신 스스로가 삶을 사시고 죽고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가 예수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맹목적으로 믿기보다, 그 삶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고, 예수께서 스스로 외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고, 산상수훈의 말씀이죠.

사실 크리스쳔의 어원도 거기에 있습니다.
박해당시 아무리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을
잔인하게 죽여도 그들은 웃으며 자신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기까지 했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따르는 이상한 사람들을 보며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즉, 예수께서 사신 삶을 따라산 사람들이란 어원이 바로 크리스천이란 단어이죠.
근데 우습게도 역사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에 신경을 쓰기보다,
자기 개인이 천국을 가느냐 마는냐의 도구로 예수를 믿기 시작하니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럼으로 구원이란..
구티에레즈(G. Ghtierrez)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쉽게 말하고 생각하지만,
그들 중에 '구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믿는 것)하면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이러한 명제 안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위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믿는 것)한다는 것이죠.
즉,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으니..
구원이 무엇인가? 혹은 믿는게 무엇인가?가 모호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행 2장)하는 부분에서 구원은 중요치 않습니다.
구원이란 것, 천국이란 것, 영생이란 것은 목적이 아닌 선물일 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중요한가요?
내가 삶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얻는 것이 중요한가요?

어느 것이 중요한가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 영생, 천국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그 기쁨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야 말로 구원아닐까요?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 아닐까요?
태초에 계획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열심히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 기쁨이 아닐까요?

구원은, 천국은, 영생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성령님 앞에 인정되는 것이지
우리의 모호한 '믿음'으로 입장권을 얻는 것같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백했듯(빌)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삶이 구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역사 속으로 오신 이유는..
사랑을 위해서 이지,
종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발 자신들만 구원받는다는 소리, 천국 지옥소리.. 함부러하지맙시다.
스스로 하나님이라도 되는냥 살지 마시고, 겸손하게 삶을 사십시오.
목회자로서 천국지옥 그리고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누가 갈지 누가 못갈지를 정하는 분은 단 한분 밖에 없습니다.

Posted by 숑숑숑~
(질문)

왜 우주의 공간은 지나쳐도 너무지나치게 넓은걸까요?
성경에 보면 생명체는 지구에 밖에 없다라고 하는 비슷한 내용의 구절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종교인들은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부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외계생명체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콘텍트라는 영화의 대사에 '우주에는 약 4천억 개의 크고 작은 별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큰 우주 공간에 생명을 가진, 지능이 있는 존재가 우리뿐이라면
그것은 정말 엄청난 공간 낭비가 되겠지..' 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 대사를 100% 공감하고 있는 저이기에 너무나 궁금합니다.


답변)

우선 시각을 달리 보는게 중요합니다.
질문자께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우주와 외계인'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바로 '우주만물을 창조한 신'에 대해 '그가 창조한 것들에 대해 질문'했다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럼에 있어서, '관(view)'을 달리 해야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즉, 인간적 이해(우주의 공간이 넓은데 과연 왜 넓은 걸까? 뭐라도 있어야되지 않나? 같은 의문)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인간적 이해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철학적인 말이라 많이 어려울거 같습니다만.. 절대자에 대해 궁금할때 절대자를 내가 다 이해한다면, 절대자는 절대자가 아니게 되지요.
다시말한다면, 피조물로서 절대자를 이해할때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두고,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어릴적에 뭔가 가지고 싶어할때, 부모님이 허락안해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부모딤의 뜻이 있듯,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우리이해로는 다른 뭔가 있어야된다는 것으로 논리적 이해를 하는 것은..
절대자에 대해 우리스스로 판단하고 결정내려놓고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절대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 인간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빈공간empty'두는 관(view)이 필요하죠.
즉, '왜 우주의 공간은 지나쳐도 너무지나치게 넓은걸까요?' 라는 질문은..
인간이 보기에 인간적 이해로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뭔가 있어야 된다는 결론을 짓고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넓은 우주에 꼭 무언가 있어야 하는가? 라는 반문도 가능합니다.
물론, 호킹같은 경우는 인간적이해의 범주로 과학적인 논리를 가지고 확률적으로 외계인이 있다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만,,
우선 이 질문을 인간이 인간끼리 한 것이 아닌, 절대자의 범주에서 '왜 절대자가 그리했을까?'라고 묻는 것이라면,
절대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 인간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빈공간empty'두는 관(view)이 필요하죠.
그리고 나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될 듯 합니다.

