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신학적 궁금점들

종교다원주의와 구원에 대해.

숑숑숑~ 2012. 12. 27. 16:17




아마 이 글을 적음에 있어서, 몇 가지 부분을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1.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의 경우 우선 원론적 정의를 알려드릴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신학적 입장의 경우 크게 분류하면 3가지인데, 딱 이 분류로만 볼 수 없다는걸 유념하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 정의부분은 객관적 정의는 첫 부분에, 그 뒤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보는 종교다원주의입장을 적었음을 이해바랍니다.
'2. 구원에 대해'의 경우 구원론의 개념이 무척이나 방대하기 때문에 
제가 적은 글'만'으로 구원을 다 이야기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등 너무 방대한 교회적 전통과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적다보니 조금 산만합니다 이해바랍니다.

 


1.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우선 다원주의는 가치의 다양성이 허용되고 존중되어 소수의 입장과 가치관이라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사상 혹은, 
개인이나 여러 집단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는 14-16세기 르네상스 이후로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한 문화나 종교권이 아닌 다른 문화와 종교 간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생겨난 것으로  
절대적인 종교나,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다원성과 다수의 진리를 말하고 주장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렇게 21세기가 되면서 넓게는 세계, 좁게는 대한민국 역시 커다란 하나의 인류공동체를 인식합니다. 
그러자 언어, 문화, 이념, 종교는 충돌할 수밖에 없고,
어떠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서 현 시대는 다원주의적인 모습으로 화해와 화합을 종용하는데, 
그럼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과거 어떠한 상황보다도 혼란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입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딱 이 세가지로 분류되거나 나눠지진 않습니다. 즉, 위의 분류는 이해를 돕기 위한 단순분류라는 말이죠.)

배타주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인격적 만남과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고백을 동반한 믿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1970년의 프랑크푸르트 성명에서 사도행전 4장 12절의 성경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지요. 
오직 참된 종교도 하나이며 나머지 종교는 오류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포용주의는 칼 라너에 의해서 주장되는데, 
그에 의하면 기독교가 구원을 위한 절대종교인 것은 틀림없지만 타종교들도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위한 정당한 종교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타종교들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죠. 
즉, 라너는 타종교들 속에서 그리스도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라너는 기독교만은 타종교들과는 달리 그 무엇에 의해서도 추월될 수 없는 절대적 종교라고 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과 죽음, 그리고 부활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계시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타종교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더욱 풍성히 알도록 경험하게 하는 단계로 진입시키는 것이 선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라너는 타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간과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의 역사는 수많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역사 중 하나일 뿐이지 
그 역사만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의 역사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힉, 니터, 파니카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구요. 
특히 폴 니터는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수 있듯이 구원의 길도 다수일 수밖에 없다는 파니카의 비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존 힉은 모든 종교는 동일한 신을 섬기며 여호와, 알라 등은 동일한 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다원주의를 주장했습니다.

 

2. 구원에 대해.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할 때, 아주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점을 이해하셔야 큰 시야에서 '구원'이란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구원'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두번쨰, '구원'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세번째, '구원'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이 관련 글을 적은적이 있으니, 짧게 짧게 가겠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링크 글을 참조하시면 될거 같습니다;
첫번째, 구원의 결정권자는 '하나님' 한 분 입니다.
두번째, 구원이란 뜻은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것입니다.
(때가 이르렀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란 것이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뜻하는 것은 단순하게 한가지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1. 마음.
2. 죽고나서 가는 나라.
3. 이 현실 그 자체.
이 세 가지 모두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이해할때 이 세가지 모두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도 단순히 '죽어서 가는 곳에 대한 결정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창조목적대로 회복됨을 뜻합니다.

