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이한열 열사 추모사가 자동재생됩니다. 



    B. 목회자 문익환의 신앙삶



   문익환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조상들이 겪었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육진문화(六鎭文化)의 분위기에, 문익환 자신이 태어나 배우고 자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모습들, 또한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기독신앙 그리고 명동촌의 영향이 늦봄 문익환의 신앙삶을 만들었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가 목회자가 된 이유는 그 주변에 그에게 영향을 준 모든 이들이 참 애국자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며 목회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회와 교회를 달리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각주:1]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에 올바르게 나아가는 길이라 꿈꾸었던 선생이라는 길이 허무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느꼈을 때, 그가 목회자라는 길을 선택한 데에는 그의 신앙과 그 공동체적인 환경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각주: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된 문익환이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시대정국(1947-49년)을 꿰뚫어볼 혜안(慧眼)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두고 홀연히 도미하였다.[각주:3] 유학 중 전쟁이 터지면서, 그가 유엔 극동사령부에서 정전회담 통역을 자원하게 되고,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참상과 정치적 기득권들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전환을 하게 된다.

   문익환 목사가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갔을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각주:4] 그는 묵시문학을 통해, 구약역사를 통해 히브리인들에게서 한반도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했다.[각주:5]

   당시 한국기독교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는 전쟁의 여파로 가정이 파괴되고 수많은 이가 죽어가는 고통의 현실 속에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물질적 축복과 위로를 받고자 하는 기복신앙과 신비주의신앙의 흐름이 그 첫 번째 였고,[각주:6] 또 다른 하나는 전쟁을 통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한 기독교인들과 북측 정권의 탄압을 피해 대거 남하한 기독교세력들이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반공을 외치면서도 다른 사회문제에는 이상하게도 기형적으로 무관심한 흐름이 있었다.[각주:7] 이런 상황 속에서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공동체의 현실을 고민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고민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문익환 목사는 한빛교회를 맡아 목회하면서, 한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구약강의를 나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잃은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 어린 제자들을 짧은 시간 내에 바른 목회자, 바른 교회지도자로 길러내고자 시간엄수, 책임감, 올바른 글쓰기, 말하기 등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학생에게 그는 융통성 없고 인기 없는 교수로 심지어 그의 히브리어수업이 기피되는 현상까지 생겨나기도 했다.[각주:8] 문익환 목사의 이런 융통성없는 엄격한 가르침은 아마도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변해가는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한반도공동체와 한국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였고, 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의 강의와 함께 문익환 목사는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저작활동 연혁을 보면 1955-56년까지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각주:9] 또한 1958-59년까지 기독교사상에 매월 글을 기고하면서 예레미야에 대해 글을 적었는데,[각주:10] 이것으로 비추어보자면 문익환은 세상 사회구조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61년의 기고글들을 보면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 ‘한국 크리스천의 신앙형태’, ‘연세대학교 분규를 슬퍼한다’, ‘섬기는 주로서의 그리스도 고난의 종’ 등 직접적인 사회현상과 구조악에 대한 비판과 느낌이 주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각주:11]

   1964년 문익환 목사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번역했는데, ‘신도의 공동생활’ 옮긴이의 말에서 문익환은 자신이 본회퍼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은 ‘신학보다는 그 같은 생애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너무 어려운 가운데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 신앙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이’ 문익환 자신에게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노라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관심은 본회퍼의 신학에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의 저서들을 읽고 그의 신학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며 '신도의 공동생활‘을 번역하고 출판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각주:12]

   문익환은 본회퍼를 평가하면서 자신이 몇 년간 예레미야에 대한 글을 기고했듯, ‘사랑하는 조국이 망할 것을 하나님 때문에 원하여 민족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의 후배’로 평했다.[각주:13]

   또한 자신이 번역한 ‘신도의 공동생활’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작은 책은 세속 세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고 있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벌써 그리스도인은 세속 세계 속에 뿌려진 씨라고 말한다. 말씀 아래서 성립되고 생명을 보존하고 움직이며 사명을 다하는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하겠다. 교회를 사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이미 비종교적이요 세속적인 이해가 아니겠는가?”[각주:14]


