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문익환의 ‘교회공동체’의 의미와, 그 과제



A. ‘교회공동체’의 정의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의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간다. 이렇게 인간의 공동체에서는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적 이해를 통해,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 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각주:1] 그러므로 이런 교회공동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삶 전체를 이해해야한다.


   예수의 삶 전체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각주:2] 이것은 예수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통해서만 조명됨을 뜻한다.[각주:3]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현실과 상관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거나, 실재가 아닌 하나의 상징 혹은, 신화론적 표상 등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교회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에게 직접 도래하기보다, 교회공동체를 통해 개인에게 다가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일치시키거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피조물 세계에 종속시켜서도 안 된다. 즉,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가 아무리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공동체의 차이는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각주:4]


   이 점에 있어서 개인과 교회공동체와의 관계를 보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각 개인은 무한자에 대한 이해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곤고히 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피조물 세계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교회’ 안에 자연스레 종속시키는 제도적인 굳어짐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보다, 교회공동체 자체의 존립을 더 중요시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교회공동체는 제도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섯 가지 패러다임을 구분하면서, ‘패러다임‘에 대해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 가치 · 행동양식 등의 총체적 상황”[각주:5]이라고 말한 쿤(T. S. Kuhn)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한스 큉이 교회공동체 역사의 ’패러다임‘을 구분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본질적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그에 응답인 교회공동체의 총체적 상황들(발생, 성장, 경직화)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와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함에 있다.[각주:6] 즉, 앞서 말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공동체의 상관관계를 ’패러다임(시대적인 상황과 고착화과정 그리고 문제해결)‘으로 구분함으로서,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교의 변하지 말아야할 본질과, 변해가는 시대 속에 교회공동체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각주:7]


   이렇게 한스 큉은 교회공동체에 대해,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하나님 나라의 열매이자 통로라고 말하면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게 그 존재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각주:8] 이에 관련하여, 몰트만은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는 없다."[각주:9],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각주:10]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참된 존재를 갖고, 교회공동체의 독자적인 존재론을 배제하며 그리스도의 활동 역사를 기술하는 것만을 허용한다고 말했다.[각주:11]


   이처럼 교회공동체의 존재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공동체의 머리’이며,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스 큉은 말한다. 또한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해소하거나,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각주:12]


   이에 대해 몰트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사도직과 성례전, 그리고 작은 형제들, 파루시아가 바로 그것이다.[각주:13] 우선 첫째, 사도직과 성례전에 대해 몰트만은 '사도직'이라는 말을 일차적으로 선포의 의미로 두었다. 즉, 사도적 말씀 선포에 의해 그리스도는 임재 한다. 또한 성례전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는 매개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신앙공동체 속에 임재 한다고 보았다.[각주:14] 둘째,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계신다고 보았다.[각주:15] 즉, 예수는 역사에서 소외받고 가난한 보편적인 이들 모두 가운데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 세계 혹은 교회공동체 속에서만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받는 어느 곳에서나 함께 하심을 의미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파루시아를 약속하셨다. 몰트만은 단순히 이 파루시아를 ‘임재’ 혹은 ‘재림’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미래를 말한다.[각주:16]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저 ‘시간’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질적 변화의 삶을 요구한다.[각주:17]


   그러므로 몰트만이 의도하는 교회공동체는 기독론적인 토대에(예수를 뿌리로), 종말론적인 방향으로(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성령론적으로 현재화된다(교회의 임무).[각주:18] 즉, 교회공동체의 각 개인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으며, 역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메시아적 공동체로,[각주:19] 이 공동체 안에 속한 모든 이는 카리스마적 존재로서 우월이 없이,[각주:20]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제자들이다. 이러한 제자도의 실천은 교회 내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이는 이 세상을 향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는다.[각주:21]


   또한 교회공동체를 한스 큉은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他者)에게 개방하는 자세의 보편성[각주:22]을 가지고, 사도의 정신[각주:23] 즉 그리스도의 뜻과 일에 맞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섬김[각주:24]을 강조하며, 교회공동체는 계급질서가 아닌 섬기는 봉사라고 정의한다.[각주:25]


   정리하자면, 한스 큉은 교회공동체의 핵심을 기존의 교회공동체 틀 안에서 참 교회공동체를 조명하고 있고, 몰트만은 참 교회공동체(메시아적 교회)를 정의하며 기존의 교회공동체 틀을 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몰트만과 한스 큉은 참 교회공동체와 그것을 향한 역사적 교회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함에 있어서, 한스 큉의 견해와 몰트만의 견해는 서로 상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각주:26]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인가?


   교회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스 큉과 몰트만의 견해에서 핵심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역사로서(=아래 머무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로서 교회를 뜻한다. 즉,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며, 교회 자체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체에 사회를 향한 문턱 혹은, 사회에 대한 문턱을 없애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자인 몰트만과,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의 견해에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 가운데 차이는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전통’[각주:27]에 있다. 그 전통이 교회공동체(가시적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우주적 사역’으로서 사회공동체(비가시적 교회)가 있기에, 각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사회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서 ‘교회공동체’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교회공동체’ 사이에 인식범위 차이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진 교회 그 자체로서 교회는 진정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다. 교회공동체와 공동체 안에 속한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코람데오와 마라나타’,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와 미래적 임재’[각주:28],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역사와 사회 가운데 존재할 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참 의인’이라 칭해질 것이며, ‘참 교회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성 없는 교회는 없다.’[각주:29] 본회퍼는 이것에 관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서 교회를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라고 말했다.[각주:30]


   본회퍼는 “각 개인은 타자(他者)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각 개인은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각 개인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타자(他者)가 존재해야 한다.”[각주:31]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해 삶을 살고 죽고 부활 하셨듯, 자신과 공동체를 타자(他者)를 위해 내어줄 때, 진정 각 개인과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공동체성’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고립상태에 있는 개인의 역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 공동체의 역사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을 흡수해버리는 그와 같은 공동체를 원하지 않으시고 여러 인간의 공동체를 원하신다. 공동체와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것이며 서로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집단적인 통일성의 구조와 사회적인 통일성의 구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질적인 것이다.[각주:32]


   이처럼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곧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며, 이는 곧 타자(他者)를 위한 그리스도,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이다.[각주:33] 또한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는 이런 그리스도와 같이 타자(他者)를 위해 행동할 때, 참이 된다.[각주:34]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 그가 온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홀로 은둔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의 원수들 한가운데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치 않고, 벗들 사이에나 있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이여,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했다고 하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각주:35]


   교회공동체는 무엇인가?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사회의 소외된 모든 이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타자(他者)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진다. 교회는 사회에 예수란 빛의 조명이 되고, 사회는 교회의 존재이유와 바라봐야 할 방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태양의 유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기독교 윤리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타종교와 그리스도교가 맞닿아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통해 예수의 빛이 그들에게 전해진다고 말했다.[각주:36] 본회퍼는 이런 바르트를 넘어, 세상 속에 타자로서 삶을 살 때 우리 자신(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은 진정 ‘존재’하며 ‘참’이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타자에 의해서 ‘존재’된다. 마치 예수가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미 교회가 되었듯, 제자들이 도망치려했던 그곳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내어줬을 때 교회공동체가 성립되었듯,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하거나 교회자체 존립만을 위해서는 ‘참’이 될 수 없다. 세상이나 원수 속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자(他者)의 삶을 살 때, 우리를 '위한' 존재는 우리를 위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절대 겸손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각 개인의 삶이자, 사회를 향한 생명과 의와 평화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Dietrich Bonhoeffer,『그리스도론』이종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p. 80. [본문으로]
    2. Hans Küng,『교회』정지련 역 (서울: 한들, 2007), pp. 61-72. 참조. [본문으로]
    3. 이와 관련하여 몰트만은 “그는 인격으로 온 하나님의 나라다.”라고 말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본래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예수를 바라보아야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본래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Jürgen Moltmann,『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이신건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15-16.). [본문으로]
    4.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신학과 목회』20(2003): 171-176; 182-188. [본문으로]
    5. 한스 큉은 패러다임의 정의에 대해 T.S. Kuhn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Chicago 1962)'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본문으로]
    6. Hans Küng,『그리스도교』이종한 역 (칠곡: 분도, 2002), pp. 25-100. 참조. [본문으로]
    7.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이홍근 역 (칠곡: 분도, 1978), pp. 15-45; 한스 큉은 이에 관해 그리스도교와 교회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비밀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온갖 비본질적인 것들을 헤치고 언제나 다시금 힘차게 뚫고나온 역사"라고 말한다(Hans Küng,『그리스도교』p. 969.). [본문으로]
    8. Hans Küng,『교회』pp. 55-140. 참조. [본문으로]
    9.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박봉랑 외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p 80.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40. [본문으로]
    11. 위의 책, pp. 217-218. [본문으로]
    12.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85-93. [본문으로]
    13.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77. [본문으로]
    14.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pp. 140-142. [본문으로]
    15. 마 25:31-46에 나타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가 동일시하였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위의 책, pp. 142-147. 참조.). [본문으로]
    16. 위의 책, pp. 283-285. [본문으로]
    17.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78-179. [본문으로]
    18. 위의 책, 175. [본문으로]
    19.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pp. 317-337. 참조. [본문으로]
    20. 위의 책, p. 21 [본문으로]
    21.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87-188. [본문으로]
    22. 한스 큉은 이것을 ‘보편성’이라고 말한다(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127-137. 참조). [본문으로]
    23. 몰트만의 사도직에 관한 부분과 그 강조점이 다르지만, 교회론적 의미에서는 크게 몰트만과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24. 한스 큉은 이것을 ‘사도성’이라고 말한다(Hans Küng,『교회』pp. 493-514. 참조.) [본문으로]
    25.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153-194.참조. [본문으로]
    26. 물론 교회론에 관한 논리를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몰트만은 역사나 시대적 교회공동체의 전개를 하지 않고, 참 메시아적 교회공동체에 대해 정의하고 있고, 한스 큉은 역사 시대적 교회공동체의 비 본질을 하나씩 벗겨나감으로서 참 교회공동체를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한스 큉과 몰트만은 논리 전개의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교회공동체에 대한 한스 큉과 몰트만의 견해는 아주 많은 부분이 상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7. 몰트만의 경우는 사도직과 성례전, 한스 큉의 경우에는 하나됨 · 보편성 · 거룩성 · 사도성을, 본회퍼의 경우는 성례전과 말씀을 교회 전통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8. 자가 쓴 ‘현재적 임재와 미래적 임재’의 개념은 몰트만의 ‘파루시아’에 대한 이해와 상응한다(Jürgen Moltmann,『예수 그리스도의 길-메시아적 차원의 그리스도론』 김균진 외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435-474. 참조.). [본문으로]
    29. 여기서 공동체성이란,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로의 공동체성(그리스도적 공동체)을 말한다. [본문으로]
    30. 정지련, “디트리히 본회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과 한국교회,”『기독교사상』10(2006): 95-96. [본문으로]
    31.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hg. v. J. v. Sossten, DBW 1,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6) p. 30. 고재길,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37(2010): 129.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2.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hg. v. J. v. Sossten, DBW 1,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6) pp. 50-51. 고재길,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37(2010): 13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3. 유석성.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 사상,"『신학과 선교』 18(1993): 169-195. 참조. [본문으로]
    34. 본회퍼의 이러한 인격개념은 결코 철학적 인격개념이 아니며,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행위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 구별 속에서 신적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김재진. "본회퍼의 계시 현상의 실체적 해석학."『해석학과 토착화: 靑破 김광식 교수 회갑 기념 논총』(서울: 한들, 1999), pp. 173-196. 참조.) [본문으로]
    35. Dietrich Bonhoeffer,『신도의 공동생활』 pp. 19-20. [본문으로]
    36. Paul Knitter,『종교신학입문』유정원 역 (칠곡: 분도, 2007), pp. 54-55. [본문으로]
    Posted by 숑숑숑~