세번째, '구원'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바로 요 부분을 오늘 집중적으로 다뤄볼 생각입니다.
자,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결정지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왜냐하면 역사에서 하나님은 늘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가 그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성취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6:46 참조)

그럼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예수'란 분이 가장 중요하지요.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제 의도를 아시겠지만.. 모를 분들을 위해 설명드립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신 동시에, 살아있는 '말씀' 그 자체시요, 우리가 바라보고 쫓아가야 할 '지표'이며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별 생각없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예수님'이 왜 중요하냐고 물으면(좀 과격하게 말해본겁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만 말합니다. 
틀린 말 아니예요. 맞는 말인데.. 답으로 말하자면.. 주관식의 답이 아닌, 객관식의 답 정도이죠.
왜냐? 굳이 전지전능한 그 분이 '예수'란 이름의 인간으로 오셨는가(태어나시고, 사셨는가)?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물론 똑같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시기 위해서'라고 앵무세처럼 말씀들 하겠지만.. 
이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성에서 '신학화된 한 부분'이란 거죠.
역사에서 보면 한 사건의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원인, 발달, 과정이 있습니다.
덜렁 '예수'의 존재의 중요성을 말할때 앞서 말한 죽음과 부활'만' 말한다면 그 전의 예수의 삶과 말씀은 무엇인가요?
단순 그 삶의 과정이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의미없는 한 과정이었을 뿐일까요?
왜 이 부분이 중요할까요? 
예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성장하시고, 사셨고 말씀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이 통전적 예수의 삶이 중요한 이유는
위 1번에서 언급한 종교다원주의의 부분에도 매우 중요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이것(기독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믿는 사람들이나, 타종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는게 '왜 예수가 굳이 왔냐?' 이겁니다.
조금 달리 우리스스로들(그리스도교인들)에게 묻는다면, 왜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겁니까?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그 '말씀'으로 창조된 한낱 피조물을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죄 없으신 분이 죄있는 한낱 창조물을 위해 '죽기 까지 섬기셔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아이러니 때문에.. 이 아이러니한 의미만 우리가 진정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지, 또 예수께서 왜 '구원자'가 되시는 것인지 정말 이해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우리에게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호하게가 아닌 뚜렷히 알수 있을것입니다.
쉽게 말해, 왜 인간으로 오셨는지 이해해야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 죽음&부활만이 아닌 그 삶 전 과정을 주목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빙빙 둘러 이야기하는거 같네요. 그 만큼 하나하나가 많은 신학적, 교회사적 의미를 내포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자, 관점을 조금 바꿔보죠 ㅎㅎ('구원=예수'니.. 구원의 개념과, 예수에 대한 이해를 함께 설명해보죠)

역사 이래로(구약부터 현재까지).. 구원은 한 개인에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댓글에서 '공동체적 구원'이란 단어를 언급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구원이란 공동체성에서 이뤄진다'가 맞겠죠.
우선 구약부터 봅시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현재에 대한 구원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니.. 나눠서 설명하겠습니다.
 (이걸 구약=하나님, 신약=예수님, 현재=성령님 같은 이해로 생각하시면 안되요. 저는 세대주의자 아닙니다.
  다만 구원의 개념발전에 대해서 설명드리면서,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왜 가장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해마세요. ^^)
구약에서는 '예수'란 존재가 없습니다(성육신 존재를 뜻합니다. 물론 삼위하나님은 계시죠 ㅎ). 
다만, 특정한 이(선지자, 예언자, 왕 등)에게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던 그들이 그들의 문화, 가치관과 이해를 가지고
자신들이 '말' 혹은 '글'로서 이스라엘 혹은 이방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즉, '구원'이란 자체가 어떤 특정 이를 위한게 아닌 공동체적 의미란 거죠. 
그러나 아무래도 직접적으로(하나님 -> 모든 이) '말씀'이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가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역시 자기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말씀은 오해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배는 드리는데 마음은 하나님께 가있지 않았고 나라는 멸망했으며 도무지 주님의 뜻을 알수없게 된거죠.
그리곤 사람들은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임마누엘)'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길을 이룰 수있을거라 말이죠.
그래서 '메시아 사상'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의 바램에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아이러니하죠? 응답자는 우리여야되는데..)이 '예수'입니다.
즉, 구약에서 '구원'이란 공동체적 개념이었으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했고, 
그래서 '말씀' 그대로이신 창조주께서 직접 '함께 하시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보았고 그 분이 결국 오셨습니다.

