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성탄절

 

 

1- 교회 믿음방.

해설 : 대림절 기간, 교회 믿음방.

성탄절을 준비하며 중고등부 회장인 건후는 마음이 불편하다.

성탄절성극을 준비해야하기 때문이다.

 

(해설이 끝나고, 아이들이 자리를 잡으면 조명을 켠다.)

 

건후 : 왜 목사님은 나보고 성극대본을 준비하라고 하시는 거지?

친구 1 : 그거야 니가 학생부 부회장이니까 그렇지.

건후 : 성극대본을 찾아보는건.. 쉬워..

조금만 찾아보면 대본이야 구할 수도,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으니깐 말야.

근데 그것보다 걱정인건 목사님 말씀 때문에 그래.

친구 2 : 어떤 말씀?

건후 : 목사님은 성탄절이 단순히 예수님 생일이라서 축하하고 즐거워하기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오신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알아야한다고 말씀하셔서 말이지.

친구 1 : 맞아 그런 말씀하셨지. 그리고보면 성탄절이 조금 뜬금없긴 해

친구 2 : 뭐가?

친구 1 : 잘 생각해봐.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인데, 산타가 요란스럽지.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보다 가족과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과 놀기 바쁘지.

아이들은 트리장식하는 것에 또, 선물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우습잖아.

건후 : 그래. 교회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별반 다를게 없이

이브만 되면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눈 오는거 좋아하고 그렇지.

내가 예수님이라도 싫을거 같아. 예수님의 날에 예수님은 없으니까.

.. 걱정이다. 정말. 진짜 성극 제대로 만들고 싶은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너무 힘들거 같아 ..

친구 2 : 그래도 한번 찾아보자. 내가 인터넷으로 한번 검색해볼게.

괜찮은게 있는지 우선은 찾아보기라도 하자구!

~ 이거 괜찮을거 같은데?

친구 1 : 어떤 내용인데?

그냥 시시하게 요셉나오고 마리아나오고

삼장법사 아니, 동방박사 나오는거라면 너무 식상하고 뻔하잖아.

친구 2 : 아니라니깐!! 제목부터 달라.

건후 : 뭔데 뭔데?

친구 2 : 이름하야 빈방있습니까?’ 어때? Feel~이 오지않냐?

친구 1 : 내용이 궁금해지는데..?

친구 2 : .. 유명한 연극이래.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걸 한국식으로 극화한건데..

내용은 이래. 성탄절 성극을 준비하던 어느 교회 고등부이야기야.

. 늘 매번하는 내용인 예수님 탄생에 관한 성극을 준비했는데,

성극을 맡은 선생님이 아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좀 모자란 덕구에게 조연급인 여관주인역을 맡겼지.

건후 : 그래서?

친구 2 : 결국 성탄절 성극이 시작됐지. 많은 분들이 조용히 그 성극을 보고 있었지.

순조롭게 성극은 진행됐어.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태어날 아기 예수를 위해 베들레헴의 집을 찾아다니는 장면에서

여관주인 역을 맡은 덕구가 결국 사고를 쳤어.

친구 1 : 뭐 예상은 했었지만 어떤 사고?

친구 2 : 사실 너희도 알다시피 성경에서는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을 구하지 못해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잖아.

이 성극에서 요셉은 여관주인에게 방이 있냐고 물었어.

그러면 여관주인은 빈 방이 없다, 마구간에라도 갈거냐고 묻지.

그런데 덕구란 녀석이 말이지..

건후 : . 덕구가 어떻게 했는데?

친구 2 : 덕구가 차마 자신을 찾아온 요셉과 마리아에게,

그리고 태어나실 예수님께 빈 방이 없습니다란 말을 못한거야.

친구 1 : 그럼 뭐라 말했는데?

친구 2 : 덕구는 그 대신에

"가지 마세요. 우리 집에 방이 있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마구간에 가지 마세요"

라고 외치면서 그만 울게 되지. 그리곤 관객들은 웃게 되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렸어.

그렇게 연극은 끝나. 해설자는 이렇게 마지막에 말하지.

덕구가 실수는 했지만, 이 연극은 가장 아름다운 연극이었다라고..

친구 1 : .. 내용이 괜찮은거 같은데?

친구 2 : 그치?

건후 : 근데 뭐랄까.. 내용은 좋은데..

덕구의 순수함과 연극의 메세지는 알겠고 좋은데.. 그게 와닿지가 않아. 동떨어진거 같아.

그 뭐랄까 설명이 어려운데..

예수님은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 없으신 하나님이잖아.

말씀만으로도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우릴 너무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시고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길.. 그 고난의 길을 가신거잖아.

, 주님의 그 은혜, 그 구원의 사랑이 엄청나게 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자체도 귀한거지.

내용상으로는 덕구는 우리에게 구원이자 은혜이신 예수님의 그 귀한 탄생을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것인가를 표현해서 보여준거라 생각해..

그런데 문제는 덕구가 좀 모자란 아이란거야. 일반적이지 않지.

관객들에게 덕구는 동질감으로 다가가기보단 동떨어진 느낌이야.

마치 관객에게 이질적인 덕구의 행동이 예수님의 귀한 탄생을 가리는 느낌이야.

좀 모자라서 실수한게 아니라 좀 더 우리 모두에게 와닿는 감사의 내용이었으면 해서 말이지.

친구 1 : . 듣고보니 좀 그런거 같기도 해. 근데 이걸 어떻게 그렇게 바꾸냐?

우리가 전문작가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만해도 괜찮을거 같은데?

친구 2 : 그래. 그냥 쉽게 가자. 맘은 알겠는데.. 쉽지 않잖아? ?

건후 : .. 그래. 근데 그래도 맘에 걸려. 목사님 말씀도 그렇고..