흠. 성경에 보면.. 생명체는 지구에 밖에 없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와 다르게 요3:16에서 세상이 우주(코스모스)로 표현되어 있음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봤을때, 신론적인 부분이 과거 상당히 왜곡되어 있음을 봅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의 내용이 이 지구 안에서만 이뤄진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도 인류가 모든 자연을 맘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 마구 자연을 파괴한 부분은 잘못으로 지적되어야 하지요.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고 하면서, 지구의 신으로 한정시켜버리는 오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죠.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외계인이 유무는 중요치 않습니다.
콘텍트란 영화를 저도 보았지만, 말 그대로 그 대사는..
인간이 넓은 우주 공간에 대해 이해할 수 없기에 벌어지는 인간적 이해라고 할 수 있죠.
창조한 유일한 신 즉, 하나님이 있다고 했을때,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콩나라 팥나라 하는것밖에 되지 않지요.
그럼으로 외계인의 유무에 따른 긍부정이나, 우주공간의 공간낭비는 그리스도교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것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2번의 질문은.. 인간이 있네 마네, 그럴것이네 아니네 할 수 없는..
'신의 범주' 속한 것이며, 그 궁금증이 그리스도교에 중요점과 다르기에 정확히 대답을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Posted by 숑숑숑~

질문)

십자가(†)에 대해서 의문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돌아가셨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십자가(†)를 들고 전도활동을 하거나 집안에 걸어두거나 장신구를 하는걸로 아는데
왜 예수님을 죽게 만든 도구인 십자가(†)를 향해 기도를 하고, 숭배를 하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예수상에 기도나 숭배행위에 대해서는 상관없지만 그 도구에 대해 숭배를 하는건 이해가 안갑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구하려고 어떤남자가
쏜 총이나 칼 또는 다른 도구들에 대신 희생을 당했다면 그 아이의 가족들은
그 도구를 볼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저라도 그 도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겁니다.
이 상황에 십자가를 대입해보면 왜 십자가에 기도, 숭배를 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답변)

성경적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4)"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십자가 관련 설명을 할까 합니다.
물론 말리지만님의 글에 여러분들이 다각도로 십자가에 대해 설명을 하셨으니, 그런 것들을 참조하시고 제 글을 보면 더 좋겠죠?
우선 말리지만님께서 의문가지시는 부분을 당시에도 사람들이 의문스러워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 또는 '신의 사람'이라고 인식시킬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표적 혹은 기적'이었죠.
또한 헬라인들이 '신'또는 '신의 사람'으로 인식하시킬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으로서는 깨닫기 어려운 '지혜"였습니다.
반대로 '십자가형'은 유대인들에게는 로마의 형벌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거리끼는 것이었죠.
특히나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자신들을 로마로 부터 해방시킬 '메시아'였으니 더욱더 십자가형이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에게 '십자가형'은 가장 무식하고 천한 사람들이 당하는 형벌로 이해되었었죠.
지혜를 꿈같이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형은.. 지혜롭지 못한 처신의 결과 중 가장 불행한 결과였으니깐요.
이렇게 보았을때, 말리지마님처럼.. 십자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이해범주에서 '이해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음'이란 것을 주심으로 '이해되게 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24절과 같은 내용을 바울이 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지않는 이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증표와 같았지요.
다시말해, 일반인들에게는 말리지마님처럼 죽게 만든 도구일 뿐이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그 죽게 만든 도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도구'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십자가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예수를 온전히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도구 혹은 표시이지, 그것을 절대 숭배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우상숭배겠죠.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게 기도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옥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  (2) 2010.10.13
우주 공간과 외계인에 대해  (0) 2010.10.08
십자가에 대한 의문점  (0) 2010.10.07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0) 2010.10.02
주일에 대해.  (0) 2010.09.14
헌금에 대해.  (0) 2010.09.09
Posted by 숑숑숑~
TAG 십자가

왜 굳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을까?
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굳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걸까?
이런 부분이 궁금하죠..?