     





       C.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의 신앙삶




      늦봄 문익환이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현장 그 역사 속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목회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 안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신앙삶의 결과이자, 문익환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1] 그가 처음부터 한반도의 현실에 투신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일쑤였다.[각주:2] 하지만 신앙이 그를 세우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목회자로서, 교수로서, 성서번역가로서, 시인으로서 발전해나가며 단순히 교회 안의 목회자라는 틀을 넘어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신앙삶을 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성과 속을 아우르는 신앙삶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장준하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생기고, 10월 4일 그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울대생들의 궐기대회가 있었다. 11월 5일에는 함석헌, 김재준 목사와 김지하 시인 등 15인의 지식인에 의한 시국선언(時局宣言)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2월 24일 장준하는 ‘유신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불과 열흘 만에 40여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박정희는 그 대처로 긴급조치 1호를 시행했고, 체포 1호로 장준하가 체포되었다.[각주:3]


      긴급조치는 폭압의 통치였다. 모든 형태의 파업이 불법임을 선언하며, 1974년 긴급조치 9호는 정권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국가안보의 위반과 다름없는 것을 만들었다. 문익환의 동생이었던 문동환과, 안병무가 정치교수 1호가 되어 1975년 6월 12일자로 문교부의 압력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났고, 얼마 안 되어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등도 실직하게 되었다. 이에 문동환의 주도로 ‘갈릴리 교회’라는 특수한 교회가 만들어졌고, 문익환은 거기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열린 첫날, 장준하가 등산길에 실족사했다는 전화가 왔다.[각주:4]


      그렇게 장준하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늦봄은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조사하게 되고, 단순한 실족사가 아닌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각주:5] 늦봄이 장준하 영결식의 장례위원장을 맡으며 장준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장준하가 말했던 현실의 사회악이 무엇인지 절실히 파악했고 그것에 동의되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해보였다.[각주:6]


      문익환은 장준하가 바라본 한반도의 상황과 사회악에 동의하면서 장준하를 땅에 묻지 않고 역사 속에 살리고자,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사설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고자 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인쇄가 불발되고 늦봄은 그 사회악을 더욱 절실히 느끼며 절망하게 되였다.[각주:7]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3.1절이 가까워져 오는 즈음에, 장준하를 생각하며 책상에 둔 ‘씨의 소리‘을 보게 되었고, 그 안에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장준하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것에 공감하여 하룻밤 만에 문건을 만들게 된 것이 바로 ’3.1 민주구국선언문(民主救國宣言)‘이었다.[각주:8]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각주:9]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4. 유신정권은 퇴진해야 한다.[각주:10]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 3.1절 기념 미사를 드린 자리에서 3.1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었고, 문익환 목사는 그렇게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각주:11] 당시 이 일을 정부는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규정하고, 가담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하였다.[각주:12]


      이렇게 해서 시작되고 계속된 늦봄 문익환의 민주운동은 말 그대로 민(民)이 주(主)가 되는 의식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었다. 당시 장준하의 죽음 이전에 박정희정권은 베트남의 통일을 ‘월남 패망’이라는 용어로 민중운동을 탄압하는 선전으로 사용하며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이어갔는데, 그것은 그나마 전태일 열사가 지펴 올린 민주에 대한 불씨조차 꺼트릴 위기였다.


      민이 하나가 된다면 세계 최강의 힘을 가진 외세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으며,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전 민족의 뜻을 하나로 모은 영웅이었다, 자유주의가 독재를 하면 분단된 사회의 민중은 공산주의를 선택해서라도 국민통합의 길을 가게 된다![각주:13]


      이렇게 문익환 목사는 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교회의 설교나, 수필, 문인들과 동생들(문동환과 인권운동가들)과의 대화에서도, 옥중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거듭 강조하곤 했다.


      월남전의 종식이 나에게 준 충격이 어떤 것이었느냐? 그건 이런 것이었죠. 이 땅에서 이대로 독재가 계속되어 민주화의 가망이 없다는 것이 우리 겨레의 확신이 되면, 우리 겨레도 월남 민중과 같은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두 독재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면 우리 겨레도 어쩔 수 없이 월남 민중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구나. 이 같은 예감에 나는 몸서리쳐지는 걸 느꼈던 거죠.[각주:14]


      이러한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민중이 이념을 넘어서 국민통합을 열망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바로 ‘민주(民主)’라고 생각했다. 즉, 민(民)이 하나가 되고 주인(主)이 된다면 어떠한 거대한 힘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만약 독재로 인해 민주화의 가망이 사라지게 되면, 원하지 않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민(民)이 주(主)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즉, 그는 이데올로기나 독재 같은 것을 넘어선 민족의 통합과 민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구심점이 되는 인물인 장준하가 죽는 위기에 놓이자,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를 대신하여 민족의 열망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1976년 갈릴리교회에서 있었던 새해설교[각주:15]의 일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온 누리가 맡겨집니다. 하느님 대신으로 이 세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영광이죠. 이를테면 하느님의 창조대업이 서느냐 무너지느냐 하는 막중한 책임이 사람의 어깨에 메어졌다는 말입니다. 책임이죠.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 영광스러우면서도 막중한 책임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누리를 하느님 대신 책임진다니, 무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창조의 핵심인 생명을 짓바수지 않고 아끼는 일이죠. 생명을 짓밟지 않고 떠받드는 일이죠. 생명을 멸시하지 않고 찬양하는 일이죠. 생명을 깎아 내리지 않고 북돋우는 일이죠. 생명을 죽이지 않고 싱싱하게 키우고 꽃피우는 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일이죠.[각주:16]


      즉, ‘하나님의 창조대업에 대한 사람의 책임성은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이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으로서 민주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인 한반도의 ‘생명 바그라짐’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행동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다시 살펴보면, ‘민족통일의 기회는 남과 북의 정치가들의 자세 여하로 다가올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고 했고, 또한 통일된 나라를 위한 정책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강조했는데,[각주:17] 이러한 강조는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이 멸시당하지 않고 풍성케 함에 대한 사회적 표현이자,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늦봄 문익환 목사는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을 달리보지 않고,[각주:18] 이것들을 한반도의 민중이 원하는 궁극적 실현이며, 한반도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이라 이해했다.


      사실 당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관하여, 일부 민주운동가들은 먼저 민주화가 되어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선민주 후통일(先民主 後統一)을 주장했고, 반면 보다 급진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통일이 되어야 민주화도 가능하다는 선통일 후민주(先統一 後民主)를 주장했는데,[각주:19] 문익환 그에게 있어서 민주운동이나 통일운동은 어느 것 자체가 절대적이진 않았다고 할 수 있다.[각주:20]


      늦봄 문익환에게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은 모두 한반도공동체성을 바르게 돌려놓는 작업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신앙삶의 고민이었고, 생명(生命) 즉 ’지상의 삶이 죽음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에 대한 책임성‘이었으므로 그는 이것을 향해 투신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익환의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은 생명과 평화운동[각주:21]으로, ‘종교성’이란 틀에 가두지 않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삶의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커다란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우리 겨레는 검은 리본을 쓰고 탈색된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분통이 다 터졌는데 ‘무슨 파’니 ‘무슨 그룹’이니 하고 우리에게 씌워지는 검은 리본이 감긴 틀이 어찌나 그리 많은지! 우리에게는 터뜨릴 분통마저 남아있지 않다. … 우리 다 이 틀에서 걸어 나가야한다. 모세가 왕궁에서 걸어 나갔듯이! 아모스가 양을 몰고 들로 나갔듯이! 세례요한이 광야로, 예수가 인간사회 속으로 걸어 나갔듯이! 사울이 헤롯의 성전에서 걸어 나갔듯이! 루터가 수도원에서 걸어 나갔듯이![각주:22]


      문익환 목사는 그렇게 선지자들이 그러했듯, 세례요한과 사울과 루터가 그러했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 그 시대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해, 근현대사에서 어지럽게 억눌리고 잃어버린 한반도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해 걸어 나갔다.


      그런 그에게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그의 행동의 적극적 전환의 계기가 있었는데,[각주:23] 바로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주제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다, 눈앞에 학생회관 옥상에서 원예과 1년 이동수 군(23)의 투신을 목격했던 것이다.[각주:24] 문익환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부는 문익환 목사를 이동수의 분신을 선동한 배후조종자로 지명수배 했고, 그는 다음날 계명대학교 강의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자진출두하게 되었다.


      통일운동은 내 생의 핵심이 되었다. 자나 깨나 통일이 생의 전부나 다름없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민족 제단에 바치는 걸 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일성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가슴을 두드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각주:25]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는 분단의 장벽, 깊어만 가는 불신의 심연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민족의 제단에 초개처럼 버리는 걸 보면서, 이 젊은이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라는 사람이 무언가 이 장벽을 깨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휘말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각주:26]


      이 민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도시민과 농민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자로 등등 사회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보아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주종관계를 일소하는 일을 민주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지배자-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는 민족을 통일하는 일입니다.[각주:27]


      늦봄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그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분단된 국토와 이념, 그 가운데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며, 이 모든 한반도 근현대사의 엉킨 첫 단추를 다시 제대로 잠그는 일이었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중 일부분)[각주:28]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풀어버리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사십사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고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문익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 일부분)[각주:29]


      이 시처럼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 갔다. 아무도 갈 수 없다던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두 번에 걸쳐 회담하고 북조선 조국통일위원회와의 공동 명의로 ‘평화통일원칙 9개항’을 발표했고,[각주:30] 돌아와 그는 체포되었고, 구속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해 온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여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여섯 번째 항에 포함시킨다. 이후 이 4.2 공동선언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0년부터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교류 협력사업,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한민족이 가져야 한다는 햇볕정책으로 실현되었고, 6.15 공동선언의 기초가 되었다.[각주:31]


      민주통일운동가이자, 목회자였던 문익환이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1993년 3월 26일 통일신학동지회가 주최한 모임에서 그는 ‘통일신학’에 대해 강연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민주통일운동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말했다. 그는 먼저 한국기독교와 기독교인을 평가하면서 ‘한국 기독교인은 이 민족의 역사에서 아주 탈락할 것‘을 예상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한 눈으로는 하늘나라, 한 눈으로는 세상나라, 이 둘을 보고 있기에 다들 사팔뜨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즉, ’성과 속을 구분하지 말고 이원론적인 것을 극복해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런 이원론적인 삶을 해소하고 화해시키며, ’마음의 평화 뿐 아니라, 땅의 평화‘를 말하는 ’예수의 평화를 통일‘로 보았다. 즉, 평화는 생명사랑운동이며, 그럼으로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 주장하며,[각주:32] ‘남쪽과 북쪽마다 좋은 것을 인정하고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말했다.[각주:33]