왠지 마음이 불편해.. 니 말처럼 성탄절 성극이란게 매년하는거니 그냥 쉽게 하면 되는데..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이 성극을 보는 이들 마음에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와 닿게 해서

그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 오신 주님의 탄생을 모두가 진정으로 감사하면 얼마나 좋을까?

 

(암전)

 

2- 대제사장의 집

해설 : 고민이 많았던걸까? 건후는 꿈을 꾼다.

꿈에서 건후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밤 그 장소에 가게 된다.

 

(해설이 끝나면 불을 켠다.)

 

(불 가에 사람들 몇몇이 있고, 예수는 등을 돌린채 다른이들에게 붙잡혀있다)

건후 : . 여긴 어디지? 이 사람들은 누구고? 저기 저 사람은 누군거야?

( 왼쪽에서 여자가 등장하며 건후를 바라본다)

여자 : 이 사람, 저기 저 사람과 같이 있던 놈이잖아.

( 불 가의 사람들 중 몇몇만 돌아보고, 나머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건후 : ? 에이 왜그래요? 사람 이상하게 몰고가지 말아요.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남자 1 : 이거 겁도 없네. 이놈, 저 이단자 옆에 항상 같이 있던 놈이잖아.

건후 : 난 저 사람을 몰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 왠지 익숙한 장면인데.. 그리고 저 사람은 왠지 낯익고 말야.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남자 2 : 뭐야? 이놈, 저 예수와 같이 있던 놈이잖아.

그것도 늘 옆에 있던 베.. 뭐시기 아냐?

( 불 가에 모여있던 이들이 모두 노려보며 잡으려 일어선다.)

건후 : ? 저 분이 예수라고요? 뭐야. 이건. 그럼 난 베드로란 말이야?

. 아니예요. 나 이건후라고요. 베드로 아니라고요.

(그 순간 예수는 등을 돌리며 건후를 바라본다)

 

(예수가 등을 돌려 건후를 바라보면 3초 후 암전한다.)

 

3- 십자가의 길

 

건후 : 여긴 또 어디야?

(앞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저기 여기 어디고 왜 이렇게 모여있는건가요?

사람 1 : 좀 모자란 사람아냐? 여기가 어디냐니? 예루살렘이지.

사람 2 : 선지자라고 했던 사람. 아픈 사람들 많이 고쳐주고, 심지어 죽은 이도 살린 사람이

오늘 십자가형을 당한다고 해서 나와봤지. 저기 오네. 불쌍한 사람.

( 십자가 진 예수와 그에게 채찍질하는 병사 등장)

( 예수는 걸어오며 2번 정도 주저앉는다. 세 번째 주저앉을때 병사 1은 사람 2을 붙잡는다)

( 그리고 사람 2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주고 대신 지고 올라가라는 시늉을 한다)

( 사람 2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무대 위로 올라가고 그 뒤를 예수와 병사들이 따라간다 )

( 건후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

(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암전! 못박는 소리 9번 후 불을 켠다)

병사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사람 2는 퇴장, 건후는 안쓰럽게 예수를 바라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곁에서 안타까워 하고 있다 )

 

건후 : 주님이 저렇게 고통스럽고 모욕을 당하시면서 죽으시는 건가..

(예수께 점점 다가가며) 날 구원하시기 위해 저렇게 고통을 당하시는구나.

예수 : ( 마리아를 바라보며 )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건후를 바라보며 ) 이 분을 부탁한다.

( 하늘을 바라보며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대사가 끝나고 나면, 암전한다.)

 

4- 교회 믿음방

 

해설 : 간밤에 꿈을 꾼 건후. 다시 성극준비를 위해 교회에 간다.

건후의 모습은 한결 편안해보인다.

 

(해설 후 불을 켠다.)

 

친구 2 : ~ 건후 일찍왔네? 빈 방 있습니까 대본 뽑아왔지?

덕구역은 친구 1을 시키는게 어때? 덕구 역에 딱인거 같은데 응?

친구 1 : 뭐야? 니가 더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

건후 : 내가 어제 진짜 실감나는 꿈을 꿨거든.

매번 성경으로만, 설교로만 들었던 걸 겪어보니 달라.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엄청난 거야. 은혜 그 자체야.

이 은혜를 어떻게 하면 모두 느끼고 감사할 수 있을까?

( 얼마간 생각을 하다가 ) 그래. 이렇게 하면 좋을거 같다.

친구 1 : 갑자기 혼자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이야기해봐.

빈 방 있습니까 이거 안할거야?

건후 : 성극이니 뭐랄까 꼭 성경대로 할 필요는 없지 않냐?

성극이니 뭐랄까 주님의 탄생을 감사하는 내용이면 되잖아? 그치?

친구 2 : ? 무슨 소릴하는거야?

건후 : ‘빈 방있습니까?‘를 조금 바꿔보자.

매년마다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을 찾아 떠돌다 결국 마굿간에서 주님이 태어나시는데,]

우리가 너무 자주 이 내용을 성극이나 설교로 듣고 봐서인지 이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몰라.

그니깐. 조금 바꿔보자고. 기대해봐!

 

(암전)

 

5- 성탄절 무대

해설 : 여기는 성탄절 무대. 드디어 건후와 친구들은 성극을 발표한다.

성극의 배경은 2천년 전. 베들레헴.

고향으로 호적을 하러 온 나사렛 사람이던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을 구하고 있다.

요셉 : 마리아. 괜찮아? 숨소리가 달라졌어. 곧 아기가 나올까 걱정이야. 쉴 방도 못구했는데..

마리아 :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아기. 하나님께서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거예요.

요셉 : 저기 여관이 있어. 아마도 베들레헴에서 마지막 여관인거 같아. 저긴 꼭 빈방이 있었으면 좋겠군.

저기 주인계세요? 누구 안계세요?

건후 : 에헴. 제가 이 여관의 주인입니다만..