창세기부터 성경을 쉽게 풀어가면 설명드릴까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풍성하게 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자의 뜻보다, 자신의 뜻대로 하길 원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원대로 사는 인간들은 계속 '자기 뜻 즉, 이기적 소욕'때문에 세상은 점점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어긋나기 시작했죠.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의인의 가족(노아)만을 구원하시지만, 이들 또한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당대 '의인'이라는 호칭과 상관없는 '아브라함'이란 보통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를 이끌어가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자손들을 통해서 세상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해석 가능해집니다.
1.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 만방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심(구약의 전역사를 통해 알 수 있죠).
2.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를 통해 세상 만방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심(갈라디아서 2-3장 참조하세요).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 여러 사람들..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들, 때로는 모세 엘리야 같은 선지자들,
     또는 다윗과 요시아같은 왕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시거나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준 것들이
도리어 사람을 판단하고 억누르게 되는 율법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 넘쳐나고(미가서 6장처럼)..
다시말해, 하나님의 창조계획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셨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죠.

이 문제는 바로 신론적인 문제인데요. 이런거랍니다. 철학의 근본 생성원리와도 비슷한데..
신이라는 절대자를 절대 피조물은 이해할 수 없다. 신을 피조물 스스로 이해하면 신은 신일 수 없다.
쉽게 말해.. 구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나주신 이들(앞서말한 선지자, 왕, 아버지들)이 외에는 절대자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단 거죠.
하나님을 만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나 특정부류에게 전하지만..
사실 말이란 것이 전해질때마다 오해가 생기거나, 단어적 의미적 이해가 달라져서..
점점 '하나님의 뜻'보단, '방법적인 룰'을 답습하게 되면서 그 안의 의미들(사랑 등)이 사라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 역사 한 중간으로 오신 거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가장 처음 인간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신 것이죠.
이것이 기독론이자, 구원론입니다.
요즘은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는 걸 봅니다.
명제는 맞아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린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고, 부활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 더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지금 삐릴릴리님께서 질문하신 것과 같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다면 오신 이유가 뭘까?'란 것이죠.
단지 죽음과 부활만 중요했다면, 예수께서 살아가실 필요도 누추한 곳에 태어나실 필요도 없지요.
물론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문제가 있지만 이게 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마가, 마태, 누가)에서 자신을 '믿으라'하신적이 없습니다.
다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원하신 것이죠.
이것은 앞서 제가 말한 것처럼 창조때의 원래의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이란 것이 단순히 '믿는다'의 의미보다, '예수를 따르는 삶'에 있음이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
명제들은 다 옳고, 맞지만.. 과연 '믿는다'라는 기준이 뭘까요?
구원이란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게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삶'이지요. '예수를 따르는 삶'만이 진정 믿음으로 나오는 삶이겠지요?
그렇기에 바울은 빌립보서(3-4장)를 통해서 푯대를 달려간다. 이미 얻었다 함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문제가 하나더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돌아다녀도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이해한 이가 없어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죠.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오자 그때서야 그들이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세요.
두려워서 예수님이 승천하고도 마가다락방에서 두려워서 보혜사성령님을 간구하던 그들이..
성령이 임하시자, 변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앞에 설교하면서 이제서야 성령을 통해 깨닳은 것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랬을때,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고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제가 뭘 말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도 사람들은 그의 삶을 이해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욕에 너무 젖어있고 그것을 벗어나서 살수없는 이들이기 때문에(갈5:16-25),
예수의 삶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들 마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고 나서야..
이들이 꺼꾸러 예수님의 승천을 이해하게 되었고, 부활이 이해가 되었고,
무엇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가 이해가 되었고,
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아픈이들을 고쳐주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했는지 이해가 되었고,
왜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는지 알게 되었고,
왜 유추한 마굿간의 말 구유에 태어나시게 되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으면,
구약의 모든 메시아적 문헌들이 있는 이유와 하나님의 창조계획도 이해하게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성령론적 부분이지요.

 

Posted by 숑숑숑~
왜 주일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릴까? 그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겁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신학적인 입장 함께 이해되어야 되니.. 여러 입장들을 읽어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입장만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첫번째, 안식일에 대해.
유대인들의 하루 시작은 해질때부터 그 다음날 해질때까지 입니다. 우리하곤 조금 다르죠.
그래서 금요일 해질녁부터 토요일 해질녁이 안식일이었지요.
여기서 안식일의 개념 즉, 모든 창조를 마치고 7일째 되시던 날 '쉬셨다'는 개념이 주일에 적용되었지
무슨요일이냐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걸 아시길 바랍니다.