   이렇게 문 목사의 당시 글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한국전쟁 이후 자신의 신앙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한반도공동체를 달리보지 않고, 하나로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신앙인으로 한반도공동체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저작활동 외에도 문익환 목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서번역이었다. 복음동지회[각주:15]에서 시작되었던 성서번역이 빛을 발하면서 문익환은 1968년 4월, 신·구교 성서공동번역의 책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공식직함은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위원장’이었다. 그는 이 일에 부름을 받은 것을 “영광이라기보다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축복이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각주:16]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통해 겨레의 정신이 깨어났고, 민중과 여성계의 문맹이 퇴치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나라를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음을 주목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권위만큼 과거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의 권위가 반영되어왔고, 그러다보니 성서를 해석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부패했었다. 그 불합리한 권위체계를 파괴한 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이었다. 1521년 루터는 단호하게,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서 성서 자체로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이양했다. 독일어로 루터가 성서를 번역함으로 인해 기존의 라틴어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했던, 그리고 그 권위에 눌려있던 사람들에게 성서를 다시금 돌려줬고, 성서는 성서로서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음을 문익환은 주목했다.[각주:17]

   이처럼 문익환은 1960년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모두를 성서의 번역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의 일을 통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첫째 신교와 구교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험이고, 둘째 신학적인 편견이 걷히는 경험이며, 셋째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무는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각주:18]

   그는 가톨릭 측 번역자인 선종완 신부와 상의하여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란 원칙을 정했다.[각주:19] 이 말은 교회 내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지고 교회 밖으로 나아감을, 또한 교회 바깥에서는 더 이상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번역이 아닌 모두가 이해되는 번역을 말하는 것이었다.[각주:20]

   이렇게 시작된 성서번역작업에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고민하며 부딪치기 시작했다.[각주:21]


   “문학작품 중의 문학작품이라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훌륭한 작품으로 옮겨내는냐는 생각이 처음부터 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소. ‘특히 그 시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는 한국시단을 총동원할 심산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더군요.”[각주:22]


   그는 처음에는 직접 번역한 시를 가지고 시인들을 찾아다녔고, 결국에는 그 스스로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공부했고,[각주:23] 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그토록 부끄러웠던[각주:24] 시인이 되었다. 문익환은 목사에서 시인이 되면서, 더 이상 목회자란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시인들의 자유로운 습성을 따라 고민과 삶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파격적인 삶으로서의 전환에 대한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70년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한 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각주:25]


(문익환 시 ‘전태일’ 중 일부분)


   문익환은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그의 정신을 움직였고, 그 다음은 전태일이 그의 육신을 움직였다. 청년은 죽었지만, 그 청년이 민중의 삶 속에서 부활했음을 문익환은 깨달았다. 그 또한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부활시킬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1970년 그는 번역작업에 매달리겠다고 한빛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번역작업을 위해 고민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필요로 하고 부르는 곳에는 어디든 달려갔다.[각주:26]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늦봄 문익환이 자신이 그토록 고민했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익환은 1973년 6월 1일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발행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아호인 ‘늦봄’을 썼다. 그 시집의 발행일이 6월 1일 그의 55번째 생일인 것을 보면 그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각주:27] 시집을 내기 시작하면서 시인이 되어 시를 통해 세상을 이야기하고 이해했고, 그것은 삶이 되어 돌아왔다.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 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째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가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살일 겁니다[각주:28]


(문익환 시 ‘난 발바닥으로’ 전문)