요셉 : 호적 때문에 나사렛에서 올라온 사람입니다. 혹시 빈 방있습니까? 아내가 곧 아기를 낳을거같아요.

베들레헴에 여관이란 여관은 다 돌아다녔는데, 모두들 호적하러 와서 빈 방이 없네요.

좋은 방이 아니라도 좋아요.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게, 아내가 쉴 수 있는 곳이면 됩니다.

건후 : . 그러시군요. 모두들 호적을 하느라 몰려오니 다 방이 가득 찼어요.

요셉 : . 그렇군요. ( 아내 마리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 ( 마리아는 그 모습에 고개를 숙인다 )

그럼.. 저기 동물들이 있는 마구간이라도 저희가 있으면 안될까요? 부탁드립니다.

건후 : . 원래는 빈 방이 없어요. 그리고 저는 당신을 마구간으로 인도해야했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해요. ( 관객들을 바라보며 )

매년하는 성극 그때마다 그냥 매년마다 아무렇지 않게 늘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보여주죠.

요셉과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주님을 낳고, 동방박사와 목동은 그것을 축하한다는 이야기가 되풀이 되죠.

성경에서, 2천년전 베들레헴에서는 그랬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주님을 마구간에 모시고 싶지 않아요.

말씀 한 마디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모른 척하고, 우리 방식대로 우리 고집대로 하는데도

주님은 늘 기다리시고 늘 사랑한다 말씀하시죠.

그런 주님은 제게 은혜 그 자체예요. 구원 그 자체입니다.

빈 방요? 빈 방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 가장 좋은 방.

저의 마음에 모시길 원합니다. 들어오세요!

 

해설자 : 성탄절.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날.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새하얀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맘을 하얗게 정결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구원되신 주님을 모셔드리는 건 어떨까요?

빈 방 있습니까? . 빈 방 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모셔드립니다.

2011년 성탄절, 오늘은 날 구원하신 귀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날.

주님 그 크신 은혜를 잊지 말고, 빈 방이 없다고 버려두지 마시고 모셔드려요.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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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slds2.tistory.com]




'비오는 날 골방에서 라면 끓여먹으며 히히덕 거리는 교회'

비가 오면.. 추적추적 마음도 그렇고 왠지 라면이 생각나죠? 저는 예전 기억(중학교)에 비오는 날이면 라면을 끓이고 거기에 김치 총총 썰여넣어서 혼자서 후루룩하거나, 친구들이 있으면 함께 후루룩하면서 사는 이야기 그리고 이런 저런 고민들을 이야기하곤 했었죠.

그런데, 개척을 하게 되면.. 아마도 처음에는 아는 분의 '피아노학원'을 빌려 예배드릴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런 낯선 분위기가 싫은 사람, 화려한 사운드와 편안한 자리가 있는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오지 않겠지요? 깔끔한 진행 따윈 없을거고, 우리네 발냄새도 고스란히 맡을거고, 사운드에 압도되어 뭍힌 우리 목소리는 여실히 드러나겠지요.

근데 말이죠. 저도 아주 어릴적부터 목회자의 아들로, 대형교회에서, 선교지에서 살아왔지만.. 번쩍번쩍한 모습, 차려입은 모습, 거룩하고 경건한 모양들보단.. [삶이 있는 예배]였음 하는 바램입니다. 집에서 입는 자연스런 옷차림, 편안한 마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와 같은 교회]를 꿈꿉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골방에 옹기종기 모여 목회자의 비법으로 끓인 라면을 함께 후루룩 홀짝이며,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들.. 세상에 나와 맞닿아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습니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신학적 사고, 성서적 이야기들이야말로 얼마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들을 진정 살아숨쉬게 할까요?

전 [우리네 삶이 동떨어지지 않은 그래서 신앙과 삶이 맞닿은 그런 교회공동체]만이 이 나라 교회를 다시금 살아 숨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숑숑숑~




'많이 늦어졌지만!'

아들이 책을 참 좋아합니다. 아빠 닮은거라고 말하면 아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까 싶어 그 말은 이렇게 반 만 합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동화책 중에 '많이 늦어졌지만'이란 동화책이 있습니다. 한 돌 반된 아들녀석은 읽고 싶어지면 아빠더러 '앉아 앉아'그러면서 바닥을 툭툭 두드리고, 아빠가 앉으면 무릎 위에 올라가 책을 폅니다. 책을 읽어줍니다.

'많이 늦어졌지만'.. 표지 그림은 노랑 초록옷을 입은 당나귀녀석이 만세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동화에서 당나귀는 소풍을 가는 길이죠. 화창한 날씨에 신이 난 당나귀는 토끼네 집 앞까지 와서 토끼에게 인사를 합니다. 토끼는 '나도 가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나귀는 '그럼, 빨리 ...나와'라고 대답을 하죠. 그런데 토끼는 청소를 하는 중이...었지요. 
[기다리다 조금 늦어져지만 둘이 같이 가니까 더 신나겠지 랄라랄라] 그렇게 여우네 집 앞까지 오죠. 여우가 그런 토끼와 당나귀를 보며 묻습니다. '어디가니?', '소풍', '나도 가고 싶어', '그럼, 빨리나와'. 그런데 여우는 이불을 널고 있었지요.
[조금 늦어졌지만 셋이 되니 더욱 신이 나 랄라랄라] 곰돌이 집앞에서 곰돌이가 당나귀와 토끼 그리고 여우에게 묻습니다. '어디가니?', '소풍', '나도 가고싶어', '그럼, 빨리나와'라고 대답을 하죠. 그런데 곰돌이는 멋쟁이라 이 모자, 저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며 말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조금 더 많이 늦어졌지만 넷이 되니까 더욱 신이나, 랄라랄라] 그렇게 돼지 아주머니네까지 왔지요. 돼지 아주머니 역시 소풍을 함께 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마침 돼지 아주머니의 다섯 아기돼지들이 낮잠시간이라,, 아기돼지들이 울자.. 네 명의 친구들은 아주머니를 도와 함께 자장가를 부르며 잠이 들어버리지요.
그동안 아주머니는 과자를 굽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주스를 담아 소풍 갈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잠이 깬 모두는 다함께 랄라랄라. 먹을 것 가득 들고 랄라랄라 소풍을 갑니다. [조금 아니, 많이많이 늦어졌지만 모두모두 모여서 즐거운 소풍이었습니다.]