      그는 어느 날 양 떼를 따라 시내산 기슭을 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그리로 여러번 지나다녔을 것입니다. 그곳은 결코 거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대상도, 강도떼도, 목자도, 먹을 것을 주우러 다니는 부인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다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는 똥오줌을 싸는 양 떼를 아무 두려움 없이 그리로 몰고 지나갔던 것입니다. 그의 몸에는 때 묻은 더러운 옷이 그대로 걸쳐져 있었고, 그의 발에는 더러운 신이 그대로 신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경내로 들어가는 차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상 입는 옷을 입고, 일상 가진 마음가짐으로 자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거룩하지도 않은 속된 땅에서 모세는 홀연히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 종교적인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사회는 속된 것이라는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모든 장소가,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각주:34]


      이렇게 목회자이자 민주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의 삶을 요약하자면,


      첫째,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철저한 신앙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민주통일운동은 ‘민족과 한반도에 대한 종교적 섬김’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목회를 떠나 민주와 통일이라는 사회적 운동에 미쳐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에게 신앙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이 없었다면,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의 삶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에서 사회로’를 외치고 고민했고, 민주통일운동가로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외치고 고민했던 신앙삶이었다 말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자신이 고민했던 신앙삶을 삶으로 나타낸 이였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은 말로 되는 것도 아니요, 통일을 원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세의 변화입니다. … 당신들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을 할 것이면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답해야 합니다. … 이 물음은 사실 7천만 겨레가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정말 통일을 원하는가?[각주:35]

      늦봄은 그저 말로만 통일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민주와 통일에 대한 꿈만 꾸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한반도의 평화가 현실이 되도록 행동했다. 문익환 목사에게 있어서 통일이란 단순히 철책선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 근대사 속의 모든 고통을 없애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실천이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다 죽어간 이들의 ’부활’이었다.[각주:36]


      셋째, 그의 행동했던 신앙삶은 한반도공동체성 회복과, 한국 교회공동체성 회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어느 한편을 이롭게 하고 한편을 불리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말이 무엇이겠느냐는 걸 찾아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각주:37]

      이처럼 그가 바랐던 것은 이 혼란하고 복잡했던 그리고 고통 받고 상실되었던 한반도 공동체성의 회복이었다. 한반도의 온갖 ‘생명 바그라짐’을 ‘생명 아우러짐’으로 돌려놓길 원했고, 어떤 특정한 세력의 힘에 의한 불완전한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 바꾸길 원했다. 그것은 단순히 혼란스럽던 한반도공동체성의 회복만이 아니였다. 한반도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한국교회사의 문제이며, 한국교회 공동체성의 회복이기도 했다.[각주:38]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았던 늦봄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공동체에게는 ‘종교적 섬김’을, 한국교회 공동체에게는 ‘사회적 섬김’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한국교회 대다수는 문익환 목사의 우려에서 나온 섬김의 삶을 잊은 채 역사와 공동체성을 등한시했고, 도리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은 이들에게 문익환 목사의 신앙삶은 ‘예수의 사랑과 삶’으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각주:39]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목회자로서 문익환의 신앙삶에 있어서 그의 끊임없는 고민이었던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인이 됨으로서 목회자란 틀을 벗어나게 되고, 전태일 열사로 인해 사회로 가까워지고, 절친했던 장준하의 죽음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민주통일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일본에서 강제징병에 학병을 피해 북간도로 돌아가게 되면서 그는 윤동주와 송몽규를 잃고 아파했으며, 광복 후 전쟁전의 혼란기에서 그는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서 조국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고, 장준하의 죽음을 통해서 장준하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적 상황에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을 아파하며 그의 대타라고 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된다(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의 형성과 성격", 『한국기독교와 역사』 27(2007): 176-177. ; 김형수,『문익환평전』pp. 431-441.). 또한, 복음동지회 친구들과 ‘조언하기 게임’을 할 때, 전택부가 말하길 “야인이 되소서. 험하게 놀기도 하시고..”라고 정확히 정곡을 찌른 촌철살인적 말을 듣기도 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359.). [본문으로]
    3. 위의 책, pp. 420-421. [본문으로]
    4. 위의 책, p. 422. [본문으로]
    5. 위의 책, p. 430. [본문으로]
    6. “조사(弔詞)를 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문익환 목사였다. 기자로서 이런저런 현장을 많이 보고 섬뜩한 일도 겪어보았지만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괴수를 향해 그렇게 직격탄을 날리는 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 얼굴과 목소리는 기독교회관 강당 뒷자리의 그 부드럽고 유순한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김종철,『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서울: 개마고원, 1999) 참조) [본문으로]
    7. 이와 관련하여 문익환 목사는 “1976년을 맞이한 나는 온 겨레와 함께 암담하기만 했었죠. 장준하는 죽고 말았고, 동아일보 광고란에서 불타오르던 민의 민주 열망도 동아일보 사주 측의 배신으로 사그러들었고, 언론자유를 수호하려던 기자들은 쫓겨나고 학원마저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버렸고, 그러나 내게는 성서번역이라는 나의 생을 건 일이 있어서 그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암담한 오늘의 역사를 잊으려고 했던 거죠.”라고 말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435-439.). [본문으로]
    8. 장준하의 의문사를 접하고 문익환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장준하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정으로 쓰려고 현상한 사진을 한 장 더 빼어 모셔둔 것으로 늦봄은 사진을 보면 마치 산 사람에게 이야기 하듯 말을 걸곤 하였다. 2월 어느 날, 문익환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살아있다면 이번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 때 ‘내가 하는 걸 형은 왜 하지 못해?’라는 장준하의 음성을 들었다(위의 책, pp. 440-441.). [본문으로]
    9.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이태영, 이우정,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 등이 서명했으나, 실제 작성자인 문익환은 번역의 이유로 명단에서 빠져있다. 하지만 스스로 작성했음을 시인하여 함께 재판을 받게 된다. 이 구국선언문 재판은 일명 ‘민주교실’로 불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피고들의 구성이 전직 대통령, 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인물, 전 외무장관, 한국의 사상가, 야당의 거물, 기독교계 장로, 신구양 교회의 지도자들, 대학교수, 거기다 여성운동가와 변호사들까지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민주교실’ 에피소드로는 함석헌 선생이 상복을 입고 재판정에 등장하자, 사람들이 놀라 물으니 “민주주의가 죽었어.”라고 한 에피소드부터, 김대중씨의 정치, 경제, 외교,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논리적 해박함과 달변에 검찰 측은 쩔쩔 매었고 함석헌 선생이 그 모습을 보며 “진짜 대통령은 여기 있다.”고 했던 에피소드와, 피고 신문 중에 서로 더 잘 안다고 발표하듯 손들고 답하겠다고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본문으로]
    10. ‘3.1민주구국선언문’의 요약한 4개 항 중 1번부터 3번은 ’3.1민주구국선언문‘ 내용의 각 항목이며, 요약 4번째 항인 “유신정권은 퇴진해야 한다.”는 민주구국선언문 전체에 걸쳐 의미되고 있는 부분이다(문익환, “민주구국선언,”『문익환 전집 제 3권 - 통일 1』(서울: 사계절, 1999), pp. 13-18. 참조.). [본문으로]
    11. 구속을 각오한 서명을 받으면서 “너도 끼워줄까? 안 끼워주면 나중에 섭섭해 할 텐데..”라며 흥겨운 놀이를 권하듯 하였다. 그의 이런 낙천성은 사소한 생각과 노선의 차이를 넘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저항의 민중운동을 흥겹고 희망찬 싸움으로 만들어 가면서, 문익환 목사는 간디의 말을 빌어 “신랑이 신부 방에 들듯이!”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찾았다. [본문으로]
    12. 김응교, "고마운 사람, 문익환 목사", 『복음과 상황』 6(2004): 12. [본문으로]
    13. 김형수,『문익환평전』p. 437. [본문으로]
    14. 위의 책, pp. 437-438. [본문으로]
    15. 본 설교는 1975년 8월 17일 장준하의 죽음과,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 사이의 설교이다. [본문으로]
    16. 문익환, “빛이 있었다면,“ 『문익환 전집 제12권 - 설교』(서울: 사계절, 1999), p. 178. [본문으로]
    17. 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의 형성과 성격”, 185. [본문으로]
    18.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한다. 민주회복 이외에 우리가 바라는 통일에 이르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은 둘이 아니다.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회복이 곧 통일이다. 민주회복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통일에 이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인 것이다.”(문익환, “같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인가,“ 『문익환 전집 제4권 - 통일 2』(서울: 사계절, 1999), p. 203.) [본문으로]
    19. 당시 기독교계 민주화와 통일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아래의 논문과 책을 참조바람(김흥수,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역사에 대한 재검토”,『신학과 현장』1(1991): 253-278 ; 정성한,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 pp. 235-372.). [본문으로]
    20. 문익환 목사는 이러한 선민주 후통일 혹은, 선통일 후민주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분리해서 선후관계로 규정하기보다, 서로 결합하고 병행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말했다. 즉, 남한사회와 민주화를 추구하는 민주화운동은 통일에 유리한 조건을 여는 것이고, 반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은 안보논리를 바탕으로 독재를 강화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민주화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의 형성과 성격", 186.). [본문으로]
    21. 문익환 목사의 세 번째 감옥생활(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에서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은 모두 평화운동이라고 깨달았다. 당시 그는 나라는 분단되고,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이라는 4강의 이권각축장이 되어버려서 초강대국들의 긴장고조는 한반도 국민들의 뜻과 상관없이 전쟁을 일으킬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익환은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화약고이기 때문에 이의 극복은 우리의 민족적인 관심사인 동시에 세계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나라가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화약고의 구실을 하느냐, 세계평화의 열쇠가 되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서 벌이는 운동”이라 말했다(문익환, “7.4 공동성명 이후의 민족문제”,『취영 홍남순 선생 고희기념논총』(서울: 형성사, 1983), p. 90.). [본문으로]
    22. 김형수,『문익환평전』p. 622. [본문으로]
    23. 물론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다르게 보지 않고 하나로 보았다. 다만,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항쟁을 지나면서 민주화운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위의 책, p. 683.). 또한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문익환은 “그들은 결코 나라를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최고도 아니요. 나라에 대한 충성이 우리의 마지막 충성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명령이면, 누구나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라고 하는 무인격적인 힘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즉, 광주시민들을 보며 나라를 넘어 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은 이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위의 책, pp. 606-620.). [본문으로]
    24. 이 날 늦봄이 집을 나설 때 어머니 김신묵이 아들을 불러 세워 놓고, 대학생들의 분신죽음을 걱정하며 죽기보다 살아서 싸우길 부탁했다. 문익환은 강연에 앞서 어머니의 부탁의 말을 하려던 찰나 이 일이 벌어졌다(위의 책, p. 631.). 그것이 생애 가장 큰 충격이라고 문익환은 말했다(위의 책, p. 637.). [본문으로]
    25. 문익환,『걸어서라도 갈테야』(서울: 실천문학사, 1990), pp. 25-26. [본문으로]
    26. 문익환, “상고이유서,”『문익환 전집 제5권 - 통일 3』(서울: 사계절, 1999), p. 94. [본문으로]
    27. 위의 책, p. 92. [본문으로]
    28.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pp. 152-154. [본문으로]
    29. 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문익환 전집 제1권 - 시집 1』pp. 13-16. [본문으로]
    30.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p. 200. [본문으로]
    31.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97-99. [본문으로]
    32.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는 부분은 장준하의 통일에 관한 주장을 문익환이 강력히 동의한 것이다. 『씨의 소리』 1972년 9월호서 장준하는 “민족적 양심 앞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가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것 이상의 명제는 없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런 대원칙 아래서 굳어진 논리, 고집스러운 자세를 고쳐가야 한다. 근본과 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앞선 당위이며, 가치며, 무엇이 거기에 따르는 것인가를 가려야 한다. 모든 통일이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의 명령은 없다.”(김형수, 『문익환평전』 p. 427.) [본문으로]
    33. 문익환, “통일신학에 대하여,“ 『문익환 전집 제11권 - 신학 2』(서울: 사계절, 1999) pp. 371-386. 참조. [본문으로]
    34. 문익환, “거룩한 땅,“ 『문익환 전집 제12권 - 설교』(서울: 사계절, 1999), pp. 297-298. [본문으로]
    35. 문익환, “상고이유서,”『문익환 전집 제5권 - 통일 3』p. 245; 249; 261. [본문으로]
    36. 정경호,"분단된 한반도의 신앙인들이 이해해야만 할 “난장이 그리스도” -지구촌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향햐여-", 『신학과 목회』 19(2003): 211-212. 평양 봉수교회 예배 후 그에게 부활은 각별한 의미로 “민주는 민중이 되살아나는 일이요, 통일은 민족이 되살아나는 일이다“라고 믿었다. ”민족통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일만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통일운동은 부활신앙을 역사 속에서 사는 일입니다”라고 말한 후 ‘거리의 부활’(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이란 노래를 불렀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713-714). [본문으로]
    37. 위의 책, p. 712. [본문으로]
    38. 정경호,"분단된 한반도의 신앙인들이 이해해야만 할 “난장이 그리스도” -지구촌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향햐여-", 197-213. [본문으로]
    39. 2010년 현재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북녘형제들을 선교의 대상이외로는 잘 이해하지 않는다. 그 근거로 한상렬 목사의 방북이후 개신교의 그에 대한 비판이 이를 입증한다. 문익환의 죽음에 교회보다, 사회가 더 아파했다. 그가 19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그의 상여를 들겠다고 나선 이들은 다름 아닌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 소속의 해고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 아닌 거짓을 꾸짖던 문익환 목사는 마침내 전태일들의 손으로 운구되어 떠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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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목회자 문익환의 신앙삶



