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목사와 교회공동체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8

숑숑숑~ 2013. 3. 21. 21:15




Ⅳ. 문익환의 ‘교회공동체’의 의미와, 그 과제



A. ‘교회공동체’의 정의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의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간다. 이렇게 인간의 공동체에서는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적 이해를 통해,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 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각주:1] 그러므로 이런 교회공동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삶 전체를 이해해야한다.


   예수의 삶 전체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각주:2] 이것은 예수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통해서만 조명됨을 뜻한다.[각주:3]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현실과 상관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거나, 실재가 아닌 하나의 상징 혹은, 신화론적 표상 등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교회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에게 직접 도래하기보다, 교회공동체를 통해 개인에게 다가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일치시키거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피조물 세계에 종속시켜서도 안 된다. 즉,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가 아무리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공동체의 차이는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각주:4]


   이 점에 있어서 개인과 교회공동체와의 관계를 보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각 개인은 무한자에 대한 이해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곤고히 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피조물 세계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교회’ 안에 자연스레 종속시키는 제도적인 굳어짐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보다, 교회공동체 자체의 존립을 더 중요시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교회공동체는 제도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섯 가지 패러다임을 구분하면서, ‘패러다임‘에 대해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 가치 · 행동양식 등의 총체적 상황”[각주:5]이라고 말한 쿤(T. S. Kuhn)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한스 큉이 교회공동체 역사의 ’패러다임‘을 구분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본질적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그에 응답인 교회공동체의 총체적 상황들(발생, 성장, 경직화)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와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함에 있다.[각주:6] 즉, 앞서 말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공동체의 상관관계를 ’패러다임(시대적인 상황과 고착화과정 그리고 문제해결)‘으로 구분함으로서,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교의 변하지 말아야할 본질과, 변해가는 시대 속에 교회공동체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각주:7]


   이렇게 한스 큉은 교회공동체에 대해,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하나님 나라의 열매이자 통로라고 말하면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게 그 존재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각주:8] 이에 관련하여, 몰트만은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는 없다."[각주:9],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각주:10]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참된 존재를 갖고, 교회공동체의 독자적인 존재론을 배제하며 그리스도의 활동 역사를 기술하는 것만을 허용한다고 말했다.[각주:11]


   이처럼 교회공동체의 존재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공동체의 머리’이며,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스 큉은 말한다. 또한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해소하거나,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각주:12]


   이에 대해 몰트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사도직과 성례전, 그리고 작은 형제들, 파루시아가 바로 그것이다.[각주:13] 우선 첫째, 사도직과 성례전에 대해 몰트만은 '사도직'이라는 말을 일차적으로 선포의 의미로 두었다. 즉, 사도적 말씀 선포에 의해 그리스도는 임재 한다. 또한 성례전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는 매개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신앙공동체 속에 임재 한다고 보았다.[각주:14] 둘째,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계신다고 보았다.[각주:15] 즉, 예수는 역사에서 소외받고 가난한 보편적인 이들 모두 가운데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 세계 혹은 교회공동체 속에서만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받는 어느 곳에서나 함께 하심을 의미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파루시아를 약속하셨다. 몰트만은 단순히 이 파루시아를 ‘임재’ 혹은 ‘재림’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미래를 말한다.[각주:16]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저 ‘시간’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질적 변화의 삶을 요구한다.[각주:17]


   그러므로 몰트만이 의도하는 교회공동체는 기독론적인 토대에(예수를 뿌리로), 종말론적인 방향으로(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성령론적으로 현재화된다(교회의 임무).[각주:18] 즉, 교회공동체의 각 개인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으며, 역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메시아적 공동체로,[각주:19] 이 공동체 안에 속한 모든 이는 카리스마적 존재로서 우월이 없이,[각주:20]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제자들이다. 이러한 제자도의 실천은 교회 내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이는 이 세상을 향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는다.[각주:21]


   또한 교회공동체를 한스 큉은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他者)에게 개방하는 자세의 보편성[각주:22]을 가지고, 사도의 정신[각주:23] 즉 그리스도의 뜻과 일에 맞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섬김[각주:24]을 강조하며, 교회공동체는 계급질서가 아닌 섬기는 봉사라고 정의한다.[각주:25]