저는 이 동화를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우리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뭐가바쁜지 요즘 교회는 예배만 보면 다들 집에 가기 바쁩니다. 집에 가지 않더라도 '봉사'니 뭐니 다들 바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함께 무엇을 하는 것.. 여기에 왜 '함께'는 없고 홀로 바쁜건가요? 많이 늦어지더라도 모자란 모습 기다려주고 챙겨주며 '같이 함께' 가는게 아름답지 않을까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많이 늦어졌을지 모르지만],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한낱 죄인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러주신 그 은혜(계시)이 응답 아닐까요?

[조금 아니, 많이많이 늦어졌지만 모두모두 모여서 즐거운 공동체를 이룰 분 여기여기 붙어랏!] 끝.

Posted by 숑숑숑~




1. 고난주간 무얼할겁니까? 기도? 금식? 뭐. 뭘하든 좋습니다. '주를 위해 한다', '주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거룩한 생각 참 좋지요. 그런데 '주를 위해'보다, '이웃을 위해'란 생각은 어떤지요? 그것이 더 '주를 따름' 부합하지 않을런지요?


2. 이웃의 고난에 참여하는건 어떨런지요?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위해 힘쓰는 일들이 많습니다. 밥을 먹을 돈으로 금식했다면 '이웃을 위해' 그 금액을 기부하는건 어떨까요? '이웃을 위해'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겠는지요? 


3. 사소하고 작은 손짓이 어느 쪽에선 주님께서 주신 존엄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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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랫만에 아이들에게 오렌지쥬스를 간식으로 주었습니다. 다들 꼴깍꼴깍 마시고 나서 남은 통으로 저금통을 만듭니다. 그리고 집안에 돌아다니는 10원, 50원, 100원짜리를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모읍니다. 절대 강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금'을 위한 '돈'은 사양합니다. 그저 돌아다니는 잔돈을 모으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주일 - 오순절 - 맥추절 - 초실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돌아 다니던 아람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들이 살아가는 것을 감사하며 이웃 특히 고아와 객, 과부와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우리에게 하찮은 동전 몇닢이 어느 이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된다는 것과 더불어 나누며 사는 '오이쿠메네(oikoumene)' 즉, 진실로 교회를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교회는 사회와 별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단순 그리스도의 몸도 아닙니다. 교회는 곧 세상 그 자체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의 가시성과 가치를 드러냅니다. 교회는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진실로 그 세상'인 동시에 '하나님의 집(oikos)'입니다. 잊지마세요. 모두 이어져있고, 우리는 관계되어 영향을 줍니다.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이 미래를 만듭니다(구원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이상은 현실의 끝자락입니다. 자락을 잡으면 이뤄집니다. 여기여기 붙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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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숑숑숑~



임목사는 교회의 나머지 목회자들을 흔히 '도구'로 생각한다. 그것도 영원하지 않은 언젠가는 떠날, 떠나게 될 도구 말이다. 마치 쓰다버리는 밧데리같은.. 

왜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을까? 왜 부교역자는 '임시직'이어야 할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데 왜 부교역자들은 그 몸 밖에 있는 것 같을까?
담목의 그런 인식은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결국 교회 전체의 공동체성은 '관계'로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필요'로서 이뤄지게 된다. 제발 그러지 말자.
필요에 의해 모인 '큰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유지'로서 부교역자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뤄나갈 '작은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분할'이자 진정한 '확장'을 위해 함께 살아나갈 동역자라고 생각할 순 없을까?
현실에 불가능하다고? 아니다. 아니란걸 몸소 보여줄테니 여기여기 붙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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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systemplug.tistory.com]



1.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2. 우리는 그런 한 인간을 하나님(그리스도)으로 고백합니다.
3.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이자 기독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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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기도




아. 제가 돕는 교회에 화분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단상 뒤에 있는 화분인데요. 
바람도 안통하고, 햇볕도 안들어서 식물들이 살기 어렵죠.
그러다보니 심심치 않게 죽어나갑니다.
그래서 건의했더랬죠. 차라리 조화를 두지 그러냐고.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성전(예배당)에 생명 없는 것을 두면 이상하지 않냐?' 였드랬죠.
뭐. 저야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듣고 가만 있는 성격이 아닌지라.. 이렇게 답했습니다.
"생명이 죽어나가는게 우스워보이냐? 예수께서 그리 가르치시더냐?"
그렇게까지 말해도 전혀 이해를 못하더군요. 아. 빨리 개척해야겠어요;;
사실. 제가 좀 오바하는 경향일 수 있겠지만.. 저는 꽃이나 나무를 화분에 두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마음껏 뿌리내릴 곳에 있어야할 생명들을 인간의 만족을 위해 가둬두는 거 같아서 말이죠.
뭐.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화분에 있는 그 생명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분들이 있으니 저 혼자 만의 생각으로 남겨두는데..
이건 뭐. 바람과 볕도 안드는 곳에 한 달에도 몇개씩 생명이 죽어나가니.. 말을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전혀 '이해'도 못하고 있으니..
저러면서도 예수가 말한 생명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더랬죠.

