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목사와 교회공동체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2

숑숑숑~ 2013. 1. 18. 16:49




1.  시대적 상황.


A. 1918년부터 1945년까지


  19세기의 조선은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된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의 전통사회는 안으로는 매관매직 등의 부패와 기존의 양반 지배세력들에 반하는 민중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팽배로 서구열강들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일본이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빌미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이라는 불평등조약을 조선이 체결함으로 인해 일본의 경제적 침탈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이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을사늑약(Eulsa Treaty 1905)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미국과 일본과의 가츠라-테프트밀약(Memorandum of Taft and Katsura 1905)[각주:1], 그리고 헤이그밀사사건(Hague 密使事件)을 구실로 고종이 퇴위되고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 불리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1907)을 통해 조선의 행정권이 빼앗기고, 마침내 기유각서(己酉覺書 1909)를 통해 사법권과 1910년 경찰권까지 빼앗기며 한일강제병합(1910)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치밀한 식민지작업[각주:2]의 과정에서 도처에서 애국운동과 의병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일제는 무단통치를 하게 되었고, 조선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더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 1919년 3월 1일의 국민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국민적 운동은 일본을 당황스럽게 했고, 일본은 강경한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그 노선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문화정치 역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여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보통경찰을 대폭 증가시키고, 치안유지법들을 통해 통제와 탄압을 강화한 것이었다.

  이 3.1운동의 여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와 조선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민족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 중 다수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내세주의적 신앙, 선교사들의 친일경향, 새로운 사상에 대한 경시풍조 등으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각주:3] 그러자 조선사회에서는 그에 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또한 조선사회의 이런 일반의 반(反) 기독교적 분위기에 사회주의의 대두는 여러 문제들을 야기 시켰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기치(旗幟)는 폭력적 방법 등을 통해 기독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그 지향하는 목적과 방향에서 일치점이 있음을 시인하고 수용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통한 기독교 내외부의 자극을 영향으로 사회운동의 전환점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이 넘어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자체를 인정치 않고 거부하면서 기독교는 사회주의를 반박하며 현실적인 개혁운동으로 나아갔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함께 탄압당하는 처지가 되자 양자 간의 이해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각주:4]

  이렇게 3.1운동 이후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여파가 컸고, 일제 또한 문화정치로 한민족 내부로는 분열을 야기 시키는 분할(분열)정책을 펴고, 유학생을 유치하여 장기적인 친일파 양성을 주도하고, 교육정책을 통해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형제인 것처럼 서구열강과의 대결구도를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전쟁준비를 위한 신사참배(神社參拜)[각주:5], 창씨개명(創氏改名)[각주:6], 강제징용(强制徵用)[각주:7] 등을 강요했다. 이러한 조선 나름의 여파와, 일제의 변화는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과 선각자들을 제 3국으로 내몰았고, 한반도 내에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의 침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가지게 만들었다.

  조선의 이러한 일반적 상황 속에서 북간도에서는 또 다른 시대적 상황 즉,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시작되었다(물론 조선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지만 북간도는 더욱 치열했다). 다행히 조선처럼 현실적 삶을 회피하는 부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선각자’의 땅도 아닌 민족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각주:8]

  또한 당시 세계사적으로 1929년 12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북간도에서는 1930년 가을 곡식가격이 폭락했고, 그러한 주민들의 경제상황이 암담해짐에 따라 공산이데올로기는 더욱 활발해졌다. 이어 정치군사적인 대변혁이 잇달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시화 되면서 중국과 일본 양군은 1932년 1월 1일부터 산해관(山海關)에서 충돌하여 5월 31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일본이 동삼성(東三省)과 열하(熱河) 및 내몽골 동부를 판도로 하는 ‘만주국’을 세웠다. 이러한 만주국의 생성은 노골적인 일제의 북간도 침략을 뜻했고, 더 이상 북간도의 민족적 교육기관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도 북간도도 일제의 제국주의적 허망한 야심의 끝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또한 경험하고 있었을 상황에 갑자기 뜻하지 않게 해방이 되어버렸다. 해방은 낯선 손님과 같았다. 그나마 해방 이전에는 이념들 간의 논쟁이 있어도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서로 일치되었지만, 갑작스런 해방‘됨’에 이념논쟁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고, 그것은 엄청난 혼란이 되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보면, 사회주의세력들의 확산이 계속 조선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항복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화도 싫었고[각주:9], 조선이 중국이나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 또한 싫었다.[각주:10]