       문익환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조상들이 겪었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육진문화(六鎭文化)의 분위기에, 문익환 자신이 태어나 배우고 자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모습들, 또한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기독신앙 그리고 명동촌의 영향이 늦봄 문익환의 신앙삶을 만들었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가 목회자가 된 이유는 그 주변에 그에게 영향을 준 모든 이들이 참 애국자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며 목회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회와 교회를 달리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각주:1]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에 올바르게 나아가는 길이라 꿈꾸었던 선생이라는 길이 허무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느꼈을 때, 그가 목회자라는 길을 선택한 데에는 그의 신앙과 그 공동체적인 환경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각주: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된 문익환이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시대정국(1947-49년)을 꿰뚫어볼 혜안(慧眼)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두고 홀연히 도미하였다.[각주:3] 유학 중 전쟁이 터지면서, 그가 유엔 극동사령부에서 정전회담 통역을 자원하게 되고,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참상과 정치적 기득권들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전환을 하게 된다.

       문익환 목사가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갔을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각주:4] 그는 묵시문학을 통해, 구약역사를 통해 히브리인들에게서 한반도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했다.[각주:5]

       당시 한국기독교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는 전쟁의 여파로 가정이 파괴되고 수많은 이가 죽어가는 고통의 현실 속에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물질적 축복과 위로를 받고자 하는 기복신앙과 신비주의신앙의 흐름이 그 첫 번째 였고,[각주:6] 또 다른 하나는 전쟁을 통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한 기독교인들과 북측 정권의 탄압을 피해 대거 남하한 기독교세력들이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반공을 외치면서도 다른 사회문제에는 이상하게도 기형적으로 무관심한 흐름이 있었다.[각주:7] 이런 상황 속에서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공동체의 현실을 고민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고민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문익환 목사는 한빛교회를 맡아 목회하면서, 한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구약강의를 나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잃은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 어린 제자들을 짧은 시간 내에 바른 목회자, 바른 교회지도자로 길러내고자 시간엄수, 책임감, 올바른 글쓰기, 말하기 등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학생에게 그는 융통성 없고 인기 없는 교수로 심지어 그의 히브리어수업이 기피되는 현상까지 생겨나기도 했다.[각주:8] 문익환 목사의 이런 융통성없는 엄격한 가르침은 아마도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변해가는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한반도공동체와 한국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였고, 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의 강의와 함께 문익환 목사는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저작활동 연혁을 보면 1955-56년까지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각주:9] 또한 1958-59년까지 기독교사상에 매월 글을 기고하면서 예레미야에 대해 글을 적었는데,[각주:10] 이것으로 비추어보자면 문익환은 세상 사회구조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61년의 기고글들을 보면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 ‘한국 크리스천의 신앙형태’, ‘연세대학교 분규를 슬퍼한다’, ‘섬기는 주로서의 그리스도 고난의 종’ 등 직접적인 사회현상과 구조악에 대한 비판과 느낌이 주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각주:11]

       1964년 문익환 목사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번역했는데, ‘신도의 공동생활’ 옮긴이의 말에서 문익환은 자신이 본회퍼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은 ‘신학보다는 그 같은 생애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너무 어려운 가운데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 신앙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이’ 문익환 자신에게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노라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관심은 본회퍼의 신학에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의 저서들을 읽고 그의 신학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며 '신도의 공동생활‘을 번역하고 출판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각주:12]

       문익환은 본회퍼를 평가하면서 자신이 몇 년간 예레미야에 대한 글을 기고했듯, ‘사랑하는 조국이 망할 것을 하나님 때문에 원하여 민족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의 후배’로 평했다.[각주:13]

       또한 자신이 번역한 ‘신도의 공동생활’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작은 책은 세속 세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고 있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벌써 그리스도인은 세속 세계 속에 뿌려진 씨라고 말한다. 말씀 아래서 성립되고 생명을 보존하고 움직이며 사명을 다하는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하겠다. 교회를 사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이미 비종교적이요 세속적인 이해가 아니겠는가?”[각주:14]


       이렇게 문 목사의 당시 글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한국전쟁 이후 자신의 신앙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한반도공동체를 달리보지 않고, 하나로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신앙인으로 한반도공동체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저작활동 외에도 문익환 목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서번역이었다. 복음동지회[각주:15]에서 시작되었던 성서번역이 빛을 발하면서 문익환은 1968년 4월, 신·구교 성서공동번역의 책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공식직함은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위원장’이었다. 그는 이 일에 부름을 받은 것을 “영광이라기보다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축복이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각주:16]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통해 겨레의 정신이 깨어났고, 민중과 여성계의 문맹이 퇴치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나라를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음을 주목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권위만큼 과거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의 권위가 반영되어왔고, 그러다보니 성서를 해석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부패했었다. 그 불합리한 권위체계를 파괴한 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이었다. 1521년 루터는 단호하게,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서 성서 자체로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이양했다. 독일어로 루터가 성서를 번역함으로 인해 기존의 라틴어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했던, 그리고 그 권위에 눌려있던 사람들에게 성서를 다시금 돌려줬고, 성서는 성서로서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음을 문익환은 주목했다.[각주:17]

       이처럼 문익환은 1960년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모두를 성서의 번역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의 일을 통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첫째 신교와 구교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험이고, 둘째 신학적인 편견이 걷히는 경험이며, 셋째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무는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각주:18]

       그는 가톨릭 측 번역자인 선종완 신부와 상의하여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란 원칙을 정했다.[각주:19] 이 말은 교회 내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지고 교회 밖으로 나아감을, 또한 교회 바깥에서는 더 이상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번역이 아닌 모두가 이해되는 번역을 말하는 것이었다.[각주:20]

       이렇게 시작된 성서번역작업에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고민하며 부딪치기 시작했다.[각주:21]


       “문학작품 중의 문학작품이라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훌륭한 작품으로 옮겨내는냐는 생각이 처음부터 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소. ‘특히 그 시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는 한국시단을 총동원할 심산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더군요.”[각주:22]


       그는 처음에는 직접 번역한 시를 가지고 시인들을 찾아다녔고, 결국에는 그 스스로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공부했고,[각주:23] 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그토록 부끄러웠던[각주:24] 시인이 되었다. 문익환은 목사에서 시인이 되면서, 더 이상 목회자란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시인들의 자유로운 습성을 따라 고민과 삶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파격적인 삶으로서의 전환에 대한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70년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한 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각주:25]


    (문익환 시 ‘전태일’ 중 일부분)


       문익환은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그의 정신을 움직였고, 그 다음은 전태일이 그의 육신을 움직였다. 청년은 죽었지만, 그 청년이 민중의 삶 속에서 부활했음을 문익환은 깨달았다. 그 또한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부활시킬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1970년 그는 번역작업에 매달리겠다고 한빛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번역작업을 위해 고민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필요로 하고 부르는 곳에는 어디든 달려갔다.[각주:26]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늦봄 문익환이 자신이 그토록 고민했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익환은 1973년 6월 1일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발행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아호인 ‘늦봄’을 썼다. 그 시집의 발행일이 6월 1일 그의 55번째 생일인 것을 보면 그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각주:27] 시집을 내기 시작하면서 시인이 되어 시를 통해 세상을 이야기하고 이해했고, 그것은 삶이 되어 돌아왔다.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 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째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가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살일 겁니다[각주:28]


    (문익환 시 ‘난 발바닥으로’ 전문)