'생명'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만족'을 위하고, 
그 '생명' 자체의 소중함을 이해하기보다 자기 '만족'가 '이해관계'안에서의 '생명'을 이해하니.. 우습죠.
세상 모든 만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생각하는 덜 떨어진 아주 이기적 종자들이지요.
마치 200년전 자기들 홍차에 넣을 설탕을 위해 아프리카에 있던 소중한 생명들을
배에 실고 6개월을 항해하고 그 배에 실려 있던 이들은 손 발이 묶인채
그 안에서 먹고 싸고 자고 그렇게 6개월이 지나면 허리까지 오물이 덮히는..
그리고 풍랑이 일때면 신께 바치노라고 생명을 아무렇게나 버리고,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시시때때로 마음껏 한 생명을 유린하고..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남미로, 북미로 설탕을 위해 배를 탄 생명 중 반이 죽어나가는데도..
엄청나게 큰 예배당에 앉아 '생명'을 찬양하며, 이웃을 사랑한다 고백하고
곱상하게 홍차에 그들의 피가 들어있는 설탕을 넣고 마시며 웃는.. 그런 과거의 모습들.
현재에는 그런 일들이 없을까요?
정리해고당하고, 쫓겨나는 생명들. 정당한 노동을 하고도 그 댓가를 누리지 못하는 생명들.
법이란거, 힘이란 알량한 것을 생명의 가치를 마치 너무도 쉽게 재단하는 모습들..
너무 많지 않은가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것,
나의 생명이 중요하다면 어떤 누구의 생명도 귀한 줄 알고 인정하는 것
세상에 어떤 작은 생명도 나의 생명과 동일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나'만'을 위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아닌, 진정 남을 돌아볼 줄 아는 인간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 있어서.. 
MB씨께서 그토록 생명을 살리기 위해 4대강을 강조하신 이유로서의 그 '생명'은..
'생명'을 생명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 안에서 바라보는 '생명살리기'이었기에.. 
'생명' 강조하면서 4대강에 수십 조를 쳐박으셨던 거겠죠.
수십 조의 몇 억분의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잃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이죠.
자신의 눈에서는 마음껏 뿌리 박고 살 나무보다 자기가 보기 편한 화분이 더 좋았기에
수천년 흐르던 물줄기와 자연을 콘크리트로 도배할 수 있었던 거겠지요.
이 뿐만 아닙니다. 
단순히 '자연의 문제'를 넘어서 '타인'을 이해할 때도.
타인의 삶 그대로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타인을 자신의 안경을 쓰고 이해하다보니..
늘 '유체이탈'화법을 쓰시고, 오로지 자신의 영위를 위해 결단하시고 말씀하시지요.
그런 관점에서 '독도 문제'를 바라보면 또 웃깁니다.
언제 그렇게 나라 생각하셨는지 
얼마전까지만해도 일본과 과거를 두고 미래로 나아가야된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말이 바뀌시더니 독도 찾아가고, 강경발언들을 하시는 모습 속에..
그 문제의 화두가 
우리네 한반도사람들이 그토록 생명버려 지키고자 하는 그것이 아닌,
(자신의 필요와 만족을 위한 행위라는) 꼼수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아마도 MB씨 그 스스로가 수년전부터 보여준 자신의 '생명가치'였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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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自信)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하는 것이 바로 진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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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의 삶을 후회하며 실망한다.
그러나 만약 현재가 없다면 현재의 주위의 사랑도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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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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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감사
절대화된 신앙은 교회를 붕괴시킨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위험이다.
절대화된 교회는 신앙을 파산시킨다. 이것이 가톨릭의 위험이다.
                                                                                              '한스 큉'의 "교회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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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떼지 않고 걸어나갈 수 없듯,
예수를 바라보기만 하고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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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복주의.
대표적인 조용기목사의 핵심(요한 3서 2절)이기도 한 기복주의는
쉽게 말해 계시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개신교+가톨릭+동방정교회), 이슬람)와,
한반도샤머니즘의 결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에서
영혼이 잘 되면, 네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 즉, 예수 잘믿으면 건강과 물질적 복이 들어온다는 것은
절대 계시종교가 아닌, 샤머니즘적인 Give&Take(예로 물떠놓고 빌면 이뤄진다식)를 말하고 있죠.

그리스도교에서 '복'이란.. 한반도에서 흔히 생각하는 '복'의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복'은 개인의 뜻대로 이뤄지는 것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복'은 인간의 뜻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하죠.
예를 들어봅시다.
다들 부모님이 계실텐데.. 하나님을 열심히 믿은 부모님이 삶이 평탄치 않거나, 고통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실하신 그 부모님은 '복'을 받은 것일까요?
빌립보서의 말씀만 보더라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고 그 스스로 '기쁘다' 말하며 자신의 삶이 비천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바울을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아서 불행한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예수는 부자청년에게 자신의 것을 두고, 예수를 따르라고 했던 말씀 그 하나만 해도
기복주의는 문제가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무언가를 다른 이보다 많이 가졌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것을 빼앗겼단 것이 되니. 이웃사랑이 아니겠지요?
요즘 '청부론'같은 것이 유행인데.. 이 모든게 겉만 번지르르한 자기방어기제 일 뿐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기복주의신앙안에 해석되고 동요되고 있기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2. 대형교회(Mega Church).
보통 대형교회들이 기복주의적인 요소를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모이는 것인지 모르지요.
물론 기복주의적인 요소들이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정말 드뭅니다.

왜 대형교회들이 개독교라고 말하는 이유인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 무엇이든지 대형화되면 구체화되고 체계화됩니다.
그것은 본질과 비본질의 주부를 바꾸어버릴 위험이 생깁니다.
즉, 유지를 위해 원래의 본질을 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둘째,
 체계화된 시스템은 유지를 위해 예수가 가르치고 삶으로 보인 사랑의 요소를
현격한 법과 규율로 바꿔버릴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대형교회 목회자가 예수처럼 목양할 수 있을까요?
또한 대형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수 있을까요?
즉, 그 대형의 유지를 위해..
소수의 교회의 유지를 위해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위주로 움직이거나,
대형교회 안에 수많은 시각과 가치관, 운영의 모습,
가운데 매우 보편적인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법적인 매임의 관점하에 움직일 것입니다.