두번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시점.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전 9시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에 돌아가시죠.
그리고 안식일 후 첫날 해돋을때 즉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왜 안식일 후 첫날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는지 알수있죠.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미는 바로 '날짜'와, '예수의 부활의 의미'가 되겠지요?

세번째, 로마황제 콘스탄틴이 지정한 날.
공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콘스탄틴은 기존의 가장 큰 날. 즉 태양신을 숭배했던 날이
마침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던 일요일이라 그 날을 그리스도교 예배날로 지정하죠.
만약 태양신 숭배하는 날이 목요일이었다면, 주일이 목요일이 될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것은 태양신이 아니라,
일요일 즉 예수님 부활을 기념하여 예배드리는 날을 콘스탄틴이 '국가적으로 제정'한 것이 되지요.

주일의 개념은 이 세가지를 함께 이해하셔야 이해가 될 겁니다.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에 대한 의문점  (0) 2010.10.07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0) 2010.10.02
주일에 대해.  (0) 2010.09.14
헌금에 대해.  (0) 2010.09.09
외계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요?  (0) 2010.09.06
개신교와 가톨릭  (0) 2010.03.22
Posted by 숑숑숑~

구약에 부분에서 성전의 운용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제사장)들에 대해
나머지 지파들이 십일조와 각종 제사 재물로 그 운용을 했었지요.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교회공동체로 바뀌어집니다.
덧글들을 보니 구약이 끝났고, 예수님이 오셨는데 무슨 십일조냐? 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십일조' '감사' 등등의 헌금 이름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실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도 헌금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기초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성립 자체부터.. 였고,
이후 사도행전 4장 말미부터 6장까지에도 그 모습이 나오며,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것이 나옵니다.

요점은 바로 이겁니다.
교회 '공동체성'
헌금을 하는 이유는 교회가 잘 살자. 배부르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가족들을 돌보고, 그 가족들이 모이는 곳을 정비하고, 이웃들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교회가 성립할 당시 처음 하던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었고,
예수를 믿는 이(전과 같이 자신만의 삶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삶을 시작한 이들)들 젤 먼저한 것이 이것이죠.

그리고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도..
'공동체성'이 아닌 '개인' 소욕에 따름으로 해석해야 되죠. 성령을 훼방 -> 예수를 따르지 않은 -> 공동체성상실.
교회란 철저히 머리된 예수를 따르는 지체들의 공간이요 모임자체요 공동체성입니다.
개개인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의식, 함께 돕고 함께 나눈다는 의식이 가장 중요하기에 헌금을 하는 것이죠.
성찬의 의미도 그런 데에 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럼에 있어서.. 헌금은 교회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공동체를 위해 해야할 의무가 되겠지요.
하지만 마음과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하되 개인의 소욕을 우선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한국개신교 내의 헌금에 대한 문제는 두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가 헌금의 운용을 성경적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
둘째, 성도들이 헌금에 대한 인식과 성경적 지식 그리고 신학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목회자들이 헌금을 강요하기보다, 교회 공동체 내의 각 개인 참여와 의무를 교육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들고,
그렇게 모여진 헌금들이 과도한 부동산이나 교회건축이 아닌, 공동체 내의 나눔과 돌봄 그리고 이웃에게 돌아갔음 하는 마음입니다.

예외적인 이야기지만.. 올해 제가 맡고 있는 유치부-청년부까지.. 헌금에 대해 알려주려고..
장농속에 굴러다니는 동전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용돈중 거스름돈들을 모으락 했었습니다.
4주 동안 모은 돈 20여만원. 작다면 작은 돈, 크다면 너무나 큰 돈.
이것으로 '세이브더칠드런'내에 있는
국내어린이도시락돕기 4건, 아프리카친구들 양 한마리,
2명이 학교다닐 수 있는 공산품, 신발, 그리고 신생아보호키트 등을 전달했습니다.
지금 세대가 부패하더라도,
다음세대들에게는 세상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 헌금이고 공동체를 살리는 것임을 알려줘야 됩니다.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에 대한 의문점  (0) 2010.10.07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0) 2010.10.02
주일에 대해.  (0) 2010.09.14
헌금에 대해.  (0) 2010.09.09
외계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요?  (0) 2010.09.06
개신교와 가톨릭  (0) 2010.03.22
Posted by 숑숑숑~