       이처럼 늦봄 문익환이 역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투신한 것은 단순히 절친한 장준하의 죽음에서 폭발한 단순한 혈기가 아닌, 아주 오랜 시간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라는 문익환의 신앙삶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은 단순히 종교라는 틀로 국한된 삶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한반도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목회자로서 문익환의 신앙삶은 북간도의 그의 공동체가 그를 신앙인에서 목회자로 이끌었던 것으로 시작하여, 전쟁의 참상(慘狀)과 이기(利己)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한반도공동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 직접적인 삶의 행동으로 한반도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교수로서 엄격하게 가르쳤다. 또한 글을 통해 자신의 그 실질적 고민들을 분출하고 나누고 드러냈으며, 성서번역을 통해 일그러진 한국교회와 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꿈꾸었고, 번역 중에 부딪힌 시를 통해 시인이 되어 목회자라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성과 속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는 문익환이 되었으며,[각주:29] 사회의 전태일 사건을 통해 목회자 문익환이라는 종교적 틀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예수를 따르는 신앙삶으로서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형수,『문익환평전』pp. 193-194. [본문으로]
    2. 명동촌의 신앙을 가진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김약연 목사, 이동휘 선생, 정재면 목사, 한준명 선생, 아버지였던 문재린 목사, 삼촌이었던 이권찬 목사 등 문익환의 공동체적 환경은 그리스도인 즉, 바른 삶(애국)을 살아가는(예수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공동체적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3. 그는 이와 관련하여 방북재판 상고이유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유학감으로서 또다시 사회주의와 대결하지않고 후퇴를 하는 겁니다”(문익환,『문익환 전집 제 5권 - 통일 3』 (서울: 사계절, 1999), pp.88-89.) 또한, 문익환은 유학당시 아내였던 박용길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떠났다(김형수,『문익환평전』p. 818.). [본문으로]
    4. 위의 책, p. 325. [본문으로]
    5. 1963년 12월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전쟁 때문에 학업이 중단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루터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한국인의 기독교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냐는 문제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문익환, "내가 영향 받은 신학자와 그의 저서,"『문익환 전집 제 10권 - 신학 1』(서울: 사계절, 1999), p. 256). [본문으로]
    6.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pp. 614-619. [본문으로]
    7. 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pp. 171-173. [본문으로]
    8. 그 당시 문익환 목사의 별명은 “문이 꽝!”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구약이나 히브리어과목 때문에 낙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성적을 잘 받기 어려웠다. 또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묵과하지 못하는 엄격성 때문에 제자들의 문익환 교수에 대한 불평과 항의가 많았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329-332; 336 참조.). [본문으로]
    9. 1955년 - 4월 세상의 소금, 12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1956년 - 1월 하나와 아흔아홉; 엘리야의 기도와 바알선지자들의 기도;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2월 감사하는 사람, 3월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손님, 4월 오늘이라는 이날; 노아홍수의 교훈, 5월 무엇이 위기인가; 참 지도자, 6월 알지못하고 구하는 기도; 주의 제자들; 가지는 믿음과 주어지는 믿음, 7월 감사하는길, 8월 먼저 구할 것, 9월 그리스도인은 남다른가, 10월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11월 개인의 중요성;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서; 슬픔을 아는 사람, 12월 따뜻한 사람; 불가피한 생. [본문으로]
    10. 예레미야의 인물과 시대, 예레미야의 소명,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 예레미야의 슬픔 등. [본문으로]
    11. “기독교는 곧 아편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중독증에 걸려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문익환,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문익환 전집 제 6권 - 수필』(서울: 사계절, 1999), pp. 16-18.) 문익환 목사가 이와 같은 글을 적은 내면을 알기 위해서 당시 4.19혁명에 대한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의 인식들을 찾아보면, 첫째, 마산학생들의 부정선거에 대한 데모를 공산당 취급하여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서울에서 백리밖에 안되는 땅에 있는 공산당이 어떤 짓을 할지몰라 불안’해하는 내용의 1960년 4월 25일 기독공보 머릿기사가 실렸고, 또한 같은 해 5월 9일자 사설에는 학생들의 데모가 ‘빨갱이들의 조종’으로 몰고 가 반공이라는 이름 밑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함으로써 오히려 북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 ‘반공단체’들을 ‘깡패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족했고 편협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1960년 4월 22일 NCC의 ‘이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건의문’에 의하면,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과된 사명이 기독교적 국가건설과 공산세력에 대결할 중대한 책무임을 확인하고, 3.15선거가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며 이로 인해 발생한 4.19는 경찰의 지나친 억압과 살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중대 사태에 대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공산주의와 싸울 민주주의 기반을 상실시켰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은 이데올로기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pp. 183-188.). [본문으로]
    12. Dietrich Bonhoeffer,『신도의 공동생활』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4), p. 9. [본문으로]
    13. 위의 책, p. 7. [본문으로]
    14. 위의 책, p. 11. [본문으로]
    15. 복음동지회는 장윤천, 장준하, 전경연, 김덕준, 홍태헌, 백이언, 김정준, 전택완, 이호운, 윤성범, 이병섭, 유동식, 유재선, 서남동, 박대선, 김용옥, 이재면, 고영춘, 김찬국, 조선출, 이여진, 박창환, 김하태, 이장식, 문희상, 지원용 등 각 교파 신학교의 중견신학자들이 망라된 단체로, 다달이 월례회와 회보 발행을 하면서도 회칙도 회장도 없는 자원봉사단 체제로 운영되었고, 1956년부터는 ‘임마누엘신학강좌’를 열었고, 1957년부터는 성서 번역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338.). [본문으로]
    16. 위의 책, p. 375. [본문으로]
    17. 당시 한국기독교는 교단분열과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양적 부흥은 되고 있었으나, 목회자들은 사회상황에 휘둘리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가졌었다. 그 가운데 피해와 아픔을 가지는 것은 순진한 성도들이었다. [본문으로]
    18. 위의 책, p. 375. [본문으로]
    19. 문익환,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문익환 전집 제 6권 - 수필』 pp. 300-307. 참조. [본문으로]
    20. 문익환은 이와 관련하여 실 예를 들고 있는데, “나는 얼마 전에 한 청년을 만나 이야기한 일이 있다. 그는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대뜸 “크리스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워놓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쳤더니, 잠언 25장에서는 “피인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은 것 같으니라”가 되어 있는데, 로마서 12자에서는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놓으리라”가 되어 있다. 이러니 그런 인상을 받을 수밖에. 공동번역에서는 “그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워주는 셈이 된다.”로 되어있다. '머리'가 '얼굴'이 되고 '숯불'이 '모닥불'이 되고 '셈이 된다.'는 말이 붙음으로 해서 원수에게 보복한다는 뜻은 사라지고 원수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으로 잘 나타내게 되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381-382.) [본문으로]
    21.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89. [본문으로]
    22. 형수,『문익환평전』p. 388. [본문으로]
    23. 한국 시를 탐독하기 시작, 서가에는 ‘현대시학’ 3호부터 꽂혀있음(위의 책, p. 822.). [본문으로]
    24. 어릴 적 윤동주로부터 자신이 지은 시를 보여주고 부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이현주 목사(동화작가)는 ‘아하, 목사님은 일찍이 윤 시인으로 말미암아 시를 알게 되셨으면서도 그로 말미암아 시를 두려워하시는 구나’라고 말했다(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89-90.). [본문으로]
    25. 문익환, “전태일,”『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서울: 사계절, 1999), pp. 247-250. [본문으로]
    26. 김형수,『문익환평전』pp. 401-403. [본문으로]
    27. 그의 인생을 보노라면, 그가 처음부터 특별했거나 천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심했고 유했으며 늘 고민했다. 그랬기에 윤동주와 송몽규를 보내며 아파했고, 역사에 투신하기 전까지 이데올로기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전쟁의 참상에 절망했고, 시대 앞에 침묵했었다. 그는 늦봄이 되기까지 보통의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본문으로]
    28. 문익환, “전태일,”『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p. 215. [본문으로]
    29. 문익환, “룻의 이삭주이,”『문익환 전집 제 10권 - 신학 1』(서울: 사계절, 1999), p. 52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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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문익환 목사의 삶



    A. 늦봄 문익환의 생애



       늦봄 문익환은 1918년 6월1일 과거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베인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1985년 작고)과 어머니 김신묵(1990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문익환목사 집안은 전남 나주 남평 문씨로, 1894년 문익환 목사의 선대가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다 실패하여 함경도로 도피하였다. 도피하게 된 이 지역은 세종 때 윤관이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던 두만강 이남으로 조선시대에 학식이 높아도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학자들은 출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학풍의 ‘육진문화(六鎭文化)’가 넘치던 곳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고조부인 문병규는 두민(頭民)을 지냈는데, 특히 김약연이라는 젊은이를 아꼈고, 동학의 실패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먼저 북간도로 떠난 윤하현(윤동주의 조부)과 연락하여 김약연이 주축이 되어 장소를 물색하고, 문씨 가문과 스승 남도천 가문 그리고 김하규 가문 이렇게 네 가문이 명동촌에 자리를 잡게 된다.[각주:1]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민족교육이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세워진 명동촌은 마을 자체가 독립결사체였다. 독립운동가 김약연이 마을을 이끌며 안중근을 포함한 독립 운동가들이 식객으로 드나드는 명동촌에서 1918년 문익환이 태어난다. 문익환은 나운규, 윤동주, 송몽규 등과 명동학교를 다니게 된다.[각주:2]

       소년 문익환은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과 만난다. 명동학교에서 신식교육을 가르치던 정재면 선생이 명동촌 어르신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기독교 도입을 주장한다.[각주:3] 명동촌을 찾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놈,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가며 싸워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각주:4] 민족을 하나로 엮고 민중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구심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재면 선생[각주:5]의 지속적인 설득에 마침내 명동촌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각주:6]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가 첫 번째 목사로 배출되기도 하였다.

       문익환은 1924년 김약연, 문치정 등 민족선각자들이 세운 공동체학교인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고, 1932년에는 용정 해성소학교를 졸업한다.[각주:7] 이어서 용정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각주:8] 그러나 이듬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가담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각주:9]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1937년 용정 광명중학교를 졸업한다.[각주:10] 이후 그는 조양천소학교에서 교사로 생활하지만 결국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났던 훌륭한 선생들 모두 교사이기 전에 목회자였음을 깨달았고, 그 목회자들은 모두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38년 일본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각주:11] 평생의 반려자인 박용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1943년 학병을 피하여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하게 되고,[각주:12] 만보산한인교회, 신경중앙교회에서 교회전도사로 일하던 중 해방을 맞아 1946년 귀국하게 된다.

       그 뒤 부모가 있는 김천으로 내려가 배영중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교에서 수학(修學)하다 한국전쟁이 발발되고, 유엔군에 자원하여 도쿄 유엔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며 정전회담 통역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다시 도미(渡美)하여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5-66년에는 유니언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947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한빛교회 목사로 사역하면서, 한국 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로 구약학을 강의했다. 1968년부터 1976년에는 한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처음으로 함께 번역했던 ‘공동번역성서’ 작업에 구약번역책임위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구약의 시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번역하기 위해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각주:13]

       또한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노동과 민주에 관한 관심을 가지며 행동을 하게 되고, 절친했던 재야지도자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하게 사형 당한 1975년 여름부터 직접적으로 역사에 투신(投身)하기 시작했다.

       이후 58세 때인 1976년 3월 1일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명동성당에서의 ‘3.1 민주구국선언(民主救國宣言)’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옥살이를 했고, 그 때부터 늦봄 문익환의 집 거실 벽엔 간디의 글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가 붙여졌다.[각주:14]

       문익환은 이 사건으로 투옥되어 22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해 다시 수감되었고, 1980년 5월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정권에 의한 '내란예비음모죄'로 3번째 투옥되었다가 31개월 만에 출옥, 1986년 인천5·3항쟁과 서울대 연설사건, 그리고 1989년 3월 26일 전국을 뒤흔든 방북사건, 1991년의 '분신정국'으로 재수감 될 때까지 어떤 감옥행도 두려워하지 않는 민주와 통일을 향한 열정의 삶을 살았다.

