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목사와 교회공동체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4

숑숑숑~ 2013. 1. 25. 22:34




1. 시대적 상황


C.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


   역사는 서구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이 서구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말한다. 산업적인 배경에서 일하고 선진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며, 고도산업국들의 아류(亞流)가 되는 것은 분명 유혹적이긴 하지만, 필히 독재정치를 경험시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근대화는 발전이 아닌 삶의 뒤틀어짐이며, 진보가 아닌 생명의 죽임이었다. 한반도의 대한민국도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를 명목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근대화를 명목으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독재를 시작했다.[각주:1]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다. 한일정상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민간기업들로부터 한국수출 총액의 1.5배에 달하는 투자를 받아냈다.[각주:2] 또한 미국이 벌이고 있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30만여명의 장병을 복무시켰고, 이에 따라 베트남은 한국기업들의 개척지가 되어 한국강철수출 총량의 49퍼센트와 수송장비수출의 52퍼센트를 흡수하였다.

   독재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허울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착취해 갔다. 한국 노동시장은 외국 자본가들에게는 천국이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미국 임금의 1/10을 받고 2.5배의 생산성을 올렸다. 이러한 산업화를 통해 농촌은 죽어갔고, 가난한 농민의 자녀들은 미숙련(未熟練) 혹은 반숙련(半熟練) 노동자 대열로 흡수되었다. 무너져 가는 농촌에서 나온 10대의 여성들은 부모나 가족을 위해 방적, 편물, 재봉, 신발, 단순조립, 식품가공 등을 하며 과다한 노동시간과 성적학대에도 불만을 낼 수 없었다. 그들의 하루 임금은 다방의 커피 한 잔 값에 해당될 뿐이었다.[각주:3]

    계속되는 독재정부와 산업화의 착취구조에서 한 청년의 죽음[각주:4]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 정세는 갑자기 격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산업화가 만든 희생자가 아니었다.[각주:5] 그는 잊고 있던 한국에 민(民)주(主)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이후 산업화에 대한 투쟁, 독재정부로부터의 투쟁, 민중운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9년 8월의 YH사건[각주:6]을 시작으로 부마시민항쟁 그리고 결국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해방의 기쁨이 분단의 고통이 되었듯,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또 다른 정권을 만들었다. 또다른 군부정권이었다.

   1980년 5월 전국에서는 전두환의 군부가 물러가길, 학원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들이 거셌다. 18일,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戒嚴軍)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신군부의 무차별 진압과 언론통제로 인해 세계는 알아도 한국은 모르는 비참한 현실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군부세력은 형식적인 방법을 갖춰 정권을 득하게 되었고, 박정희정권과 차별성을 강조했지만 결국은 모양은 다르나 본질은 같은 군부독재였으며, 계속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護憲措置)[각주:7]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제 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으나,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것은 군부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각주:8]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냉전과 경쟁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남쪽 내의 민주화 운동은 더 이상 반국적(半國的) 운동을 넘어 통일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이 있었지만 그것은 보기 좋은 허울뿐이었고, 7.7선언 이후 전민련 대표들이 북쪽 대표를 만나러 판문점으로 가다 경찰의 저지를 받거나, 6.10학생회담, 8.15행사 불가 등의 모습을 보면서 문익환은 방북을 결심하게 되고,[각주:9] 결국 김일성 주석을 만나 4.2공동선언을 하게 되면서 통일에 관한 논의는 더욱 강하게 계속 되었다. 이후 1990년대가 되어 독일 통일, 걸프전, 소비에트 해체 등의 국제적 변동과, 국내에서는 3당 야합을 통한 김영삼의 대선성공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1994년에는 4.2공동선언을 함께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이처럼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근대화의 명목으로 시작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가진 독재시대의 시작이었으며, 더불어 함께하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고유의 한반도공동체성은 근대화 즉 경제발전의 과정 속에서 개발과 이익 앞에 무너져간 시기였다. 한국 기독교 역시 경제개발과 발맞추어 ‘양적부흥’이란 허울로 공동체성 없는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전태일 열사 사건 이후 한국 기독교는 사회선교 혹은 양적성장이라는 두 흐름으로 구분되어 발전해나갔다.

   또한 남과 북은 ‘한반도’라는 공동체성를 생각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각기 기득권 사수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이용책을 쓰며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던 민주운동들은 강압과 회유 앞에 좌절되었다. 이러한 좌절의 국내 상황과는 달리 국제정세가 독일 통일과, 소비에트 해체 등으로 이념적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한반도 근대사의 엉킨 매듭을 바로 풀 시작점인 ‘통일’에 대해 사람들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문익환 목사는 이데올로기와 독재로 잃어버린 한반도공동체의 정신을 통일을 통해 다시금 찾고자 방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의 노력때문인지 그 후 통일에 대한 분위기와 관심 그리고 논의들은 고조되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용직 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 1945-1979』p. 457. [본문으로]
  2.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448-453. 참조. 또한 이러한 돈으로 경부고속도로와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는 확보했지만, 근대사에서 다시 꿸 수 없는 단추를 엉망으로 끼워버렸다. 이 점을 가지고 장준하는 박정희를 향해 제 2의 일본에 의한 식민화라고 말했다. [본문으로]
  3. 위의 책, pp. 527-536. 참조. [본문으로]
  4.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5분경, 서울 음대로 들어가는 골목 평화시장 입구 사람들의 틈에 서있던 한 청년이 불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멍청히 바라보다가 어느 누군가 불을 꺼야한다는 말에 술렁대었지만 어느 누구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작업복에 검은 빛 바바리코트를 입은 청년은 한 일 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불길이 상체에 붙어 타오른지 2분후 행인 중 몇 명이 잠바를 벗어 덮어씌웠다. 하지만 불은 점점 더 거세졌다. 시장 경비원은 2층으로 소화기를 가지러 뛰어갔다. 이때 이를 악물고 서있던 청년은 갑자기 벌떡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섰다. 청년의 눈썹과 머리털은 타버렸거나 그을려 불길로 새까맣게 뒤범벅이 돼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달라” 그는 외치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끝내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청년 전태일(23세)은 메디컬센터를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밤 10시 끝내 숨졌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 532. ; 김형수,『문익환평전』(서울: 실천문학사, 2004), pp. 398-399.). [본문으로]
  5.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자 농민들의 집단적 죽음현상을 미리 막아내기 위한 ‘자기몸 저항’이었다(정성한,『삼천리반도 금수강산』(서울: 그리심, 2008), p. 107). [본문으로]
  6.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인 와이에이치 무역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1일 사이에 벌어졌으며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이 되었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535-536.). [본문으로]
  7.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서중석,『한국현대사 60년』(서울: 역사비평사, 2007), p. 192.). [본문으로]
  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558-559. [본문으로]
  9. 1989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 회의를 제의하면서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김수환 추기경, 전민련의 백기완 선생과 함께 문익환 목사를 평양에 초청했다. 이에 백기완과 문익환 목사는 초청수락 성명을 발표했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685-686; p. 829.).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