신약에서는 특히 복음서에서는 '예수'란 존재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그 자신이었으나, 인간이란 한정된 육체를 가지셨죠.
과거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 사람이 이해한 '구원의 말씀'이 백성에게 다시 전달되는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님 그 자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말씀'하시고, 삶으로 보여주시게 된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게, 아니 아주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평범하게 성장하셨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란 말씀을 계속 하십니다.
그리곤 삶으론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함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알려주셨구요.
그러나, 사람들은 말씀 그 자체가 말씀하시고, 몸으로 보여주셨는데도.. 
그 분의 말씀과 삶을 창조자가 만든 우리 피조물 원형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피조된 이후 자신들의 삶에서의 지식수준, 돈, 권력, 이해관계 등을 가지고 이해하다보니(죄된 모습)
  (쉽게 이야기하면 각자마다 다 다르게 하나님을 도구화했던 종교화적 모습들로  '메시아'란 개념을 이해했죠..)
결국 '말씀'은 커녕, '예수'란 존재도 깨닫지 못하고 오해하며 그를 죽이기 까지 했던 겁니다.
다시말해, 그들이 그렇게도 소망한 것이 이뤄졌음에도.. 
그 메시아가 이런 모습인 줄은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망가고, 공회는 그를 죽였죠.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감히 한낱 피조물이 요구를 했는데(메시아), 
은혜로 친히 누추한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셨음에도 저마다 자기 맘대로 이해하고.. 
그가 오셔서 함께하시면 구원에 이를 줄 알았는데..
'구원'은 배척당하고, 배신당하며, 홀로 남겨져 죽임을 당했다는거..
즉, 예수 시대때는 말씀 그 자체,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이 '구원'에 대해 몸으로 입으로 말씀하셨고(구약과 다른점),
그 말씀의 대상은 '모든 이' 즉, 공동체적이었다(구약과 동일점).. 
하지만 한가지 전제가 있는데 바로 '그(예수)를 따라 살때' 가능하단 것이고,
그 따라 삶의 예와, 구원의 결정의 예를 예수께서는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다시말해, 구원의 공동체적 의미는 구약과 동일하나, 다른 점은..
구원 그 자체가 이 땅에 오셨다는 점이고,
구원 그 자체이신 예수는 앞서 말한 구원의 전제조건의 예를
그의 삶과, 그를  따른 이들로 보여주셨단 겁니다(복음서에 나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의 승천 이후 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성립된 것이죠.
사실 누가, 요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흩어져있었지만..
여자들에 의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의해 부활한 예수의 소식을 듣게되었고
제자들은 모이게 되었죠. 그러나 불안했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죠.
그러던 중 제자들 중에 나타나신 예수는 '성령 하나님'을 구하길 말씀하셨습니다(요20:22).
이후, 제자들이 '살 방법'은 모여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보았으니 주님을 따라 살긴 해야겠고, 
따라 살려니 대제사장과 기득권이 주시하고 있었음으로 예수처럼 그렇게 담대하지도 못했죠.
그래서 그들은 승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담대하지도 않았고,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러던 중 '성령 하나님'께서 '살 방법'을 두고 기도한 이들에게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변했습니다. 
육체현현(예수)를 보고서도 저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주님을 이해했고, 그래서 주님을 따라 살지 못했던 이들이
함께 모여 성령 하나님과 동행할 때, 과거 두려움이 불안은 기쁨과 확신 그리고 나눔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립된 것이지요.
즉, 전해진 말씀(구약)으론 부족하여 말씀 그 자체(예수)가 오시고 그래서 구원을 이루는 분명한 삶의 지표(목표)는 드러났으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가슴(마음)은 없었는데(신 10:12,16) 말씀 그 자체가 그 마음에까지 친히 오셔서 함께하셨다(임마누엘)는 거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을 이루는 삶을 가능케 하신 성령 하나님의 본질도 이야기해야 되겠네요.
보통 AD400년가량까지 예수가 누구인가는 기독론 논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참 인간, 참 하나님'이란 개념을 사람들은 저마다 문화적 선이해를 가져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를 반신 혹은 영적 존재 혹은 인간으로만 오해해서 이단들이 창출되었죠.
그리스도교는 외적으로는 로마의 탄압과, 내적으로는 이단과 싸웠습니다.
우리처럼 '예수는 누구신가?'란 고민없는 이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치열하고도 고백적 시대였죠.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보신 분이 계시겠지만.. 
요즘 우리 인간이 살아갈때 별 중요치 않는 것을 어거스틴은 고민했었는데(악, 영혼, 죄 등)..
사실 이러한 고민들이 진정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삶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너무 우리네가 복과 천국가는 것만 구하는 예수를 나의 도구화시키는 것에 비하면 
정말 겸손한 한 인간의 고민이었기에 존경받는 고전이 된거죠.
말이 다른 곳으로 가네요.. 암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가 누구신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성령 하나님을 고민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면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설명 중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는 부분이 유일하고, 
성자 하나님의 부분은 탄생부터 죽음 부활 모두가 있고(당연히 그게 논쟁 중이었으니..),