  이처럼 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가고 타의에 의해 해방되어가는 상황으로서, 기존의 유교적 한반도공동체의 정신이 멸절되고 그 공백을 기독교의 정신이 채우는 듯하지만, 이도 이데올로기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게 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공동체정신이 분열되고, 강대국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해방은 이루어지지만 곧 공동체정신의 분열처럼 남과 북으로 나눠지는 모습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이 밀약은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일본과 한 밀약으로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당시 선교사 알렌이 미국정부의 공사가 되었고,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행동에 대한 보고와, 조선인의 호소를 무시된 것은 이미 알렌이 미국정부로 소외되었고, 조선내 미국공사의 지위가 내려갔음을 말한다. 가츠라-태프트조약 이후 미국은 알렌의 공사직을 경질시키고,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기도 한다(김승태, “한말 일제침략기 일제와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 6(1997): 65-100. 참조.). [본문으로]
  2. 1905년부터 문란한 화폐정리를 핑계로 3백만원을 차입하고, 금융공황 구제로 1백50만원, 교육제도 및 도로항만 개수 및 확충으로 1천만원 차입하는 등의 차관공세에 조선정부는 원금만 1천6백50만원 채무를 가지게 되었다(조항래,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일제경제침략과 국채보상운동』(성남: 아세아문화사, 1994), pp. 61-63. 참조.).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기존 조선의 토지제도를 해체하여 원활한 식민지내 상품과 자본 수출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서류신고를 하지 못한 토지는 국유화하여 조선총독부가 대지주가 되었다(한국 민주사 연구회 편,『한국민중사 1』(서울: 풀빛, 1986), p. 129.). [본문으로]
  3. 3.1운동 관계 피검자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총 19,525명에서 기독교인은 3,426명으로 17.6%를 차지하고, 특히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이르며, 이들 기독교가 당시 총인구의 1.5%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려하고, 이들 모두 과격시위자가 아닌 주동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박해에 따른 자체 내의 분위기와, 일제의 선교사정책에 따른 분위기들이 3.1운동 이후 한국기독교가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한국 기독교사 연구회,『한국기독교의 역사 2』(서울: 기독교문사, 1991), p. 38. 참조;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서울: 기독교문사, 1998), pp. 408-419. 참조.). [본문으로]
  4. 김권정,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한국기독교와 역사』 5(1996): 78-116. 참조. [본문으로]
  5. 신사는 면 단위로 다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신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고 어떤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마다 그 곳에서 절했으며, 아침마다 황국신민서사(“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라고 낭독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독립을 외친다던지, 신사참배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하던 이가 없었을 만큼 사회적 분위기는 그 만큼 힘들었다. 그랬기에 1935-45년 사이 조선의 분위기는 심각했다(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 pp. 494-500. 참조.). 이와 관련하여 1936년 5월 가톨릭의 신사참배 허용을 시작으로, 1936년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1938년 장로교까지 신사참배에 굴복되었다(위의 책, pp. 503-506. 참조.). [본문으로]
  6. 일제의 압제 하에 학교에서는 우리말(한글)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으며,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교육기관의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선생 중 몇 명 또한 일본인이었다. 자신의 성도 쓸 수 없도록 창씨개명을 하도록 하여 이름까지 다 바꾸고 자신의 문화와 가족의 역사를 말살하여, 철저히 일본에 속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몇의 사람들은 일본사람을 따라다니거나 그들에게 아첨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이런 친일파들은 부역이나 여러 공출 같은 것들을 빼주는 대신, 동네주민의 생활을 보고함으로서 농사짓고 숨겨둔 것들까지 모두 빼앗아갔다 [본문으로]
  7. 아이들은 학교수업의 일환으로 동네구석구석의 깡통, 철 등을 주워오고, 집안에 있는 놋그릇, 제사 때 쓰는 제기조차 모두 헌납해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쓸 총알을 만드는데 썼다. 또한 농사했던 곡식이나 먹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빼앗는 공출을 보냈고, 심지어 소나무 솔방울, 싸리나무 껍질까지 공출 안한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서 먹을 식량마저 다 뺏기고, 만주에서 콩깻묵이라는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끼로 가축의 사료나 비료 따위로 쓰이는 것’을 먹으면서 배를 채워야 했기에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장로교회는 1939년 4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교회 종을 떼어내어 탄환과 비행기로 만들어 헌납하기도 하였다(위의 책, pp. 524-534. 참조.). [본문으로]
  8. 이 사상적 대립을 통해 명동학교는 그 이름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알제가 ‘명동’이란 이름을 개명시키려 부던히 노력했음) 학교 경영권을 공산당에게 넘겼고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인민학교로 바뀐지 6개월도 되지 않아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학교로 강제편입 되었다. [본문으로]
  9.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서울: 삼인, 1999), pp. 139-140. 참조. [본문으로]
  10. 이혜숙,『미군정기 지배구조와 한국사회』(서울: 선인, 2008), p. 6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