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신학적 궁금점들

그리스도교 공동체성과 교회 공동체성

숑숑숑~ 2013. 2. 12. 17:47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 이후 교회공동체는 생겨났다.

  그것을 그리스도교 교회라고 하고, 우리는 분명히 머리된 예수를 위시하여 그 공동체성을 발현한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 교회 공동체성과, 2천년전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성은 과연 동일할까?

  특히 이 나라 현재의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과 지금 현재 교회 공동체성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에 대해 분명한 정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성





  그리스도교가 생성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과 승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두려웠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여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절기를 맞아 리더를 잃었던 현재의 상황을 어찌할 바 모른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래 이스라엘공동체성을 알아야한다. 그들의 과거가 곧 현재이며 그들의 그 현재를 통해 그리스도교 교회와 그 공동체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공동체는 종교공동체로 그들을 인도하여주시는 '야훼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공동체성'을 가진다. 그 이스라엘공동체성은 토라 및 신명기역사서를 중심으로 4가지 강조점을 가진다.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뭐 공동체의 중심이 당연하지. 이걸가지고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에 시각을 돌리는데 사실 이스라엘공동체로부터, 향한, 위한 개념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했음 좋겠다.(구약이란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스라엘공동체를 '위해'있음을 안다면)


둘째, 타 공동체성 배제 

보통 가나안 배척이라고들 표면적으로 말하는데 사실 타공동체성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서 자신들의 공동체성 유지를 그 목적으로 가지지. 이것은 다른 국가와 민족이 가지지 못한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성서에서 말하는 악한 왕들의 개념이 단순히 '우상숭배'의 문제라기 보단(물론 표면적으로 우상숭배맞다) 이스라엘공동체만의 '왕'의 개념을 고수하지 못하고 타 공동체성 안의 왕의 개념을 가져온 자 혹은 '야훼'공동체성을 배제한 경우 '악하다'라고 평한 것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셋째, 성전 강조

이것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강조함으로서 (사실 이 강조는 드러나는 표면적 '장소'의 강조보다, 그 '장소'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라 말할 수 있다) 야훼공동체 즉, 이스라엘공동체의 구심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외의 예배장소를 배격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타민족공동체성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다.


넷째, 사랑의 공동체

필자는 이 네번째 부분을 주목하고 싶은데, 앞서 위의 세가지는 이스라엘공동체성의 구심을 말한다면, 이 네번째 것은 그 구심으로부터의 시작되는 공동체성을 말한다(신25:1-11). 토라 및 신명기역사서의 많은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공동체 구심인 야훼 하나님은 철저하게 가난한 이들(고아 과부 나그네 레위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함으로서 공동체적 내적 구심인 야훼하나님을 통해 이스라엘공동체의 외적 구심을 가짐으로서 그 공동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네가지 부분은 '오택현'교수의 논문과 연구에 동의하며 인용, 나름의 해석을 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예수의 승천이후 유대절기를 맞아 또 그 난처한 상황 속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여있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두려워 떨던 그 무리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

  마치 성부 하나님을 구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시작처럼(신25:5-9), 또 그 이스라엘공동체에게 성령 하나님을 통해 약속하신 말씀(욜2:28-29;행2:17-18) 그것을 이루려는 것처럼.. 율법은 예수를 통해, 할례는 성령을 통해.. 더이상 역사 속에서 그 야훼공동체성이 훼손될만한 여지(기득권)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가시적 하나님과 교통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고(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그들은 당시 문화에 의한 계급과 차별을 배격했으며(둘째, 타 공동체성 배제), 그들은 모여 함께 떡을 떼며 잔을 나누고(행2:42)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들의 구심을 잃지 않고 분명히 인식하였으며(셋째, 성전강조), 그들은 그러한 내적 구심점을 가지고 현실의 환경을 뛰어넘는 외적 구심을 만들어냈다(넷째, 사랑의 공동체).



  자, 정리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교 본래의 공동체성은 어떠한 건물이나 지도자에 의한 구심이 아니라, 오로지 말 그대로 역사속 현현하신 성자 하나님을 자신의 이해가 아닌 교통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서 그리스도교회 공동체성의 내적 구심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된다.

  또한 내적 구심을 통해 그들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공동체가 된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바로 당시 문화적 가치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현실의 공동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이루어냈다(행2:44-46).






교회공동체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교회공동체는 이런 공동체성을 잃어버릴때가 많았다. 예전에 사랑의교회 건축관련한 토론의 발제를 맡아 적은 글을 첨부해볼까 한다. 제목은 '대형교회에 구원이 있을까?'다. 갑자기 필자가 글을 쓰기 귀찮아져서(배가 고프다ㅋㅋㅋ)라곤 말못하겠다.ㅋㅋ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특별히 교회공동체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 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간다. 교회공동체 또한 예수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한자에 대한 이해를 교회 공동체를 통해 곤고히 한다.