성령 하나님의 부분은 교회와 함께 나오며 '교통'하는 특성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오순절운동(성령운동)이 벌어지면서 성령 하나님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는 좋은 점도 있으나,
각 나라의 문화에 따라 샤머니즘적 성격을 가진 '영'으로 이해되거나,
은사와 능력을 받기 위한 도구로서 받는 '영'으로 인식되는 문제점들을 가지게 된 것이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서론이 길었는데, 
성령 하나님의 본질과 성격 즉, 우리에게 어떤 것을 위해 오신 하나님이신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선 성령 하나님의 본질은 '각 사람에게 말씀 그 자체로 우리의 지표가 되신 그 분(예수)를 이해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이상 문화, 시대, 가치에 따른 인간의 이해로 오해되어 인식하는 인간이 주체가 아닌,
하나님 스스로 응답하는 인간에게 찾아가시는(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시죠.
또한 성령 하나님은 '공동체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시죠.
율법의 최고 계명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시죠.
누군가는 이렇게들 말을 하죠. '성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
또, 누군가는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셨는지, 자신이 만들어낸 내적 소리인지.. 어떻게 구별하냐'고 묻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마치 직접계시나 특별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좀 심하게 말하면 무당이 신받듯 말하고,
후자의 경우는 그럼 성서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구별할 수 있냐? 그냥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 않냐고 말합니다.
근데요. 분명한 것은 '성령님의 본질과 성격'이 아닌 것이라면 그 행동이나 말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서 전반에 '성령 하나님'에 관한 내용들이 나오죠. 
구약에서는 '루아흐'란 단어.. 한글로 생기 혹 생령, 하나님의 영으로..
신약에서는 '프뉴마'란 단어.. '성령'..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한 경우 한 개인의 역사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일하신다는 거죠(마18:20).
특히 신약에 와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성령의 열매'나 '성령의 은사' 역시 
한 개인 차원의 도구가 아닌, 공동체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갈5:22이하)가 한 개인을 위해 주어진 것인가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열매들이 나 자신만을 위해 얻어지는 것인가요?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위해 가져야 되는 것인가요?
성령의 은사는 어떠한 가요(고전12:4이하)? 하나님께서 주시는 개인의 능력을 말하나요?
그 은사들은 모두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지요.
또한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값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 '겸손'하게 구할 때 가능해집니다.
행여들 부흥회나 가보면 성령체험 운운하면서 말 흐리며 기도하기, 방언받기 하는데 우스울 따름이죠. 
그거 무당 신받는거랑 뭐가 다릅니까? 
'은혜'란 단어는 '카리스'라는 단어입니다. '은사'란 단어는 '카리스마'이구요.
'카리스'란 단어는 보편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말할 때 그 '은혜'라 함은..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거저 주어진 것.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스스로 자신을 계시한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정말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함'을 구할 때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러했듯 
다른 모든 피조물(롬8:19-24)을 사랑하라고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사란 단어 '카리스마'의 경우는 각 개인의 특성마다 다르게 주어진 선물을 뜻합니다.
그건 단순히 한 개인에게 주는 선물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겸손한 자로 이웃을 사랑하는 첫 열매로서의 임무에 주어진 군대 주특기? 같은 거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공동체를 위해 써야만 하고 그것의 본질은 '사랑'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최고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인 동시에 이웃을 위해 가져야할 우리의 마음이기때문이죠)
은사의 내용이 있는 고린도전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은사주의가 팽배했습니다.
그러자 은사를 가진 이들끼리 누가 더 위인지 뛰어난지 으스대면서 하나되지 못했죠.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한 성령이 각자의 특성마다 주신 것으로 '사랑 =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보시죠. '성령 하나님'의 본질과 성격이 이해되십니까?
쉽게 '성령'운운하며 마치 요술공주 밍키가 가지고 있는 요술막대기처럼 도구화하는, 
능력화하며 남들 중 자신이 우월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같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마치 자신의 말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뜻인냥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비 성서적, 비 성령적, 비 그리스도교적인지 아시겠지요?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말씀에서 무지한 우리의 오해와, 성자 하나님의 자기현현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는 오해를 
깨어주시는 지혜의 영인 동시에, 구원에 이르기까지 간구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창조목적)를 이루기 위해 함께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롬8:26-30) '구원의 주체'가 되십니다.

