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신학적 궁금점들

앙드레지드의 '좁은문', 예수의 '좁은문 그리고 박성업의 '없는문'

숑숑숑~ 2013. 1. 6. 23:14

 

 

1. 사람들많이 모인다고 그게 '공동체'가 되느냐? 묻는다면, 난 '아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할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그런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그리스도시다!'란 것을 고백하며 시작된 공동체는 다양한 패러다임 속에서도 그 본질(주는 그리스도시다)를 놓치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의 시간동안의 고백을 인정하지않고 그저 모였다고 공동체라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주의 몸이란 '공동체'는 그저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또한 신앙을 정의하기에 있어서 내가 믿은 것이라 말한다면, 난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보고 내가 깨닳은 것은 나의 가치관과 이 시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해석한 한낱 '나의 감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나와 신의 질적차이를 그렇게 쉽게 단정짓는 가벼움이 아니다.
 
3.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사귐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신앙 혹은, 나와 비슷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의 부정이다. 신앙이란 2천년전 그네들의 가슴벅찬 고백 '주는 그리스도이다'의 현재성이며, 공동체란 그 고백의 중심을 패러다임에 빼앗기지 않고 꿰뚫는 이들의 따름과 합이다.
 
4. 난 이 시대적 패러다임을 한스 큉의 5가지 패러다임을 넘어 여섯번째 개별다원주의적 패러다임이라 말하고 싶다. 마치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각자 소견대로 행했다'의 재림이라 생각한다. 이어져온 공동체성도 신앙성도 아닌, 뚝 떨어진 자기만의 주장과 시대적 패러다임에 함몰을 신앙이라 말하고 믿음이라 말한다.  모두들 단어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나 진정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단지 각 개인이 만들어낸 자기의 '신'일 뿐이지.
 
5. 어릴적.. 그것도 아주 어릴적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을 대구 지하도 헌 책방에서 사서 읽었다. 초딩에게 헤르만헤세니 버트란트러셀이니 그런 책들이 취미였다니 우습지만. 어쨌든 난 '좁은문'을 읽으며 도무지 이해가 어려웠다. 이해가 안된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돌직구의 삶이 아니라 죽음과 기다림을 선택한 것인가가 이해가 안가서였다. 그러나 목회자인 지금 이해가 된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한, 그리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의 '좁은문'을 선택한 것이겠지.
 
6. 예수의 좁은문.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팔복의 설명 중 말미에 좁은문을 말씀하신다. 좁은문의 구체적 의미는 팔복을 받는이들의 상황 속에서 해석되어야한다. 가난한 마음을 품고, 애통해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는 사람 등 그런 이들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 이들이다. 예수는 아주 친절히 자신의 삶으로 좁은문의 의미를 직접 몸으로 말씀하셨다.
 
7. 비록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에서 나온 주인공의 결단은 자신의 삶의 자리 안에서 자신에게만 이해되어지는 좁은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 자신이 믿고자 한것을 믿은 것이라 볼 순없다. 하지만 오늘날 종북좌파척결을 말하고, 말도안되는 자신만의 성령론을 구사하여 무지한 이들을 꾀어내거나, QT를 통해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성서의 절대적 해석으로 이해하거나, 자신의 힘든 과거를 해소하는 동호회같은 모임이 '좁은문'이라곤 말 못하겠다. 그들에게 '예수'는 2천년전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을 경험하고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한 이들의 '예수'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없는문'을 좁은 문이라 꾀는.. 마치 가라지를 덧뿌리는 '원수'의 모습아닌가? 그들은 시대의 패러다임에 함몰된 가치관으로 시대의 조류에 넘실거리는 이들을 낚고 그것이 '신앙'이라, '공동체'라 하고 있지 않은가?
 
8. 우리에게 신앙이란, 홀로 믿어진 것이 아닌 너무도 값비싼 은혜의 선물인 동시에 2천년전 이들과의 동일한 고백이다. 우리에게 공동체란, 동떨어진 나만의 생각이 아닌 철저히 전적 타자의 질적 차이를 경험한 겸손한 이로 2천년전 '우리가 그를 죽였다'의 고백의 현재적 모임이겠지. 
 
9.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말은 나'만'이 아닌 '우리 함께' 그것도 수천년을 이어져온 신앙(고백)이며, 공동체(삶의자리)에게 하는 말씀인지 모른다.
 
 
 
그대들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좁은문을 향하고 있는가?
 
 
 
 
ps. 박성업의 이름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딱히 그 사람만 까고 싶은 가치를 못느끼기 때문이죠.
      다만, 그로 대표되는 혹은 그와 비슷한 모순의 한국기독교 문제가 많기에 
      제목에는 그 이름을 좀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