       "통일은 다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 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통일의 전망과 희망을 증언하던 늦봄 문익환 목사는 19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18일 오후 8시 20분 자택에서 졸도하여, 한일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는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교회' 목사(1983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소위 '분신정국'에서 강경대 열사 등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의 활동(1991년), 옥중에서 미국 친우협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92년),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 제창(1993년),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 등으로 시대의 어두움과 장벽을 불사르고 한반도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새벽을 여는 길을 앞서서 헤쳐 갔다.[각주:15]

       문익환 목사의 가족은 부인 박용길 장로, 큰 아들 문호근 씨, 큰 딸 문영금 씨, 둘째 아들 문의근 씨, 셋째 아들 문성근 씨가 있으며, 저서로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1984)’,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걸어서라도 갈테야(1990)’ 등이 있으며, 시집 ‘새삼스런 하루(1968)’, ‘꿈을 비는 마음(1978)’과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등이 있다. 또한 번역서로는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등이 있다. 그 밖에 산문집과 옥중서한집 등 1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이처럼 문익환 목사의 생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맞물려있고 매우 복잡하다. 이런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면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의 기간과, 민주통일운동가로서의 신앙삶의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부분의 기점은 절친했던 장준하의 죽음이지만,[각주:16] 그 죽음이 단순히 목회자에서 민주통일운동가로의 전환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삶을 살아온 그리스도인이며, 평생 자신을 목사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생각했던 이였기 때문이다.[각주:17] 그럼에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의 기간과, 민주통일운동가로서의 신앙삶의 기간을 시대적 상황과 함께 깊이 고찰함으로서 문익환 목사의 신앙삶의 전환과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형수,『문익환평전』pp. 88-93; 조현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 - 한국판 모세’ 김약연 선생,“[2007.6.18] [본문으로]
      2. 조운찬 “다시 쓰는 독립운동列傳 - 남북 국립묘지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2005.6.27] ; 정경호,『함께 부르는 생명평화의 노래』(서울: 한들출판사, 2009), pp. 200-237 [본문으로]
      3. 김형수,『문익환평전』pp. 95-98; 서굉일,“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연구(Ⅰ)”, 『신학사상』 32(1981): 128; 서정민,『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서울: 기독교문사, 1990), p. 144. [본문으로]
      4. 문익환의 모친인 김신묵의 이름 또한 이동휘의 부흥회를 통해 얻어졌다. 당시 여인들에게는 이름이 없었고, 이동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남성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말하며 여성이 함께 하는 독립을 말하고, 명동촌여성들은 ‘믿을 신(信)’자 돌림의 자매가 된다. 문익환은 이후 신(信) 자 항렬의 동기에 대해 “가문족벌의 장벽을 훨훨 떨쳐버리고 한겨레 의식이 확인 확산”된 것으로 평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98-101. 참조.) [본문으로]
      5. 정재면(1882-1962)은 평남 숙천군 태생으로 평양의 숭실학교, 상동교회 부설 기독청년학원을 졸업했고,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신민회의 파송으로 북간도 명동촌으로 오게 되었다. 1908년 규암 김약연으로부터 명동서숙 교사로 초청받았으나 성경을 정식과목으로 또한 기독교개종을 설득하여, 명동촌은 북간도 기독교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이후 간민회 총무, 1919년에는 명동촌 대표로서 의사부원으로 선출되여 상해임시정부 북간도대표로 되었다. 1923년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되었으며 1925년부터 2년간 중국 남경 금릉대학 신학부와 평양신학교에서 1년 공부 후 목사안수를 받고,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은진중학교 목사로서, 해방 전에 귀국하여 청진과 원산에서 목회했고, 해방 후에는 ‘기독공보’사장으로 역임하고, 경기도 양주 장흥면에 소재한 교회에서 목회 하던 중 1962년 소천하였다. [본문으로]
      6. 정경호,『함께 부르는 생명평화의 노래』p. 212. [본문으로]
      7. 1년 만에 다른 학교를 다시 졸업한 이유는 당시 명동소학교가 일본에 침략을 받은 조선에 속하지도 않았고, 중국에 속하지도 않았기에(명동학교는 중국과 일본의 행정망을 피한 학교였다.) 중국국적의 학교를 다닐 필요가 있었다. [본문으로]
      8.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로 전학한 이유는 당시 중학교가 ‘5년제’가 정규학제였는데 은진중학교는 4년제로서 고등학교나 전문학교, 또는 대학 예과와 같은 상급학교로 진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문익환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모처람 찾아온 고국 땅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에서 학생 생활을 하는 것도 겨우 한 학기. 일본 신사참배문제가 터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1936년 4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전 중학생들이 아침 예배시간이 끝나자 들고 일어났다. 요샛말로 ‘데모’에 나섰던 것이다. (…) 우리는 그때 학교에서 처벌받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아서 자퇴한 것이다”라고 회고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180.) [본문으로]
      10. 당시 용정에는 기독교 계통의 은진중학교, 민족주의 계통의 대성중학교, 사회주의 계통의 동흥중학교, 친일계통의 광명중학교 이렇게 네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5년제 정규학교는 광명밖에 없었다. 문익환은 교사를 꿈꾸고 있었기에 정규학교를 졸업해야 했고, 결국 광명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광명중학교는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로서 정일권을 포함해 박정희의 5.16쿠테타의 직접적 인맥들이 이 학교 출신들이었다(위의 책, pp. 181-188.). [본문으로]
      11. 그가 평양신학교가 아닌 일본신학교를 선택한 데에는 삼촌이었던 이권찬 목사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른 형편없는 보수화를 염려하고 진보적인 신학을 배우라”는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익환은 이권찬 목사의 말을 듣고 일본 신학교로 가게 되었지만, 은연 중 침략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다.(위의 책, pp. 193-200.). [본문으로]
      12. 일본에서 문익환은 윤동주, 송몽규, 장준하 등과 함께 있었는데 그때 강제징병에 대한 반응이 다 달랐다. 문익환은 “일본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일본인 교장과 담판을 짓고 동생 문동환과 함께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을 갔고, 장준하는 “입대 이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합류하자”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탈출하여 김구를 만나 광복군에 가담하게 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입대하여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군대내에서 모반을 일으키자”라고 말했는데, 동료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끌려가 옥중노동 혹은 생체실험으로 죽었다. 문익환은 평생 그 일에 대해 가슴 아파했고, 이후 장준하의 죽음과 함께 급변했던 문익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위의 책, pp. 221-228.). [본문으로]
      13. 사실 구약번역책임위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무리없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의 고민에서 시작된 번역은 시편의 시 번역에서 한국시단에 도움을 청하며 ‘시’를 이해하려다 결국 본인이 시인이 되었던 경우였다. [본문으로]
      14. 감옥에서 그의 신앙은 비로소 교회를 벗어난다.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찮은 장소, 모든 하찮은 사람들 가운데 거룩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으로]
      15. 위의 책, pp. 813-832. 연보참조. [본문으로]
      16.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민중과 신학』 3(2000): 90-93. [본문으로]
      17. 홍근수, “통일운동의 선구자, 늦봄의 숨결“, 『말씀과 교회』 21(1999): 242-244; 편집부, “문익환 목사의 숨결, 사랑, 그리고 생명", 『기독교사상』 3(1999): 1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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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대적 상황


      C.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


         역사는 서구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이 서구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말한다. 산업적인 배경에서 일하고 선진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며, 고도산업국들의 아류(亞流)가 되는 것은 분명 유혹적이긴 하지만, 필히 독재정치를 경험시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근대화는 발전이 아닌 삶의 뒤틀어짐이며, 진보가 아닌 생명의 죽임이었다. 한반도의 대한민국도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를 명목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근대화를 명목으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독재를 시작했다.[각주:1]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다. 한일정상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민간기업들로부터 한국수출 총액의 1.5배에 달하는 투자를 받아냈다.[각주:2] 또한 미국이 벌이고 있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30만여명의 장병을 복무시켰고, 이에 따라 베트남은 한국기업들의 개척지가 되어 한국강철수출 총량의 49퍼센트와 수송장비수출의 52퍼센트를 흡수하였다.

         독재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허울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착취해 갔다. 한국 노동시장은 외국 자본가들에게는 천국이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미국 임금의 1/10을 받고 2.5배의 생산성을 올렸다. 이러한 산업화를 통해 농촌은 죽어갔고, 가난한 농민의 자녀들은 미숙련(未熟練) 혹은 반숙련(半熟練) 노동자 대열로 흡수되었다. 무너져 가는 농촌에서 나온 10대의 여성들은 부모나 가족을 위해 방적, 편물, 재봉, 신발, 단순조립, 식품가공 등을 하며 과다한 노동시간과 성적학대에도 불만을 낼 수 없었다. 그들의 하루 임금은 다방의 커피 한 잔 값에 해당될 뿐이었다.[각주:3]

          계속되는 독재정부와 산업화의 착취구조에서 한 청년의 죽음[각주:4]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 정세는 갑자기 격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산업화가 만든 희생자가 아니었다.[각주:5] 그는 잊고 있던 한국에 민(民)주(主)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이후 산업화에 대한 투쟁, 독재정부로부터의 투쟁, 민중운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9년 8월의 YH사건[각주:6]을 시작으로 부마시민항쟁 그리고 결국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해방의 기쁨이 분단의 고통이 되었듯,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또 다른 정권을 만들었다. 또다른 군부정권이었다.

         1980년 5월 전국에서는 전두환의 군부가 물러가길, 학원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들이 거셌다. 18일,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戒嚴軍)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신군부의 무차별 진압과 언론통제로 인해 세계는 알아도 한국은 모르는 비참한 현실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군부세력은 형식적인 방법을 갖춰 정권을 득하게 되었고, 박정희정권과 차별성을 강조했지만 결국은 모양은 다르나 본질은 같은 군부독재였으며, 계속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護憲措置)[각주:7]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제 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으나,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것은 군부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각주:8]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냉전과 경쟁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남쪽 내의 민주화 운동은 더 이상 반국적(半國的) 운동을 넘어 통일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이 있었지만 그것은 보기 좋은 허울뿐이었고, 7.7선언 이후 전민련 대표들이 북쪽 대표를 만나러 판문점으로 가다 경찰의 저지를 받거나, 6.10학생회담, 8.15행사 불가 등의 모습을 보면서 문익환은 방북을 결심하게 되고,[각주:9] 결국 김일성 주석을 만나 4.2공동선언을 하게 되면서 통일에 관한 논의는 더욱 강하게 계속 되었다. 이후 1990년대가 되어 독일 통일, 걸프전, 소비에트 해체 등의 국제적 변동과, 국내에서는 3당 야합을 통한 김영삼의 대선성공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1994년에는 4.2공동선언을 함께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이처럼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근대화의 명목으로 시작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가진 독재시대의 시작이었으며, 더불어 함께하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고유의 한반도공동체성은 근대화 즉 경제발전의 과정 속에서 개발과 이익 앞에 무너져간 시기였다. 한국 기독교 역시 경제개발과 발맞추어 ‘양적부흥’이란 허울로 공동체성 없는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전태일 열사 사건 이후 한국 기독교는 사회선교 혹은 양적성장이라는 두 흐름으로 구분되어 발전해나갔다.