   정리하자면, 한스 큉은 교회공동체의 핵심을 기존의 교회공동체 틀 안에서 참 교회공동체를 조명하고 있고, 몰트만은 참 교회공동체(메시아적 교회)를 정의하며 기존의 교회공동체 틀을 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몰트만과 한스 큉은 참 교회공동체와 그것을 향한 역사적 교회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함에 있어서, 한스 큉의 견해와 몰트만의 견해는 서로 상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각주:26]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인가?


   교회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스 큉과 몰트만의 견해에서 핵심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역사로서(=아래 머무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로서 교회를 뜻한다. 즉,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며, 교회 자체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체에 사회를 향한 문턱 혹은, 사회에 대한 문턱을 없애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자인 몰트만과,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의 견해에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 가운데 차이는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전통’[각주:27]에 있다. 그 전통이 교회공동체(가시적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우주적 사역’으로서 사회공동체(비가시적 교회)가 있기에, 각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사회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서 ‘교회공동체’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교회공동체’ 사이에 인식범위 차이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진 교회 그 자체로서 교회는 진정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다. 교회공동체와 공동체 안에 속한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코람데오와 마라나타’,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와 미래적 임재’[각주:28],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역사와 사회 가운데 존재할 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참 의인’이라 칭해질 것이며, ‘참 교회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성 없는 교회는 없다.’[각주:29] 본회퍼는 이것에 관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서 교회를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라고 말했다.[각주:30]


   본회퍼는 “각 개인은 타자(他者)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각 개인은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각 개인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타자(他者)가 존재해야 한다.”[각주:31]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해 삶을 살고 죽고 부활 하셨듯, 자신과 공동체를 타자(他者)를 위해 내어줄 때, 진정 각 개인과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공동체성’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고립상태에 있는 개인의 역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 공동체의 역사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을 흡수해버리는 그와 같은 공동체를 원하지 않으시고 여러 인간의 공동체를 원하신다. 공동체와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것이며 서로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집단적인 통일성의 구조와 사회적인 통일성의 구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질적인 것이다.[각주:32]


   이처럼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곧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며, 이는 곧 타자(他者)를 위한 그리스도,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이다.[각주:33] 또한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는 이런 그리스도와 같이 타자(他者)를 위해 행동할 때, 참이 된다.[각주:34]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 그가 온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홀로 은둔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의 원수들 한가운데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치 않고, 벗들 사이에나 있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이여,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했다고 하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각주:35]