제가 가르치는 녀석들도 이런 질문을 많이 한적 있습니다.
그때마다 어떻게 답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한참 고민한적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답변은 공식적인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아닙니다.
왜냐면 외계인 자체에 대해 아직 확신을 가질 증거가 없기 때문이고, 아직은 가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학자들 간에는 이 관련 논의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요.
그 관련해서 요점들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아무튼 현재의 신학자들의 논의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1. 외계인이 있을 과학적 추론은 있지만, 그것에 대한 명백한 근거는 아직 없다.
2. 하나님은 지구의 하나님이 아닌,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3.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저작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은 절대자에 대한 피조물의 기록임으로
절대자(하나님)의 범주로 이해하지 않고, 피조물(인간)의 범주로 해석하고 국한시키는 것은
과학의 잣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만큼 어리석은 짓이다.

이렇게 봤을때, 외계인의 존재가 아직은 확실하지않은 상태에서
외계인의 유무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인간)기준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되겠죠.
우주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지평을 크게 가진다면, 외계인 그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범주를 인간의 인식차원을 끌어내린 우리자신의 좁은 관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수 있다는 것이죠.

한 예로, 생명에 대한 이해가 적었을 과거당시
성경적으로 인간은 모든 생물을 다스린다는 문자적 해석으로 수많은 자연파괴들이 서슴지 않고 벌어졌었죠.
하지만 요한복음의 세상을 사랑하사 오신 예수(요3:16절이하)를 재해석함으로서
광범위한 생명살리기 운동이 신학적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란 인류의 발전을 말하죠.
또한 역사란 하나님 앞에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발전도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신학의 잣대가 되면 안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인식발전에 도움이 되는 역사의 산물(잣대가 아닌 도구)로 이해된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교만에서 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에 대한 의문점  (0) 2010.10.07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0) 2010.10.02
주일에 대해.  (0) 2010.09.14
헌금에 대해.  (0) 2010.09.09
외계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요?  (0) 2010.09.06
개신교와 가톨릭  (0) 2010.03.22
Posted by 숑숑숑~
'정통개신교의 입장'의 틀부터 말씀드릴께요.
이 교회에서 이렇게, 저 교회에서 저렇게, 혹 아무이야기도 듣지 못해서 혼자 성경보고 말하는 분들과는 다른,
'정통개신교의 입장'은..
약 2000년전 교회 성립 이후 정통 가톨릭의 입장에서
종교개혁 이후 칼빈과 루터 그리고 신정통주의 바르트에 이르는 정통 개신교의 입장을 말합니다.
덧붙혀 제2차 바티칸회의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만나 개신교가 주장하고,
그리고 가톨릭이 동의하거나 이해한 입장을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회의 이후 현재 가톨릭은 개신교를,
정통개신교는 가톨릭을 '주 안에서 형제'로 존중하며 협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신교 교회에서 가톨릭을 이단이다.
혹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신학적 교육이 없다란 생각을 합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계 지도자들이 지들마음대로 편을 가르고 그것을 양적 성장에 빗대어 신학적 인식없이 까대는 것
그것이 더 비성경적이며 우상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의 뿌리가 가톨릭이며, 교리적 기준에 대한 우선성의 차이가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함께 창조질서의 생명을 가꾸어나가야할 동력자 입니다.
모두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입니다.

교리적 기준에 대한 우선성의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냐?
간단히 말하자면,
가톨릭은 교회론을, 개신교는 기독론을 중시함에서 나타납니다.

즉. 가톨릭은 교황으로부터 사제 그리고 신도에 이르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우선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동체의 우선성은 옛적 베드로, 바울에 이르는 사도적 계승성.. 바로 교황의 우선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황으로 부터 이어지는 직제의 중요성이 완고한 편이지요.
다시 말한다면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질서를 중요시 합니다.
예수 이후 사역의 중심은 거대한 교회가, 결정권은 교황이 갖기 때문에
밑에 글에서 나오는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교회적 입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리아(밑에 마리아 관련부분은 밑에서 따로 다룰께요)에 관한 입장들이 교황에 의해 결정되지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직제는 이단이나 여러 성경의 자의적인 해석들을 해결할 수 있지요.
하지만, 교회라는 단체의 우선성과 교황의 우선성은 때론 정치적이 될 수 있어서 여러문제들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성서라는 절대적 권위를 두고, 역사적으로 교황의 임의로 결정한 것들이 많았지요.
교회사적으로 볼때, 3세기 전까지는 베드로의 수장직(교황우선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4세기 이후 국가교회가 되면서 전권을 잡기위한 수단으로서 생기게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가톨릭의 교회론은
개신교의 최대 약점인 '교회의 일체성'를 가지고 있지요.