   이처럼 늦봄 문익환이 역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투신한 것은 단순히 절친한 장준하의 죽음에서 폭발한 단순한 혈기가 아닌, 아주 오랜 시간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라는 문익환의 신앙삶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은 단순히 종교라는 틀로 국한된 삶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한반도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목회자로서 문익환의 신앙삶은 북간도의 그의 공동체가 그를 신앙인에서 목회자로 이끌었던 것으로 시작하여, 전쟁의 참상(慘狀)과 이기(利己)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한반도공동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 직접적인 삶의 행동으로 한반도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교수로서 엄격하게 가르쳤다. 또한 글을 통해 자신의 그 실질적 고민들을 분출하고 나누고 드러냈으며, 성서번역을 통해 일그러진 한국교회와 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꿈꾸었고, 번역 중에 부딪힌 시를 통해 시인이 되어 목회자라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성과 속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는 문익환이 되었으며,[각주:29] 사회의 전태일 사건을 통해 목회자 문익환이라는 종교적 틀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예수를 따르는 신앙삶으로서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형수,『문익환평전』pp. 193-194. [본문으로]
  2. 명동촌의 신앙을 가진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김약연 목사, 이동휘 선생, 정재면 목사, 한준명 선생, 아버지였던 문재린 목사, 삼촌이었던 이권찬 목사 등 문익환의 공동체적 환경은 그리스도인 즉, 바른 삶(애국)을 살아가는(예수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공동체적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3. 그는 이와 관련하여 방북재판 상고이유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유학감으로서 또다시 사회주의와 대결하지않고 후퇴를 하는 겁니다”(문익환,『문익환 전집 제 5권 - 통일 3』 (서울: 사계절, 1999), pp.88-89.) 또한, 문익환은 유학당시 아내였던 박용길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떠났다(김형수,『문익환평전』p. 818.). [본문으로]
  4. 위의 책, p. 325. [본문으로]
  5. 1963년 12월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전쟁 때문에 학업이 중단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루터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한국인의 기독교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냐는 문제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문익환, "내가 영향 받은 신학자와 그의 저서,"『문익환 전집 제 10권 - 신학 1』(서울: 사계절, 1999), p. 256). [본문으로]
  6.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pp. 614-619. [본문으로]
  7. 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pp. 171-173. [본문으로]
  8. 그 당시 문익환 목사의 별명은 “문이 꽝!”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구약이나 히브리어과목 때문에 낙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성적을 잘 받기 어려웠다. 또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묵과하지 못하는 엄격성 때문에 제자들의 문익환 교수에 대한 불평과 항의가 많았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329-332; 336 참조.). [본문으로]
  9. 1955년 - 4월 세상의 소금, 12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1956년 - 1월 하나와 아흔아홉; 엘리야의 기도와 바알선지자들의 기도;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2월 감사하는 사람, 3월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손님, 4월 오늘이라는 이날; 노아홍수의 교훈, 5월 무엇이 위기인가; 참 지도자, 6월 알지못하고 구하는 기도; 주의 제자들; 가지는 믿음과 주어지는 믿음, 7월 감사하는길, 8월 먼저 구할 것, 9월 그리스도인은 남다른가, 10월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11월 개인의 중요성;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서; 슬픔을 아는 사람, 12월 따뜻한 사람; 불가피한 생. [본문으로]
  10. 예레미야의 인물과 시대, 예레미야의 소명,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 예레미야의 슬픔 등. [본문으로]