   교회공동체는 무엇인가?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사회의 소외된 모든 이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타자(他者)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진다. 교회는 사회에 예수란 빛의 조명이 되고, 사회는 교회의 존재이유와 바라봐야 할 방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태양의 유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기독교 윤리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타종교와 그리스도교가 맞닿아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통해 예수의 빛이 그들에게 전해진다고 말했다.[각주:36] 본회퍼는 이런 바르트를 넘어, 세상 속에 타자로서 삶을 살 때 우리 자신(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은 진정 ‘존재’하며 ‘참’이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타자에 의해서 ‘존재’된다. 마치 예수가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미 교회가 되었듯, 제자들이 도망치려했던 그곳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내어줬을 때 교회공동체가 성립되었듯,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하거나 교회자체 존립만을 위해서는 ‘참’이 될 수 없다. 세상이나 원수 속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자(他者)의 삶을 살 때, 우리를 '위한' 존재는 우리를 위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절대 겸손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각 개인의 삶이자, 사회를 향한 생명과 의와 평화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Dietrich Bonhoeffer,『그리스도론』이종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p. 80. [본문으로]
    2. Hans Küng,『교회』정지련 역 (서울: 한들, 2007), pp. 61-72. 참조. [본문으로]
    3. 이와 관련하여 몰트만은 “그는 인격으로 온 하나님의 나라다.”라고 말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본래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예수를 바라보아야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본래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Jürgen Moltmann,『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이신건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15-16.). [본문으로]
    4.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신학과 목회』20(2003): 171-176; 182-188. [본문으로]
    5. 한스 큉은 패러다임의 정의에 대해 T.S. Kuhn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Chicago 1962)'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본문으로]
    6. Hans Küng,『그리스도교』이종한 역 (칠곡: 분도, 2002), pp. 25-100. 참조. [본문으로]
    7.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이홍근 역 (칠곡: 분도, 1978), pp. 15-45; 한스 큉은 이에 관해 그리스도교와 교회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비밀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온갖 비본질적인 것들을 헤치고 언제나 다시금 힘차게 뚫고나온 역사"라고 말한다(Hans Küng,『그리스도교』p. 969.). [본문으로]
    8. Hans Küng,『교회』pp. 55-140. 참조. [본문으로]
    9.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박봉랑 외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p 80.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40. [본문으로]
    11. 위의 책, pp. 217-218. [본문으로]
    12.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85-93. [본문으로]
    13.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77. [본문으로]
    14.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pp. 140-142. [본문으로]
    15. 마 25:31-46에 나타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가 동일시하였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위의 책, pp. 142-147. 참조.). [본문으로]
    16. 위의 책, pp. 283-285. [본문으로]
    17.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78-179. [본문으로]
    18. 위의 책, 175. [본문으로]
    19.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pp. 317-337. 참조. [본문으로]
    20. 위의 책, p. 21 [본문으로]
    21.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87-188. [본문으로]
    22. 한스 큉은 이것을 ‘보편성’이라고 말한다(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127-137. 참조). [본문으로]
    23. 몰트만의 사도직에 관한 부분과 그 강조점이 다르지만, 교회론적 의미에서는 크게 몰트만과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24. 한스 큉은 이것을 ‘사도성’이라고 말한다(Hans Küng,『교회』pp. 493-514. 참조.) [본문으로]
    25.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153-194.참조. [본문으로]
    26. 물론 교회론에 관한 논리를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몰트만은 역사나 시대적 교회공동체의 전개를 하지 않고, 참 메시아적 교회공동체에 대해 정의하고 있고, 한스 큉은 역사 시대적 교회공동체의 비 본질을 하나씩 벗겨나감으로서 참 교회공동체를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한스 큉과 몰트만은 논리 전개의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교회공동체에 대한 한스 큉과 몰트만의 견해는 아주 많은 부분이 상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7. 몰트만의 경우는 사도직과 성례전, 한스 큉의 경우에는 하나됨 · 보편성 · 거룩성 · 사도성을, 본회퍼의 경우는 성례전과 말씀을 교회 전통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8. 자가 쓴 ‘현재적 임재와 미래적 임재’의 개념은 몰트만의 ‘파루시아’에 대한 이해와 상응한다(Jürgen Moltmann,『예수 그리스도의 길-메시아적 차원의 그리스도론』 김균진 외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435-474. 참조.). [본문으로]
    29. 여기서 공동체성이란,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로의 공동체성(그리스도적 공동체)을 말한다. [본문으로]
    30. 정지련, “디트리히 본회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과 한국교회,”『기독교사상』10(2006): 95-96. [본문으로]
    31.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hg. v. J. v. Sossten, DBW 1,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6) p. 30. 고재길,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37(2010): 129.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2.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hg. v. J. v. Sossten, DBW 1,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6) pp. 50-51. 고재길,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37(2010): 13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3. 유석성.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 사상,"『신학과 선교』 18(1993): 169-195. 참조. [본문으로]
    34. 본회퍼의 이러한 인격개념은 결코 철학적 인격개념이 아니며,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행위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 구별 속에서 신적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김재진. "본회퍼의 계시 현상의 실체적 해석학."『해석학과 토착화: 靑破 김광식 교수 회갑 기념 논총』(서울: 한들, 1999), pp. 173-196. 참조.) [본문으로]
    35. Dietrich Bonhoeffer,『신도의 공동생활』 pp. 19-20. [본문으로]
    36. Paul Knitter,『종교신학입문』유정원 역 (칠곡: 분도, 2007), pp. 54-5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