그에 반해 개신교는 기독론을 중시합니다.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사회는 교황으로 부터 이어지는 직제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사제들만 볼 수 있게 되어버리고, 정치적으로 교황이 권력을 잡고 있었음으로
성경의 해석에 따라 국민들은 권력의 시종이 되었지요.
그래서 면제부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톨릭의 교회론은 교회의 일체는 가져오지만, 부패하면 개혁을 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할때 외쳤던 것이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사제가 아닌 그 누구도 예수께서 주신 말씀을 읽을 권한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으로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그당시 인쇄술의 발전으로 누구에게나 성경을 보급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성경의 보급은 당시 가톨릭의 부패를 바로 알게 되는 사건이 됩니다.
누구나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읽음으로서 당시 정치적 부패와 기득권 위치의 교회의 잘못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루터나 칼빈은 종교 즉, 가톨릭을 개혁하길 원했지,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따로 나오는 것을 끝까지 부정했습니다.
그때 가톨릭이 루터나 칼빈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을 출교시킴으로서 어쩔 수 없이 분리가 된 것이지요.
이후 제2차 바티칸회의에서 이러한 것들이 회복되었지요.
가톨릭 스스로 그때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상호간의 이해를 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국제적 상황따윈 상관없이 지들 교회만 불리는 것에 눈을 돌리다보니
가톨릭은 이단이다 뭐다 하며 스스로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버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그렇게 하진 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톨릭과의 교류를 많이 했었죠.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도 존경하는 문익환 목사님의 경우는
성서 번역본 중 '공동번역(가톨릭과 개신교 같이쓰는 성경)'에 시편을 번역하시기도 했지요
이야기가 너무 울타리를 넘어 가네요.
다시 돌아와서 개신교는 위에서 제가 언급한 역사적 배경안에서
교황이라는 직제에서 오는 가르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가 성경을 읽음으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것을 우선하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옳은 것이지만 많은 위험성들이 내포되어 있지요.
지금 대한민국의 개신교 문제가 바로 이런 위험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의 부재로 인해 맘대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걸 설교하기때문에
기복적 신앙이 형성이 되었지요. 정치적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지요. 문제입니다.
해결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정통적인 신학의 입장을 꾸준히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분명한 정통 신학의 입장이 있는 데,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런 것을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신학은 학교에만 있고 교회에는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과거 종교개혁당시의 부패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요..
'신'에 대해, 절대자에 대해.. 피조물이 어찌 자의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수천년을 이어온 보완되어온 신학의 입장을 평생 공부하며 가르치는 것이 개신교의 해결책이지요.

근래에 들어 가톨릭과 개신교는 수많은 대화를 합니다.
특히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큉의 경우는
가톨릭의 직제성에 대해 강한 부정을 함으로 교황으로 부터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지요.
어느 한쪽이 옳다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율성과, 교회를 지키고자하는 공동체성이 함께 되어야 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자, 이렇게 정통개신교의 입장(개차반같은 일개목사의 말이 아닌 신학적 정통성)으로서
밑에 글에서 언급된 문제들을 하나하나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첫째, '천주교는 성모마리아 믿잖아 예수님을 믿어야지 왜 성모마리아를 믿어?'의 문제.
우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은 성모마리아를 믿지 않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마리아는 신이냐 인간이냐의 문제가 대두된적 있지요.
하나님인 예수를 낳았으니 사람일 수 있느냐? 인데.. 성경에는 마리아는 보통 사람으로서 성령을 통해 예수를 낳았죠.
그런데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의 차이가 생깁니다. 가톨릭은 직제를 중요시 한다고 제가 위에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자라던지, 교황을 존경하도록 가르치죠. 거기에 마리아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는 것보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그 기도를 부탁함을 전하는 것이죠.
즉, 가톨릭은 교회 전통에서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을 보여줌으로서 그런 삶을 살도록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인물에 대해 존경을 넘어선 맹목적 신앙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교리를 분명히 이해못하는 신도들이 마리아를 믿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십자가문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가톨릭 십자가에는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있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 가톨릭은 십자가를 봄으로서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우리 삶을 겸손히 살라고 가르치고,
개신교는 예수의 삶은 고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빈 십자가'
즉,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난 넘어 부활한 하나님인 예수를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에 예수가 없는 것이지요.
가톨릭의 입장, 개신교의 입장 둘다 틀린 것이 없지요.
다만, 교회 내의 성도들의 삶을 우선시 하느냐?(교회에 대해 겸손한 성도를 바라느냐)
아니면 교회 안에서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같음 즉, 하나님이신 예수가 중요함을 우선시 하느냐? 에 다름이 있을 뿐이지요.
개신교 목회자로서 안타까운 것은 만인은 예수 안에서 평등의 개신교 의의를 목회자들이 이용하는게 문제이죠.
이렇게 마리아에 대해 가톨릭은 존경을 넘어설 여지가 있는게 문제이고
마리아에 대해 개신교는 일개 사람이란 이유로 마리아의 그 힘든 삶조차 무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천주교는 성모마리아 믿잖아 예수님을 믿어야지 왜 성모마리아를 믿어?'의 문제는
신학의 부재로 생긴 말도 안되는 억측이요, 한쪽만 맞다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모순입니다.