셋째, 대형교회는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죽이고 수평이동을 하게됩니다. 

넷째, 대형교회에는 공동체성이 없습니다.

다섯째, 목회자가 성도를 제대로 목양할 수 없다.
세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를 같이 설명해야될텐데요.
우선 요즘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나 공동체성이 없습니다. 즉, 내 교회라는 소속감?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더 편한 것, 예배만 드리는 것, 화려한 것들을 쫓아가다보니 지체로서의 역할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 부분을 좀더 논리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회에는 세례를 받고, 입교한 이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습니다.
공동의회, 재직회 그리고 당회지요.
예산이나 교회의 행정적인 일들 그리고 계획과 임직 등의 모든 교회 일들을 이 모임을 통해 결정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대형교회에서는 이러한 모임 중 공동의회와 재직회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장로와 목사가 모이는 당회에서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되고,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모 교회 재건축, 목사세습, 헌금불법운용)를 만들게 되지요.
결국 성도로서 머리된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한 역할을 대형교회에서는 하기 어려움으로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성도 개개인의 삶을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이러한 목양의 부분은 그 담임목사에게 나태함을 주게 되어집니다.
그러다보면 담임목사는 설교이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요.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대형교회 목사들의 정치참여,
혹은 신학적 개발미비로 인한 언변실수 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대형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큰교회가 하는 역할이 있고, 작은교회가 하는 역할이 있지 않느냐?'는 식의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굳이 문제를 일으키는 대형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게 할 필요가 없고,
작은교회가 큰교회가 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목회윤리적, 교회사적 대안이 분명히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하지 못하고, 개교회주의적이며, 대형교회가 작은교회를 무시하는 목사들의 의식 등의 태도와,
큰 교회를 작은 교회로 분할해서 내려놓기가 어렵다는 이유들이 있지요(이동원목사가 이 일을 하려다 포기했죠).

이렇게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예수를 따름을 주장하면서 자기들끼리 모이기 원하는 대형교회적 문제와 분위기 때문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3. 신학없는 목회자.
작은 교회에서는 과다한 업무로 인해, 큰 교회에서는 분할되어 목양보다 다른 것에 신경쓰는 나태함 때문에..
혹은 성도들과의 헌법적인 모임을 통한 계획과 진행보다, 성도들의 무지로 인한 목사의 일방적인 결정 때문에..
목회자들은 신학에 대한 자기개발과 노력이 부족함을 봅니다.
또한 신학 뿐 아니라, 헌법에 대한 이해, 그리고 행정에 대한 인식,
사회에 대한 이해 및 역사에 대한 개념도 없어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지요.
이 점에 있어서,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신학에 꾸준히 노력할 수 있도록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시간을 줘야되고,
목회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생각하며 날마다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힘을 키워야 겠지요.
그럼에 있어서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질문도 많이 하고,
일방적인 가르침의 시간보다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예수를 따름을 주장하면서
교만하고 나태한 바리새인적인 모습을 가진 목회자들 때문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4. 알려고 하지 않는 성도 혹은 자신의 지식만을 옳다 여기는 성도.
이 두 부류가.. 참 대한민국 개신교에 큰 문제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많이 알리고 신학을 가르쳐 주려해도..
바쁘다고 관심없어하고, 편한 것을 찾아 대형교회로 가는 성도분들 때문에 저 같은 목회자는 개척도 하기 어렵네요 ^^;
지금 종교포럼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종교포럼이 생기기 전에 비게에나 이정토에서 이런 종교적 부분들이 나오면 여러번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그때 보면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글에 추천도 많이 해주셨구요.
그런데 종교포럼이 생기고 여기서 미꾸라지처럼 잘못된 것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도
잘못된 것을 지적하거나, 왜 잘못되었는지 말하는 이는 드뭅니다. 왜 그럴까요?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괜한 시비에 연관되어서 귀찮아지지 않길 원해서 겠죠?
이런 것이 여기 뽐뿌 뿐일까요? 뽐뿌는 그나마 낫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인터넷 어디에도 바른 신앙과 성경과 신학을 가진 이들이 없어요.
온통 틀린 말들과,
자기 느낌식의 '영적?'이야기(제 개인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걸 영적으로 풀이하시는 분들이 많은거 같아서..)들만 난무하고,
이단들의 말들과, 과격한 예수천국불신지옥식의 명제들만 요동치고,
거기다 언론에서 터진 몇몇 개념없는 교회의 일들까지 더해져서..
더더욱 개독교로 오해되어가는 듯합니다.
바른 신앙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없어서..
신학을 알려고도 성경을 제대로 알려고도 하는 이들이 없어서..
알아도 괜한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쉬쉬하는 이들이 많아서..
혹은 자기가 어줍지않게 조금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정말 그리스도교가 엉뚱하게 오해되고 마치 다 그런식의 일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발톱에 때만도 못한 우리(목회자나 성도 모두)는 과연 달려가고 있나요?
아님 서서 다 이루었다라고 교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나요?

이렇게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예수를 따름보다, 자기 만족함에 자기가 만든 예수를 주라고 주장하는
나태하고 교만한 성도들 때문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5.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만 매달려 있고,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함.
신약성경의 저작시기들을 보면,
바울서신이 먼저 기록이 되었고 그 다음에 복음서들이 기록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요즘처럼 차가 있거나, 인터넷이 되거나 하지 않았고, 인쇄술이 발달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삶에 대한 내용들은 빨리 퍼져나갈 수가 없었겠지요. 물론 체계적인 복음서기록도 없었을테구요.
그랬을때 바울 또한 예수에 대해서 알았지만 그 자세한 예수의 삶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예수를 전하게 되지만,
그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바울이 온 대서양을 돌아다니며 전했던 것은 자신이 깨달은 명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잘 알지 못했으니깐요.
사실 바울서신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구체적 삶 내용은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느냐고요?
복음서들이 바울서신 이후에 기록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그리스도인)는 바울이 깨달은 명제에만 집중하고 있지,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는 그만큼 집중하고 있지 않음을 봅니다.
제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지 않단 말이 아닙니다.
명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명제와 명제 사이에 있는 과정과 상황을 알아야 가능한 것이지요.