         또한 남과 북은 ‘한반도’라는 공동체성를 생각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각기 기득권 사수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이용책을 쓰며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던 민주운동들은 강압과 회유 앞에 좌절되었다. 이러한 좌절의 국내 상황과는 달리 국제정세가 독일 통일과, 소비에트 해체 등으로 이념적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한반도 근대사의 엉킨 매듭을 바로 풀 시작점인 ‘통일’에 대해 사람들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문익환 목사는 이데올로기와 독재로 잃어버린 한반도공동체의 정신을 통일을 통해 다시금 찾고자 방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의 노력때문인지 그 후 통일에 대한 분위기와 관심 그리고 논의들은 고조되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용직 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 1945-1979』p. 457. [본문으로]
      2.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448-453. 참조. 또한 이러한 돈으로 경부고속도로와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는 확보했지만, 근대사에서 다시 꿸 수 없는 단추를 엉망으로 끼워버렸다. 이 점을 가지고 장준하는 박정희를 향해 제 2의 일본에 의한 식민화라고 말했다. [본문으로]
      3. 위의 책, pp. 527-536. 참조. [본문으로]
      4.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5분경, 서울 음대로 들어가는 골목 평화시장 입구 사람들의 틈에 서있던 한 청년이 불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멍청히 바라보다가 어느 누군가 불을 꺼야한다는 말에 술렁대었지만 어느 누구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작업복에 검은 빛 바바리코트를 입은 청년은 한 일 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불길이 상체에 붙어 타오른지 2분후 행인 중 몇 명이 잠바를 벗어 덮어씌웠다. 하지만 불은 점점 더 거세졌다. 시장 경비원은 2층으로 소화기를 가지러 뛰어갔다. 이때 이를 악물고 서있던 청년은 갑자기 벌떡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섰다. 청년의 눈썹과 머리털은 타버렸거나 그을려 불길로 새까맣게 뒤범벅이 돼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달라” 그는 외치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끝내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청년 전태일(23세)은 메디컬센터를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밤 10시 끝내 숨졌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 532. ; 김형수,『문익환평전』(서울: 실천문학사, 2004), pp. 398-399.). [본문으로]
      5.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자 농민들의 집단적 죽음현상을 미리 막아내기 위한 ‘자기몸 저항’이었다(정성한,『삼천리반도 금수강산』(서울: 그리심, 2008), p. 107). [본문으로]
      6.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인 와이에이치 무역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1일 사이에 벌어졌으며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이 되었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535-536.). [본문으로]
      7.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서중석,『한국현대사 60년』(서울: 역사비평사, 2007), p. 192.). [본문으로]
      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558-559. [본문으로]
      9. 1989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 회의를 제의하면서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김수환 추기경, 전민련의 백기완 선생과 함께 문익환 목사를 평양에 초청했다. 이에 백기완과 문익환 목사는 초청수락 성명을 발표했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685-686; p. 82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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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대적 상황.



      B. 1945년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해방이 되자 바로 분단이 되었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일본이 항복하자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이 조선 내에 있는 일본군에 항복을 받으러 가기에는 시간이 걸렸고,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 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에 발을 디뎌놓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38선을 나누기 시작했고,[각주:1] 결국 북쪽엔 소련이, 남쪽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신탁통치에 관해 미국은 조선이 독립하여 자치정부를 이끌려면 40-50년 정도는 선진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2] 즉, 조선에 대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에 조선 사람들에 의한 자치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조선에서 소련의 지배를 막는 일이며,[각주:3] 조선의 독립(獨立)과 자주(自主)는 고려대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각주:4]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소련이 모르고 있지 않았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꼭 실시해야 한다면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면서 나아가 강대국들이 꼭 개입해야 한다면, 조선 사람들이 먼저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하고 그를 4대국이 후원하는 것으로 그치자고 했다. 이게 바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에서 통과된 내용이다. 즉, 소련이 제안했던 것은 신탁통치(trusteeship)가 아니라 후원 또는 후견(tutelage) 제도로서, 조선 사람들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원조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에 의해 핍박받던 조선의 민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쌀을 골고루 입에 넣을 수 있는 평화(平和)였다. 그것은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주의이며, 소련은 그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소련은 강대국의 개입을 꺼려했고(가만히 두면 자신들의 이념으로 넘어 올 것이라 예상함), 미국은 4개국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당시 중국도 사회주의정권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 정부 성향이 될 것이라 생각함).

        다시 말하자면,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기하고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미루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던 조선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소련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조선의 독립을 앞당겨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각주:5] 어찌되었던 미국과 소련간의 대화는 불발되었고, 한반도문제를 유엔(the United Nations)에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세계정세는 2차 대전 이후 모든 강대국들이 침체하게 되었고 그에 비해 피해가 적었던 미국이 세계정세의 패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나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멸망을 주장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 능력에서 미국의 몇 안 되는 경쟁자였던 소련이었다. 소련은 그리스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고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으로 하여금 그리스 공산주의자를 지원하여 권력을 장악하도록 시도하는 등 공산주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스 뿐 아니라 터키에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지자, 두 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영국은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영국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두 나라를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나서서 소련의 침투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1947년 3월 발표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다. 소련의 세력 확장에 맞서 자유국가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각주:6] 중동 지역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 나라가 공산화되면 중동 지역에서 서구 세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중동의 석유 자원도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트루먼 독트린의 후속 조치로 나온 것이 3개월 뒤에 발표된 마샬 계획(Marshall Plan)이다. 즉,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유럽을 지키기 위한 경제적 처방으로,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 경제를 복구하고 나아가 경제 혼란을 틈타 공산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유럽에 전폭적인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각주:7] 이로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은 분명해졌다. 그리고 한반도의 문제는 미국의 영향아래 있었던 유엔으로 넘어갔고, 1948년 5월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강행되고[각주:8] 이를 바탕으로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1948년 9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섬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체제 분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남쪽의 상황은 정치적 계파에 따라 이념적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일제의 식민지 반봉건(反封建)적 잔재모순과 미국소련의 분단구조 속에서 제 2의 해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각주:9] 이런 정치적 계파들의 미국에 대한 대처가 미국에게는 눈에 가시가 되었고, 미국은 이승만과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상처가 있는 기독교계[각주:10]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승만은 반공(反共)이라는 기치(旗幟)를 내걸고 정부수립을 하게 되고,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정치 인사들을 처단했다.[각주:11]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유럽평화대학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이름도 전쟁의 성격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며,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각주:12] 이처럼 한국전쟁은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단순한 북에 의한 침략전쟁이 아닌 이념에 의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38선을 두고 1945년 9월부터 1950년 6월 이전에 남북 사이의 이념 갈등과 투쟁 과정에서 약 10 여만명이나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이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한쪽의 시각이라 할 수 있다.[각주:13] 그러나 이 전쟁에 관해 한 가지 분명하고도 명확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승리자도 없는, 그저 한반도의 민중(民衆)들만 고통을 당했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민중들은 이념에 대한 직접적 부정인식을 가지게 되고, 하나의 형제라는 인식은 점점 더 옅어져만 갔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민중들의 아픔을 이용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오직 경찰력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정권이 영원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결국 항의하는 학생들이 주축으로 일어난 1960년 4월 19일의 혁명을 통해 이승만은 하야했고 이기붕 일가는 동반자살 하였다.[각주:14]

        시대적 아픔들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정권이 무너지고, 국민들은 진정 민주화가 되길 바랐지만, 결국 1961년 5월 16일 다시금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coup d’État)로 인해 민주(民主)의 길은 멀어졌다.

        이처럼 1945년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겉으로는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The Korean War)’의 상황이었지만, 사실상 몇몇의 이익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고, 그 고통을 한반도공동체가 고스란히 받고 분열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과 분단의 순간도 미국과 소련의 이익분배의 과정이었고,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도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기득권 사수의 과정이었으며, 요한 갈퉁이 주장한 바와 같은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 또한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과정의 연속이자,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권의 명분을 가지기 위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역시 이 이데올로기적인 시대적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고, 한반도의 사회적 상황과 매우 비슷하게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교단분열과정을 겪었다.[각주:15]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한반도공동체의 분열과 기득권 사수는 결국 한반도공동체의 민(民)의 주(主)의식에 의해 멈춰지긴 했지만, 그 기득권의 빈자리가 다시금 군부(軍部)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또 다른 독재(獨裁)가 시작되었다.[각주:16]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1945년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 국무 전쟁 해국 3부 조정위원회의 존 맥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라는 두 젊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조선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고, 3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들은 그저 지도를 펴고 수도 서울을 미군의 점령지로 포함시키자는 단순하고 즉흥적인 생각에 지도상의 38도선을 선택했을 뿐이었다(양호민,『방일영문화재단 한국현대사강좌 1: 38선에서 휴전선으로』(서울: 생각의나무, 2004), pp. 41-51. 참조.). [본문으로]
      2. 김학준,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서울: 한길사, 1980), p. 67. [본문으로]
      3. 안진,『미군정과 한국의 민주주의』(파주: 한울, 2005), p. 64 ; [본문으로]
      4.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김동노 외 역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1), p. 264. [본문으로]
      5.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만나 미,영,소 3국의 외상(Byrnes, Bevin, Molotov)들은 한국문제에 대한 정책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상하고 있었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의 중국을 포함한 4국의 구상을 검토해보면, 미국은 자신이 기계적 다수를 확보할 수 있는 유엔이 주관하는 신탁통치안을 입안하여 친미적 정부의 수립을 모색하였고, 소련도 역시 당시 한국현실에 비추어 친소적 공산주의적 정부수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즉시 독립안을 원했다고 추측된다. 한편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전통적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로서 중경임시정부의 역할을 기대해서인지 즉시독립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한국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던 영국은 한국의 독립이 자국의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한국에 식민지상태의 존속을 원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중국은 내전중인데다 삼상회의 당사자도 아니었기에 정책결정에 참가할 수 없었으며, 영국 또한 직접점령자가 아니었기에 한국문제에 관한 한 제 3자에 불과했다. 따라서 다른 의제도 대부분 그러하였지만 특별히 한국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소련만이 협상 당사자였으므로 정책결정은 미국과 소련 양국의 타협과 양보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46”, 『해방전후사의 인식 3권』(서울: 한길사, 1988), p. 224.) [본문으로]
      6. 김일영,『방일영문화재단 한국현대사강좌 4: 건국과 부국 현대한국정치사 강의』(서울: 생각의나무, 2004), p. 55. [본문으로]
      7. 김학준,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p. 104. [본문으로]
      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pp. 297-298. 참조. [본문으로]
      9. 여운형 계(인민당), 박헌영 계(공산당), 백남운 계(신민당), 김구 계(한독당) [본문으로]
      10. 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서울: 그리심, 2003), pp. 55-96. 참조. [본문으로]
      11. 안진,『미군정과 한국의 민주주의』 pp. 89-91. 참조. [본문으로]
      12. 2005년 10월 15일 학술단체협의회와 민교협을 비롯한 5개 학술단체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국가보안법과 강정구 교수 필화사건〕학술토론회에서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 외교학)교수가 발표한 내용 중 일부 발췌. [본문으로]
      13. 남쪽 안에서 일어난 이념 갈등은 빼더라도,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남북의 군대가 격렬하게 충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남침도 있었고 북침도 있었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346-356; 364-365. 참조.). [본문으로]
      14. 김용직 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 1945-1979』(서울: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pp. 249-252. 참조. [본문으로]
      15.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pp. 624-642. 참조. [본문으로]
      16. 강정구, "박정희정권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 『역사비평』38(1997): 215;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pp. 55-5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 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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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대적 상황.


      A. 1918년부터 1945년까지


        19세기의 조선은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된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의 전통사회는 안으로는 매관매직 등의 부패와 기존의 양반 지배세력들에 반하는 민중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팽배로 서구열강들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일본이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빌미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이라는 불평등조약을 조선이 체결함으로 인해 일본의 경제적 침탈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이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을사늑약(Eulsa Treaty 1905)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미국과 일본과의 가츠라-테프트밀약(Memorandum of Taft and Katsura 1905)[각주:1], 그리고 헤이그밀사사건(Hague 密使事件)을 구실로 고종이 퇴위되고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 불리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1907)을 통해 조선의 행정권이 빼앗기고, 마침내 기유각서(己酉覺書 1909)를 통해 사법권과 1910년 경찰권까지 빼앗기며 한일강제병합(1910)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치밀한 식민지작업[각주:2]의 과정에서 도처에서 애국운동과 의병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일제는 무단통치를 하게 되었고, 조선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더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 1919년 3월 1일의 국민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국민적 운동은 일본을 당황스럽게 했고, 일본은 강경한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그 노선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문화정치 역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여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보통경찰을 대폭 증가시키고, 치안유지법들을 통해 통제와 탄압을 강화한 것이었다.