  11. “기독교는 곧 아편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중독증에 걸려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문익환,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문익환 전집 제 6권 - 수필』(서울: 사계절, 1999), pp. 16-18.) 문익환 목사가 이와 같은 글을 적은 내면을 알기 위해서 당시 4.19혁명에 대한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의 인식들을 찾아보면, 첫째, 마산학생들의 부정선거에 대한 데모를 공산당 취급하여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서울에서 백리밖에 안되는 땅에 있는 공산당이 어떤 짓을 할지몰라 불안’해하는 내용의 1960년 4월 25일 기독공보 머릿기사가 실렸고, 또한 같은 해 5월 9일자 사설에는 학생들의 데모가 ‘빨갱이들의 조종’으로 몰고 가 반공이라는 이름 밑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함으로써 오히려 북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 ‘반공단체’들을 ‘깡패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족했고 편협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1960년 4월 22일 NCC의 ‘이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건의문’에 의하면,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과된 사명이 기독교적 국가건설과 공산세력에 대결할 중대한 책무임을 확인하고, 3.15선거가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며 이로 인해 발생한 4.19는 경찰의 지나친 억압과 살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중대 사태에 대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공산주의와 싸울 민주주의 기반을 상실시켰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은 이데올로기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pp. 183-188.). [본문으로]
  12. Dietrich Bonhoeffer,『신도의 공동생활』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4), p. 9. [본문으로]
  13. 위의 책, p. 7. [본문으로]
  14. 위의 책, p. 11. [본문으로]
  15. 복음동지회는 장윤천, 장준하, 전경연, 김덕준, 홍태헌, 백이언, 김정준, 전택완, 이호운, 윤성범, 이병섭, 유동식, 유재선, 서남동, 박대선, 김용옥, 이재면, 고영춘, 김찬국, 조선출, 이여진, 박창환, 김하태, 이장식, 문희상, 지원용 등 각 교파 신학교의 중견신학자들이 망라된 단체로, 다달이 월례회와 회보 발행을 하면서도 회칙도 회장도 없는 자원봉사단 체제로 운영되었고, 1956년부터는 ‘임마누엘신학강좌’를 열었고, 1957년부터는 성서 번역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338.). [본문으로]
  16. 위의 책, p. 375. [본문으로]
  17. 당시 한국기독교는 교단분열과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양적 부흥은 되고 있었으나, 목회자들은 사회상황에 휘둘리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가졌었다. 그 가운데 피해와 아픔을 가지는 것은 순진한 성도들이었다. [본문으로]
  18. 위의 책, p. 375. [본문으로]
  19. 문익환,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문익환 전집 제 6권 - 수필』 pp. 300-307. 참조. [본문으로]
  20. 문익환은 이와 관련하여 실 예를 들고 있는데, “나는 얼마 전에 한 청년을 만나 이야기한 일이 있다. 그는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대뜸 “크리스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워놓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쳤더니, 잠언 25장에서는 “피인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은 것 같으니라”가 되어 있는데, 로마서 12자에서는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놓으리라”가 되어 있다. 이러니 그런 인상을 받을 수밖에. 공동번역에서는 “그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워주는 셈이 된다.”로 되어있다. '머리'가 '얼굴'이 되고 '숯불'이 '모닥불'이 되고 '셈이 된다.'는 말이 붙음으로 해서 원수에게 보복한다는 뜻은 사라지고 원수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으로 잘 나타내게 되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381-382.) [본문으로]
  21.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89. [본문으로]
  22. 형수,『문익환평전』p. 388. [본문으로]
  23. 한국 시를 탐독하기 시작, 서가에는 ‘현대시학’ 3호부터 꽂혀있음(위의 책, p. 822.). [본문으로]
  24. 어릴 적 윤동주로부터 자신이 지은 시를 보여주고 부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이현주 목사(동화작가)는 ‘아하, 목사님은 일찍이 윤 시인으로 말미암아 시를 알게 되셨으면서도 그로 말미암아 시를 두려워하시는 구나’라고 말했다(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89-90.). [본문으로]
  25. 문익환, “전태일,”『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서울: 사계절, 1999), pp. 247-250. [본문으로]
  26. 김형수,『문익환평전』pp. 401-403. [본문으로]
  27. 그의 인생을 보노라면, 그가 처음부터 특별했거나 천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심했고 유했으며 늘 고민했다. 그랬기에 윤동주와 송몽규를 보내며 아파했고, 역사에 투신하기 전까지 이데올로기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전쟁의 참상에 절망했고, 시대 앞에 침묵했었다. 그는 늦봄이 되기까지 보통의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본문으로]
  28. 문익환, “전태일,”『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p. 215. [본문으로]
  29. 문익환, “룻의 이삭주이,”『문익환 전집 제 10권 - 신학 1』(서울: 사계절, 1999), p. 526. [본문으로]
Posted by 숑숑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