  그럼에 있어서 교회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제도적인 굳어짐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고, 사회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적도 많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보다 교회공동체 자체의 존립을 더 중요시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교회공동체는 제도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 한 예로 예수시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이 그러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 개신교가 그러하다.


  일찍이 본회퍼는 교회를 ‘사귐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 보았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의 일원인 우리의 사귐을 통해 그리스도는 존재하시는데, 그 사귐이란 예수께서 원수들 가운데 사셨고, 자기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 위에서 홀로 조롱당하시며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셨듯, 우리도 '예수를 따름'으로 원수들 가운데 사는 것(사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보면, 교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여 그들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를 나타내신다. 이 무리가 하나님의 집(딤전3:15)이요, 그리스도의 몸(엡1:23)이며, 성령의 전(고전3:16)이다. 이 무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성도들인데 이를 가르켜 거룩한 공회 곧 교회라 한다. 교회는 두 가지 구별이 있으니,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보이는 교회는 온 세계에 산재한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이다“

  이렇게 헌법을 통한 교회공동체의 정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로서 인간 스스로 틀로서 교회를 넘은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신앙은 무엇이며,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공동체성 없는 개인구원이 과연 진정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뜻하는가?



자, 현재의 한국교회를 보자. 그리고 그 안의 공동체성을 생각해보자.
앞서 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이 과연 한국교회에 있는가?

흔히들 말한다.
"너희 교회는 얼마나 모여?"
"나 00 교회다녀? 이름들어봤지?"
"목사님이 대단하신 분이신가보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한다.
"큰 교회, 좋은 차, 좋은 옷 무슨 대기업도 아니고.."
"저렇게 큰 교회지을바에는 주위에 사람들 돕겠다."
"주위에는 허름한데 교회만 번쩍거리는 구나"

  위의 글상자처럼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교회자체와, 목사들을 들먹이며 '공동체성'을 논한다. 또한 믿지 않는 이들은 교회를 보며 '다른 공동체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가 가는가?
자, 쉽게 다시 정리해본다.

1. 무엇이든지 자신들의 교회 자체'만'을 보거나, 그것이 대형화되면 그것은 본질과 비본질의 주부를  바꾸어버릴 위험이 생긴다. 즉, 유지를 위해 원래의 본질을 버릴 수 있게 된다.

2. 체계화된 시스템은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예수가 가르치고 삶으로 보인 사랑의 요소' 혹은 '예수에 의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성'을 현격한 법과 규율로 바꿔버릴 수 있다.

3. 그렇게 되면 교회는 두 가지 관(view) 중 하나를 가지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 첫째, 교회의 유지를 위해 소수의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위주로 움직일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교 공동체성 즉 머리된 예수가 아닌 교회 안에 수많은 여러 시각과 주관적 가치관, 운영의 모습, 가운데 매우 보편적인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법적인 매임의 관점하에 움직일 것이다.

  자.. 이해가는가?
  필자가 설명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은, 현재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같지 않다. 현재 한국교회 공동체성은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이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성이라 말할 수 없다. 스스로의 유지와 부흥과 목적을 위해 있는 도구일 뿐이지, 더이상 예수를 머리로, 또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들이 모인 몸'이라 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어느 교회의 중심이 된 '삼박자 구원(요삼 2절)'은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샤머니즘적이고 기복적인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몰핀인가?
  어느 교회의 중심이 된 '제자화'는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을 위한, 역사 속 현현의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한 그 '제자화'가 맞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모이는 교회라는 곳을 위한 '제자화'가 맞는가?
  어느 목사의 논문표절은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편안한 왕좌를 위한 스펙쌓기 일 뿐인가?
  어느 목사의 성추행과 사임 그리고 새로 개척한 ㅎ대ㅅ교회는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성서비스를 받기 위해 혹은, 목빠를 위한 해소장소인 것인가?
  복 받기 위해 교회가고, 신비한 혹은 기적적인 은사주의와, 열광주의적 신명남을 위해 교회에 가고, 정보교류의 목적, 사업의 목적으로 교회가고, 목사가 어떤 잘못을 하든 '주여'라고 울부짖으며 용서하는 분들은 과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위해서 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고 생각하고 만든 스스로의 '교회'와 스스로의 '하나님'을 잃지않고 유지하기 위해서인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이 없는 어떤ㅋ 일부의ㅋ 한국교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그렇다면 님들 좋아하시는 그 '구원'을 위해 지금 해야할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요약 : 한국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은 한국교회 공동체성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의 상실에서 온다. 공동체성이 다르다는 건 교회 머리되신 예수의 의미도 다르단 소리고, 그럼 구원은 어디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