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
흔히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부패와 문제) 때문에 이 말을 많이들 합니다만, 사실 정교분리란 정치와 교회의 유착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정치적이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되지요. 교회란 그런 인간의 공동체.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이것 역시도 사회 안에 있기에 정치적이지 않게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정교분리'란 단어가 언제부터 쓰여졌는지 안다면, 정교분리란 말을 쓰는데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것입니다.
일제 침략기 1890-1910년 사이 한국교회는 '한 손에는 성경책을, 그리고 또 한손에는 태극기를!'이란 말을 할 정도로, 또 '삼천리 금수강산 3000교회만 있다면 독립이 될것이다'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교회의 사회참여는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압력에 의해 선교에 차질이 있을 것이라는 선교사들의 우려와, 총독부의 회유의 결과로 총독부가 주장한 '정교분리'가 교회내 정책적으로 채택되게 된 것이죠(그대들은 선교만 하시오, 우리는 나라를 돌보겠소)
이후 한국교회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회의 관심에 눈과 귀를 닫고, 내세적 지향을 가지며 개인의 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지요. 한 예로 춘원 이광수의 발언들을 보면 1910년 이전에는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조국의 희망으로 보지만, 이후로는 한국교회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사라져야 된다고 까지 합지요(물론 이광수 역시 시대적으로 많은 얼굴을 가진 이이긴 합니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현실과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개인의 복과 안위를 생각하며, 삶의 복잡함을 단순한 이분법적 이해를 가지며 적 설정을 하거나 영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게 되지요. 거기다 앞서도 말했듯, 현재 '정교분리'를 말하며 정치와 종교의 야합을 반대하는데, 그러한 야합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바로 '정교분리'에서 시작된겁니다. 사회를 보는 눈은 없고, 개인의 복과 교회의 덩치를 생각하게 되면서 기득권화 되어가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정치 기득권과 함께 유착하게 된거죠. 정말 사회적 인식 즉, 정교를 분리하지 않고 통전적으로 바라봤다면, 이런 현실의 문제까지도 생기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교분리되지 않고 정치적 입장을 교회는 어떻게 취해야 할것인가?'는 고민이 생기게 되죠. 답은 쉽습니다. 예수를 보세요. 쓸데없는 종북이니, 빨갱이니, 좌파니 이런거 말하면서 사탄이니 영적 전쟁이니 그런 모호한 융합하지 마시고 예수의 가치을 바라보세요. 예수가 큰 교회에서 편하게 그 삶을 사셨던가요? 아니면 가장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아니, 아예 그들'이' 되었던가요?
예수는 예수의 가치를 묻던 율법교사의 말을 옳다 말했고(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으스대며 율법교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 예수께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가장 첫 질문인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이 도와야할 대상(이웃)'을 물었지요. 그런 예수는 도리어 묻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고 말이죠.
우린 이 현실 속에 삽니다. 이 사회 속에서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면 분리가 아닌, 하나의 인간 그것도 예수의 가치를 발언하며 행하고 살아가는 인간이어야 되지 않을까요? 한국교회가 진정 개혁이 되려면, 꿈에서 벗어날 생각부터 해야될 겁니다. 그리고 구분과 분리가 아닌, 하나의 같은 인간이란 인식(죄인이라 생각하고, 의인처럼 행하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정교분리' 그 말은, 더이상 이 땅에서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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