둘째, 삼위일체의 문제.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언급이 참 어렵습니다. 단어하나에 이단이 되거든요.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가장많은 이단이 여기서 부터 나오지요.
니케아회의(AD351)전까지 예수가 신이나 사람이냐에 따른 논쟁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겨우 니케아-칼케돈회의까지 하나님과 예수에 관한 부분은 정립이 되었으나 성령에 관한 부분은 거의 미미했죠.
현대에 와서는 카톨릭은 성령에 대해 미흡하고, 개신교는 너무 성령성령하다보니 무슨 무속신앙과 비슷하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은 동일하나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The Nicene Creed (325 A.D.)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begotten from the Father, only-begotten, that is, from the substance of the Father, God for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into being, things in heaven and things on earth, Who because of us men and because of our salvation came down and because incarnate, becoming man, suffered and rose again on the third day, ascended to the heavens, and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in the Holy Spirit.
But as for those who say, There was when He was not, and, Before being born He was not, and that He came into existence out of nothing, or who assert that the Son of God is of a different hypostasis of substance, or is created, or is subject to alteration or change-these the Catholic Church anathematizes.
일부러 영어로 올립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번역단어로 이단이 될수 있어서 ㅎ
제가 기독론에 관해 아이들에게 가르친 자료를 올릴테니 이 부분이 궁금하시면 파일 참조하세요^^

셋째, 안식일.
옛적부터 히브리사람(이스라엘)들은 안식일에는 모든일을 하지않고 쉬었지요.
그래서 자신의 나라가 함락되기도 했었죠^^;
안식일에 대한 개념은 크게 두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섯 첫째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쉬셨다는 의미로 피조물이 우리가 하나님께 창조세계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죠.
이부분은 예배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둘째는 그 당시나 지금에도 노동이 착취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기득권이나 경제논리에 의해서 쉴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안식일을 쉬라고 말한 이유는 노동을 착취당하는 이들에게도 쉼을 주는 것이죠.
가장 약한자와 가난한자를 돌보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교회다니는 사장이 자신의 직원들에게 쉼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은 예배열심히 드리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이해하는 것이죠.
이런 두 가지 의미로 안식을 하는 날을 지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시작과 끝나는 시간은 어찌 될까요?
현대는 자정으로 시작되서 그다음 자정까지 시간을 하루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사람들은 해가 지는 날로부터 그다음날 해지기까지가 하루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식일은 금요일저녁부터 토요일저녁까지가 되어버리지요.
이후 콘스탄틴 대제(284?-337)가 일요일에 공적 휴식의 날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죠.
중요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태양신의 날을 차용해서 일요일을 주일로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개종이후 그는 위에서 제가 말한 안식일의 의미를 알고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와의 타협이 아니라 그 문화권에서 합리적으로 사람들을 쉬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죠.

'신학단상 > 신학적 궁금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에 대한 의문점  (0) 2010.10.07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0) 2010.10.02
주일에 대해.  (0) 2010.09.14
헌금에 대해.  (0) 2010.09.09
외계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요?  (0) 2010.09.06
개신교와 가톨릭  (0) 2010.03.22
Posted by 숑숑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