        이 3.1운동의 여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와 조선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민족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 중 다수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내세주의적 신앙, 선교사들의 친일경향, 새로운 사상에 대한 경시풍조 등으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각주:3] 그러자 조선사회에서는 그에 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또한 조선사회의 이런 일반의 반(反) 기독교적 분위기에 사회주의의 대두는 여러 문제들을 야기 시켰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기치(旗幟)는 폭력적 방법 등을 통해 기독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그 지향하는 목적과 방향에서 일치점이 있음을 시인하고 수용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통한 기독교 내외부의 자극을 영향으로 사회운동의 전환점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이 넘어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자체를 인정치 않고 거부하면서 기독교는 사회주의를 반박하며 현실적인 개혁운동으로 나아갔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함께 탄압당하는 처지가 되자 양자 간의 이해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각주:4]

        이렇게 3.1운동 이후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여파가 컸고, 일제 또한 문화정치로 한민족 내부로는 분열을 야기 시키는 분할(분열)정책을 펴고, 유학생을 유치하여 장기적인 친일파 양성을 주도하고, 교육정책을 통해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형제인 것처럼 서구열강과의 대결구도를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전쟁준비를 위한 신사참배(神社參拜)[각주:5], 창씨개명(創氏改名)[각주:6], 강제징용(强制徵用)[각주:7] 등을 강요했다. 이러한 조선 나름의 여파와, 일제의 변화는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과 선각자들을 제 3국으로 내몰았고, 한반도 내에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의 침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가지게 만들었다.

        조선의 이러한 일반적 상황 속에서 북간도에서는 또 다른 시대적 상황 즉,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시작되었다(물론 조선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지만 북간도는 더욱 치열했다). 다행히 조선처럼 현실적 삶을 회피하는 부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선각자’의 땅도 아닌 민족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각주:8]

        또한 당시 세계사적으로 1929년 12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북간도에서는 1930년 가을 곡식가격이 폭락했고, 그러한 주민들의 경제상황이 암담해짐에 따라 공산이데올로기는 더욱 활발해졌다. 이어 정치군사적인 대변혁이 잇달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시화 되면서 중국과 일본 양군은 1932년 1월 1일부터 산해관(山海關)에서 충돌하여 5월 31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일본이 동삼성(東三省)과 열하(熱河) 및 내몽골 동부를 판도로 하는 ‘만주국’을 세웠다. 이러한 만주국의 생성은 노골적인 일제의 북간도 침략을 뜻했고, 더 이상 북간도의 민족적 교육기관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도 북간도도 일제의 제국주의적 허망한 야심의 끝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또한 경험하고 있었을 상황에 갑자기 뜻하지 않게 해방이 되어버렸다. 해방은 낯선 손님과 같았다. 그나마 해방 이전에는 이념들 간의 논쟁이 있어도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서로 일치되었지만, 갑작스런 해방‘됨’에 이념논쟁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고, 그것은 엄청난 혼란이 되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보면, 사회주의세력들의 확산이 계속 조선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항복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화도 싫었고[각주:9], 조선이 중국이나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 또한 싫었다.[각주:10]

        이처럼 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가고 타의에 의해 해방되어가는 상황으로서, 기존의 유교적 한반도공동체의 정신이 멸절되고 그 공백을 기독교의 정신이 채우는 듯하지만, 이도 이데올로기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게 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공동체정신이 분열되고, 강대국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해방은 이루어지지만 곧 공동체정신의 분열처럼 남과 북으로 나눠지는 모습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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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밀약은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일본과 한 밀약으로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당시 선교사 알렌이 미국정부의 공사가 되었고,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행동에 대한 보고와, 조선인의 호소를 무시된 것은 이미 알렌이 미국정부로 소외되었고, 조선내 미국공사의 지위가 내려갔음을 말한다. 가츠라-태프트조약 이후 미국은 알렌의 공사직을 경질시키고,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기도 한다(김승태, “한말 일제침략기 일제와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 6(1997): 65-100. 참조.). [본문으로]
      2. 1905년부터 문란한 화폐정리를 핑계로 3백만원을 차입하고, 금융공황 구제로 1백50만원, 교육제도 및 도로항만 개수 및 확충으로 1천만원 차입하는 등의 차관공세에 조선정부는 원금만 1천6백50만원 채무를 가지게 되었다(조항래,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일제경제침략과 국채보상운동』(성남: 아세아문화사, 1994), pp. 61-63. 참조.).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기존 조선의 토지제도를 해체하여 원활한 식민지내 상품과 자본 수출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서류신고를 하지 못한 토지는 국유화하여 조선총독부가 대지주가 되었다(한국 민주사 연구회 편,『한국민중사 1』(서울: 풀빛, 1986), p. 129.). [본문으로]
      3. 3.1운동 관계 피검자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총 19,525명에서 기독교인은 3,426명으로 17.6%를 차지하고, 특히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이르며, 이들 기독교가 당시 총인구의 1.5%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려하고, 이들 모두 과격시위자가 아닌 주동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박해에 따른 자체 내의 분위기와, 일제의 선교사정책에 따른 분위기들이 3.1운동 이후 한국기독교가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한국 기독교사 연구회,『한국기독교의 역사 2』(서울: 기독교문사, 1991), p. 38. 참조;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서울: 기독교문사, 1998), pp. 408-419. 참조.). [본문으로]
      4. 김권정,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한국기독교와 역사』 5(1996): 78-116. 참조. [본문으로]
      5. 신사는 면 단위로 다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신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고 어떤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마다 그 곳에서 절했으며, 아침마다 황국신민서사(“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라고 낭독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독립을 외친다던지, 신사참배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하던 이가 없었을 만큼 사회적 분위기는 그 만큼 힘들었다. 그랬기에 1935-45년 사이 조선의 분위기는 심각했다(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 pp. 494-500. 참조.). 이와 관련하여 1936년 5월 가톨릭의 신사참배 허용을 시작으로, 1936년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1938년 장로교까지 신사참배에 굴복되었다(위의 책, pp. 503-506. 참조.). [본문으로]
      6. 일제의 압제 하에 학교에서는 우리말(한글)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으며,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교육기관의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선생 중 몇 명 또한 일본인이었다. 자신의 성도 쓸 수 없도록 창씨개명을 하도록 하여 이름까지 다 바꾸고 자신의 문화와 가족의 역사를 말살하여, 철저히 일본에 속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몇의 사람들은 일본사람을 따라다니거나 그들에게 아첨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이런 친일파들은 부역이나 여러 공출 같은 것들을 빼주는 대신, 동네주민의 생활을 보고함으로서 농사짓고 숨겨둔 것들까지 모두 빼앗아갔다 [본문으로]
      7. 아이들은 학교수업의 일환으로 동네구석구석의 깡통, 철 등을 주워오고, 집안에 있는 놋그릇, 제사 때 쓰는 제기조차 모두 헌납해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쓸 총알을 만드는데 썼다. 또한 농사했던 곡식이나 먹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빼앗는 공출을 보냈고, 심지어 소나무 솔방울, 싸리나무 껍질까지 공출 안한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서 먹을 식량마저 다 뺏기고, 만주에서 콩깻묵이라는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끼로 가축의 사료나 비료 따위로 쓰이는 것’을 먹으면서 배를 채워야 했기에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장로교회는 1939년 4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교회 종을 떼어내어 탄환과 비행기로 만들어 헌납하기도 하였다(위의 책, pp. 524-534. 참조.). [본문으로]
      8. 이 사상적 대립을 통해 명동학교는 그 이름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알제가 ‘명동’이란 이름을 개명시키려 부던히 노력했음) 학교 경영권을 공산당에게 넘겼고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인민학교로 바뀐지 6개월도 되지 않아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학교로 강제편입 되었다. [본문으로]
      9.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서울: 삼인, 1999), pp. 139-140. 참조. [본문으로]
      10. 이혜숙,『미군정기 지배구조와 한국사회』(서울: 선인, 2008), p. 6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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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문익환 목사와, 교회의 본질, 그리고 이시대의 과제’에 대한 글을 각색하여 매주 혹은 며칠 단위로 연재할 생각입니다. ^^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바쁜 일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바쁜 시대정신과 그로인해 생각할 겨를도 없는 삶은 한반도사회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생의 풍성함보다 이데올로기적인 편가름과 흑백논리에 가까운 무분별한 대치를 만들었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다. 삶에서 하나님을 매개하거나 이웃을 향한 풍성한 사랑을 고민하기보다,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기복신앙과 개인구원에만 치중함으로서 교회공동체의 본연의 모습을 잃고 사회적 문제 중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의 문제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한반도에서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본연의 한반도공동체성과, 한반도교회공동체성은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바른 답을 하기 위해선 우리의 현대사 100년를 바르게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대응력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던 식민지 시기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진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독재의 시기가 복잡하게 얽혀져있기에 그 시대를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도 복잡한 현대사에 영향을 받아 이데올로기적인 교회의 모습과 분열, 양적 성장과 기복신앙의 현실을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한민족 공동체의 현대사와 공동체성 상실의 시대에 사회와 교회공동체를 바르게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는 창(窓)이 있을까?

      필자는 신앙인으로서 한반도 근현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문익환 목사를 주목하려한다. 그의 인생은 앞서 복잡했던 한민족 현대사를 꿰뚫고 있고, 목사 번역가 시인 민주운동가 통일운동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 복잡한 현대사를 살아갔다. 그렇기에 마치 우리가 실타래같이 엉킨 한민족 근현대사를 풀지 못하고 오해하거나 단면적으로 이해하듯,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빨갱이 목사 혹은 민주 통일의 생을 산 영웅 등으로 단면적이고 극단적인 오해를 하고 있음을 본다. 무엇이 그를 오해케 했고, 무엇이 그의 참 모습이며, 그가 일생을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물음에 답을 함으로서 한반도 현대사를 풀어가고, 오늘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관(觀)을 찾아보려고 한다.

        본 글은 문익환 목사의 삶을 조명하고 그가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 처했는지, 그리고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아봄으로서 그가 바랐던 것과 그가 이해한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유추하고자 한다. 또한 그 결과를 통해 현실의 사회공동체와 교회공동체의 상황을 바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 한반도에서 살아갈 것이며 한국 교회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여야 할 것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럼에 있어서 본 글은 다음의 세 가지 부분으로 전개할 것이다. 첫째, 한민족 근현대사 속에 한민족 사회공동체와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문익환 목사의 삶의 기간 안에서 비추어 볼 것이다. 둘째, 문익환 목사의 목회자로서 삶과, 민주통일운동가로서 삶을 시대적 상황과 함께 조명해 볼 것이다. 셋째, 전통적인 교회공동체의 의미와 지향해야할 교회공동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문익환 목사가 그의 신앙삶에서 이해한 교회공동체를 분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공동체의 문제와 그 과제를 다루어 볼 것이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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