제가 무엇을 말하느냐고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바울처럼
"예수께서 나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그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지요"
하지만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명제는 이해되지 않는,
어쩌면 강압적인(역사적으로 제국적인 선교등이 많았으니) 부분들이 많아서
이들에게는 이러한 명제는 단순한 반발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예수의 삶이요,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우리부터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고, 예수의 삶을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매번 찬양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니,'예수의 향기'니를 외치면서
그 삶은 너무나 성과 속을 구분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너무나 이중적으로 교회에서만 거룩한 척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바로 그런 이중적인 이들을 저주했음을 잊고 있진 않은가요?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다른 모든 이들이 무시한 그 소외된 이들과 함께함을 잊고 있진 않은가요?
예수께서는 사랑을 위해 오셨지, 종교를 위해 오시지 않았음을 모르시나요?
예수께서 자신을 믿어야 천국간다는 소리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를 모르시는가요?

그리스도인에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소욕적 인침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삶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삶으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바울처럼 하루를 다이루었다가 아닌 달려나가며 매일을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 이 5가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되었을때, 지체로서 머리되신 예수를 쫓았을때
개신교는 더이상 개독교라는 소리를 안듣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Posted by 숑숑숑~
불교나 타종교 그리고 그리스도교(가톨릭 + 개신교)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소중히 해야 할 것들.
자신의 생명, 내가 사랑하는 이의 생명, 내 공동체의 생명, 이웃의 생명,
그리고 내 미래의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세상 모든 생명.
이것이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쉽다고 하지만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열반을 위해서든, 천국을 위해서든
생명에 이르는 것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있죠. 윤회사상 때문이겠지요..?
그리스도교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게 창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가 저들이 믿는 믿음. 곧 열반  즉 번뇌를 벗어버리고 참 진리를 향해 살아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목적(죄 이전의 보기좋았더라의 그 순간)을 향해
즉 하나님 뜻에 맞게 사는 것,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땅 오셔서 사시고, 그 목적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
모두가 나름대로의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그것이지요.
'생명'을 위해 살아갈때 그것이 참 믿음이지, 단순히 내가 믿는다고 해서 믿었다고 확신 할수는 없지요.

예화를 하나 들께요.
번지점프를 하기 전에는 스릴넘치는 것을 좋아해서 멋지게 뛰어내릴것같지만,
막상 번지점프대에 서서 밑을 바라보고, 자신 발에 묶인 번지 줄을 바라볼땐 뛰어내리기 어렵지요.
믿음이란 것은 자신이 생각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 만이 아시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죠(불교는 이치를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따름을 위해서)


최대한 종교성을 배제하고 글을 써봤습니다.
타종교분들에게는 제 부족함을 이해해주십사 말씀드리고 싶고,
그리스도교 안의 형제자매분들에게는 종교포럼의 성향상 배제된 말을 한 것을 이해해주십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Posted by 숑숑숑~
이해된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며,
이해할 수 없다고 틀린 것 또한 아니다.

믿음은 주시는 이로 받는 것이며,
받는 자로 주시는 이의 뜻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숑숑숑~

구티에레즈(G. Ghtierrez)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들 중에 '구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믿는 것)하면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이러한 명제 안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위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믿는 것)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으니..
구원이 무엇인가? 혹은 믿는게 무엇인가?가 모호해져 버린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행 2장)하는 부분에서 구원은 중요치 않다.
구원이란 것, 천국이란 것, 영생이란 것은 목적이 아닌 선물일 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중요한가?
내가 삶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얻는 것이 중요한가?

어느 것이 중요한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 영생, 천국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그 기쁨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야 말로 구원아니겠는가?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 아니겠는가?
태초에 계획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열심히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 기쁨이 아니겠는가?

구원은, 천국은, 영생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성령님 앞에 인정되는 것이지
우리의 모호한 '믿음'으로 입장권을 얻는 것같은 값싼 것이 아니다.
바울이 고백했듯(빌)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삶이 구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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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역사 속으로 오신 이유는..

사랑을 위해서 이지,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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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예수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특별히 교회공동체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아간다. 교회공동체 또한 예수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한자에 대한 이해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곤고히 한다.

 

그럼에 있어서 교회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제도적인 굳어짐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고, 사회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적도 많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보다 교회공동체 자체의 존립을 더 중요시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교회공동체는 제도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 한 예로 예수시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이 그러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 개신교가 그러하다.

 

일찍이 본회퍼는 교회를 ‘사귐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 보았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의 일원인 우리의 사귐을 통해 그리스도는 존재하시는데, 그 사귐이란 예수께서 원수들 가운데 사셨고, 자기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 위에서 홀로 조롱당하시며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셨듯, 우리도 '예수를 따름'으로 원수들 가운데 사는 것(사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보면, 교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를 나타내신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딤전3:15)이요, 그리스도의 몸(엡1:23)이며, 성령의 전(고전3:16)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인데 이를 가르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라 한다.

교회는 두 가지 구별이 있으니,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보이는 교회는 온 세계에 산재한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이다“

이렇게 헌법을 통한 교회공동체의 정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로서 인간 스스로 틀로서 교회를 넘은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신앙은 무엇이며,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일까?

 

◎ 함께 토론해보고자 것들.

1. 현재 대한민국 교회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 요즘 ‘사랑의교회 건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공동체성 없는 개인구원이 필요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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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두려움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주의 은혜요, 그 두려움에서 날 건진 것이 바로 주의 은혜로다."