다시 '구원'의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지한 우리들에게 참 다각도로 
'창조 목적을 알려줌', '자신을 따름', '하나님 나라를 이룸'에 대해 계시하신걸 알수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을 성전삼으시는 성령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이유는 유일회적 현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오해되기 쉽고,
또 성령 하나님의 내재가 '본질과 성격' 외에 가시적 기준이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유일회적 육화하신 하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당신을 따름'에 대한 외적 기준을 분명히 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행여 그것이 또 다른 행위주의 혹은 율법주의가 될까 성령 하나님을 통해 내적 기준을 채워주심으로서
한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충분한 자기 계시를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쉽게 말해 삼위 하나님은 다각도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 계시를 하시고,
인간의 오해로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님 본질을 서로 채워줌으로서 우리에게 말씀과 각오 그리고 따름을 요구하십니다.
특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중요한 이유는..
단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신학화된 포인트 만이 아닌,
인간이 지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외적 현현(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번째, 값없이 주신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않는 겸손함
두번째, 삼위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
세번째, 내외적 기준(성자, 성령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 입니다.

 

3. 그렇다면 한국교회와 우리들은 구원에 이르고 있는가.

앞서 1번에서는 객관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살짝 정의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세 가지 개념을 정의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이해하는 개념을 말씀드렸죠(타 종교분들은 이해바랍니다).
다만, 세 가지 부류의 장단점을 말씀드렸는데, 딱 이렇게 나뉘어지지 않는다는거 
그리고 교회전통과 성서적 입장에서보면 이 세 부류 어느 쪽만 '옳다'고 할 수 없단 점을 말씀드립니다.
배타주의의 경우, 기본적으로 구원론의 교리적 원리는 상응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 즉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개념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 
그리고 교회전통에서 말하는 '교회'의 개념 즉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측면에서 보면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가시적 교회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한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비가시적 교회란 하나님 만이 아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말하며 앞으로 세워질 선택된 이들의 교회를 말합니다.
이 개념은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과 상응하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어거스틴의 주장이기도 하며, 교회헌법에 명시된 교회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가시적 교회가 배타주의를 가지면, 그 일을 통해 비가시적 교회(미래적 교회)를 인정치 않고 무시함으로서
또다른 바리새적이고 율법적 개념만 남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포용주의의 경우, 성령 하나님의 교통과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에 대한 이해의 장점은 있지만,
결국 타종교를 '선교'해야된다는 결론은 동일한 감춰진 우월적 인식을 가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경우, 성자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현현이 마치 타 선지자 중 1인으로 인식됨으로서
창조주의 성육신(육화)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개념 중 인간의 응답인 '따름'을 상실시키며, 
결국 자기합리성을 추구함으로서 종교적으로 가장 합리적 대화는 할 수 있지만,
더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닌, 자신이 믿는 어떤 것도 다 하나님이 되는 오류를 가집니다.

2번에서 제가 적은 '구원'의 내용과, '삼위 하나님'의 본질로 앞의 세 가지 개념을 보자면,
분명 세 가지 개념에서 어느 쪽'만'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외적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시화된 진리 그 자체이며, 은총의 외적 역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의 개념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과 역사의 개념으로서는
배타적 태도를 가지거나, 선교적 공격성을 가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비가시적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고 내 증인이 된다(마28:18-20;행1:8)'는 전도와 선교의 개념에서 최우선 되어야할 것은 
제자를 '삼는'다가 아니라,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는 '삶' 즉 '따름'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래 죄인이었으나 주님을 통해 의인이라 칭해짐을 깨닮는 그 '사랑'
하나님 그 자신 자체인 '사랑'을 마음에 둠(성령과 함께 함)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자녀됨을 겸손히 감사함으로 '삶(따름)'으로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신10:12-22(특별히 18-19절참조).
즉,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이를 어떻게 하기보다 어떻게 '사는지(삶)'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누가복음의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외침이 이 시대 속에 가슴 울림이 됩니다.

자, 마지막으로..
종교다원주의의 개념과, 구원의 이해를 하다보면 아이러니하게 한국 개신교 문제와 겹침을 봅니다.
배타주의와 포용주의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자신들의 우월성으로 만들고 하나님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면,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껍질로 결국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믿든 모두 구원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자기이해로의 구원을 말하죠.
이렇게 봤을때,
한국 개신교에서 그렇게도 '종교다원주의'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교회전통과 역사적 이해없이 문자주의, 근본주의적 이해로만 당신들의 종교화된 '예수'를 말하면서..
마치 자신들의 주장'만' 참 진리인채 하는 당신들은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앞뒤 문맥따윈 상관없이 자신이 필요한 구절만 인용하며 자기타당성을 말하는 
당신은 이단과 뭐가 다르며,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의 전통을 부정하고, 그리스도교의 형제된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예수를 물질적 복을 주기위한 도구를 만들고, 
자신 만의 천국을 위한 도구로 삼는 당신들은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이 되시며 참 진리가 되신다고 말하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려고하는 종교화된 '예수'를 믿는 당신들은 종교다원주의자 아닙니까?
삼위 하나님되신 성령 하나님을 도구부리듯 하고, 은사 받기 위한 영이라 생각하고,
마치 성령이 자신에게만 말하는냥 남 앞에서 으스대는 당신들이 종교다원주의자와 무엇이 다릅니까?
결국 성서나, 교회전통은 다 버려두고..
만인제사장(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은 님들이 말한 그것과 다름요)이란 낱말 하나의 방패로
자기'만'의 예수, 자기'만'의 성령, 자기'만'의 하나님을 믿는 그것.. 종교다원주의자와 뭐가 다릅니까?
천년만년 해먹을려고 아들을 담임목사로 추대하면서 성령님의 인도라 말하는 당신이 믿는 그 성령은 누구입니까?
그건 자기를 믿는거 아닌가요?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믿는 것 아닌가요? 
결국 삼위 하나님은 사라지고, 나의 욕구와 만족 내가 원하는 것을 보기위한 '도구'가 되지 않았나요?
본회퍼가 이런 말을 했소. 
'신 없이, 신 앞에'
'종교화'된 신 없이, '참 진리'되신 신 앞에 나오시오!
추사 김정희 선생이 '入古出新(입고출신)'이라 했소. 근원으로 본질로 돌아가시오.
부자청년은 '슬픈 기색'이라도 띄며 돌아갔거늘, 당신들은 '즐거운 낯짝'으로 자신이 뭘하는지 모르지 않소!

우리는 진정 구원에 이르고 있습니까? 당신들의 매 순간은 누가 당신 중심에 있습니까?

 

 

 

 

* 글을 마치며..
사실.. 아주 복잡한 교리들이 함께 나온거라.. 머리 정리를 해가며 적었지만, 적고나서 보니 여전히 산만한 글입니다.
머릿속에서는 큰 맥을 두고, 맥에서 맥으로 이어나가다 중요 교리부분은 설명을 해야되고하다보니 무척 길어지네요.
강의로 했다면.. 지금 글에서 적지 않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들과, 교회사 특히 AD400년이전의 기독론 논쟁과 신조들, 
그리고 성령운동의 역사적 이야기들을 더 많이 자세히 다룰텐데..
글은 역시 어렵습니다. 단어 하나가 끼치는 오해와 영향력을 생각하니.. 괜히 적었나 싶기도 합니다.
평안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