- 존 뉴튼

Posted by 숑숑숑~

내가 땀흘리지 않고 얻은 것을 나누는 것은 성찬이 아니다.

즉, 노력없이. 이해없이 어찌 그 사랑과 은혜를 알 수 있을까?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농부 하나님 씨를 뿌리시며 키우시며 얼마나 기다리실까?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을 헛되이 보내며 열매맺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

Posted by 숑숑숑~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하나님 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겨우 보답하는 것이다."

 - 프랑소와 마라발

Posted by 숑숑숑~
작년인가?

장하준 씨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란 책을 읽은 적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비꼬는, 그리고 경제교양을 쉽게 다룬 도서였다.



사마리아인?



눅 10장 25-37절.

 

우리가 너무나도 잘아는 비유이다.

율법사는 예수께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나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 이웃과 동떨어져있다는 말이다.

즉, 이웃과 다른 사람이라는 거리를 둔 것이다.

이웃과 같이 되지 않는 삶을 살면서 과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묻는다.

"네 생각에는 세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주님은 이웃이 되어라 말씀하신다.

그것은 도와주고 사랑해줘야 할 그 상대와

같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삶과 같이 그렇게 낮은자 헐벗은자들과

함께 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나쁜 사마리아인과 같다.

왜 선한 사마리아인과 다를까?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강한 자가 이기면 그것이 곧 정의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강도맞은 이웃을 돌보기는 커녕 그 이웃 가까이로 가서

그 이웃에게 내게 뭔가 필요한 것이 없는가 살피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차마 부정탈까봐 그 근처에 얼씬 하지 않고 지나쳐가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보다도 더 모자란 그런 사람 말이다.

교회도 그렇다.

공의와 정의를 외치고 사랑이 있어야 할 이 곳에서 세상보다도

더 경쟁하며 살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회개해야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리 살게 하지 않으셨다.

"네 이웃은 누구냐?" 물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Posted by 숑숑숑~
세상을 보면,

영남이니 호남이니..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서로 구분하고 나누며 산다.





사사기 마지막절의 말씀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데,

작금의 현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저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면서,

정치와 규합하거나, 친일을 따라가거나, 기복적 신앙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들이 세상을 바라봐야 할 '눈'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판단하고 기준 삼아야할 '절대적 기준점'은 무엇일까?





답을 주기보다, 고민을 하여 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답을 줄 수 밖에 없다. 세상이 생각할 틈, 고민할 틈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판단하고 기준 삼아야할 '절대적 기준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라봐야 할 '눈'은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다.





물론.. 성경을 잘알고, 예수를 잘알고, 그의 삶도 잘 알겠지?




그런데도 현실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같이 서로 좋을대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걸까?




그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머리에만 있는 지식일 뿐이고 고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책 속에만 있었던 일일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보다, "이웃이 네가 되어 줄수 있느냐"의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어찌 대답하며 살 것인지 진정 고민하고 고백하는 삶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지 않을까? 






Posted by 숑숑숑~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찬송가 : Amazing grace(나같은 죄인 살리신)

이 곡을 작사한 존 뉴턴은 노예상인으로서
노예선의 선장이었다. 그는 20년동안
아프리카 사람들을 배에 실어 자메이카로 옮겼다.
한 배에 600명가량을 실어옮기곤 했는데
도착할때에 살아 있던 사람의 수는 300명도 안되었다.
손과 발과 목에는 쇠로된 고랑이 채워져서
어깨와 발은 탈구되었고, 관보다도 적은 침대에 누워잤으며
물은 배안에 고여있는 물이 전부였고, 음식은 최소한만 주었다.
대변과 소변은 그들이 있던 그곳에서 보았고,
오물들과 함께 600명의 인원은 죽어갔다.
선원들의 유희를 위해 젊은 여자들은 강간당했고
풍랑이 거칠땐 그 중 가장 아픈 사람을 바다로 버리곤 했다.
고작 차를 마시기 위해 넣는 설탕을 만들기 위해
이들은 팔려갔고, 죽어갔으며, 고통 당하였다.
존 뉴턴은 자기가 죽인 2만여명의 사람들을 보며
깨달았던 것이다. 주님을 만났다.
그리곤 그의 죄를 뉘우치며 이 곡을 썼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오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여, 이 얼마나 달콤한 음성입니까
that saved a wretch like me
저 같이 비참한 사람을 구해 주시나니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저는 한 때 길을 잃었지만, 지금은 저의 길을 찾았습니다.
was blind, but now I see
저는 한때 눈이 멀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달콤한 설탕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돼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사람이었지 자신은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의 부귀를 누리던 그때를 눈 멀었었다 고백하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안 지금은 볼 수 있다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같습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지금 살아있습니다.
오 주님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거대한 뜻과 꿈 때문에 망설인 적있습니다.
오 아버지 회개합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안다면 어찌 이럴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는 것을 잊는다면
그 꿈을 꾼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주님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기뻐했던 그마음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요.
주님의 사랑안에 그 은혜 안에 거하게 해주십시요.
조금이라도 1%라도 마음에 주님의 마음에 흠이 되지 않게
저를 깍으시고 다듬어 주시옵소서
아픔과 고난과 슬픔이 있을지언정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라면
담대히 나아가게 해주시옵소서.
Posted by 숑숑숑~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로마시대 많은 핍박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콜로세움에서 때로는 아프리카로부터 공수해온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십자가에 못받혀 죽기도, 불태워져 죽기도, 도끼로 목이 베여 죽기도 했다.
그 모습을 목격했던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했다.
(행11:26에도 타인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얻음이 명시).



죽어가며 바보처럼 예수를 부르짖던, 때론 찬송을 불렀던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들 눈에는 그리스도인이 눈 먼자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랬듯,



"한 명의 눈 먼자가 만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

 

'그리스도'인.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

Posted by 숑숑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