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신학적 궁금점들

사도신경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숑숑숑~ 2010. 10. 14. 08:00


1. (가톨릭)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개신교)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2. (가톨릭)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개신교)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3. 개신교가 유독 가톨릭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
    (단, 일부 개신교는 가톨릭에 호의적인 교단도 있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사도신경(Credo)에 대해 짧게 설명하려 합니다.
제가 과거에 사도신경에 대해서 짧은 논문을 적은 적있는데, 그 논문을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1. 사도신경의 역사
  사도신경은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열흘만에 열 두 사도들이 작성한 것이라고 하나,
 오늘날 전승에 동의하는 학자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에게 연원되는 사신을 총괄적으로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도적이다.”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사도신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메시지가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는 것이죠.
 사도신경은 실제로는 일찍부터 현재의 내용과 문장대로는 아니지만 세례문답으로 사용되고 고백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200년경 로마에서 사용한 문답례의 한 실례가
 히폴리투스가 쓴 ‘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에 사도신경의 원시형태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로마신경'(Symbolum Romanum, The Old Roman Creed)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사도신경(Apostles' Creed)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의 글이었으며,
 현재의 사도신경 본문은 3-4세기에 로마에서 사용한 세례신조와 비슷하며,
 그 최종적인 형식은 6세기말 또는 7세기초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확립되었죠.
 이것은 점차 세례신조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것을 범교회적으로,
 범국가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샤르망(Charlemagne, 742-814)대제 때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서방 로마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 진술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모든 신조와 신앙고백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조라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역사에 있어서도 사도신경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데, 
 루터는 1529년 대소요리문답(The Small & Large Catechism)을 작성할 때
사도신경, 주기도, 십계명의 순서로 풀이하였으며,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구조적으로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는데 곧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의 순서를 취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등도 사도신경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사도신경을 해석함으로서 기독교의 신앙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 사도신경의 이해
 이렇게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개신교 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 및 동방정교회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고대 에큐메니칼 신조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신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것들을 단순한 성서적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가장 자연스러운 순서인 하나님과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부활과 영생으로 끝맺고 있죠.
 또한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적인 구성으로 되어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즉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그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교회에 대한 고백이 그 뒤를 잇고 있으나,
 오늘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된 3세기 로마공동체의 세례고백은 그것들을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병렬시켰습니다. 
 즉,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근원적으로 신앙고백의 전승에서 삼위일체적인 세 주제가 핵심이며,
 따라서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되는 죄의 용서,
또 기독교의 희망이 성령 하나님의 항목에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모든 시대와 모든 분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와 같으며, 
 이러한 사도신경이 2천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신앙의 모든 것을 바로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도신경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개신교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세상의 모든 교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죠.

  3. 사도신경의 구조(라틴어, 가톨릭와 개신교 번역부분)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 
가톨릭)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개신교)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Et in Jesum Christum, Filium ej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descendit ad iferna; ter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ad coelos; sed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
가톨릭)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개신교)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Credo in Spiritum Sanctum;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remissionem peccatorum; carnis resurrectionem; vitam oeteram. Amen.
가톨릭)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개신교)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1. 가톨릭 사도신경이 정확히 맞는지.. 제가 확신이 없네요. 조금 틀렸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2. 제가 라틴어 본문에 진한 색으로 칠한 부분이 질의 1과 2의 내용부분입니다. 참조해주세요.

 

질의 1. (가톨릭)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개신교)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에 대해
           '저승'이라는 부분이 개신교 사도신경에 빠져있는 것에 대한 답변.

우선, 이 부분은 사실 역사적으로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죠.
그러나 분명히 4세기의 신앙 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고,
이 고백문은 이런 진술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 판넨베르트의 사도신경해설 인용.
즉, 이 당시의 그리스도교는 기독론 논쟁이 중점이었죠(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냐? 인간이냐? 반신이냐? 에 대한..)
우리가 위에서 보듯,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2/3이 예수에 대한 부분인 것을 보면 확실하지요.
질문하신 '장사되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에 대한 부분이 왜 빠져있냐면,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이 부분이 있으나, 공인전 당시 많은 본문에는 이 부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어에는 있으나, 한글에는 없는 이유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가르칠 당시
우리말로 번역된 저승이란 단어자체가 가지는 어감때문에 임의삭제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으로 사실 역사적으로 여러 오해들이 있어왔었죠(삼위일체론적 문제 등).
이 여러가지 이유가 함께 이해되어야 한국 개신교에서 이 부분이 빠진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학적으로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이 부분은 우주론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즉,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임으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질의 2. (가톨릭)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개신교)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에 대한 부분의 오해문제에 대한 답변.

이 부분은 라틴어로 보면 이해가 쉬울 거 같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칼 바르트는 개신교의 신학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때 참석요청을 받고 공의회를 도운 신학자입니다)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즉, 가톨릭에서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란 부분
 그리고 개신교에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를 믿으며'란 부분이죠.)
우선,sanctam ecclesiam catholicam의 부분은 예수를 머리로 한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뜻합니다.
과거 가톨릭에서 가톨릭만을 추구했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하나님 안의 형제된 모든 교회를 말하죠.
sanctorum communionem; 이 부분은 물론 가톨릭에서는 통공의 교리가 있고,
개신교는 그러한 부분이 우상숭배의 오해가 될 수 있기에 없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즉, 거룩한 공교회 혹은 거룩한 보편된 교회를 설명하는 '성도의 교제'라고 말합니다.
교회란 우리의 눈에 보인 것만 다가 아니죠. 우리 눈에는 과거와 현재의 교회, 가시적 교회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비가시적인 성도의 교제'가 있기 마련이고,
교회공동체란 교회라는 단어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일때 
성서적인 머리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로서 교회일 수 있겠지요. 공동체성 없는 교회는 교회로서 부족함을 말합니다.
이 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이 부분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은  
역사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모두 앞의 구절인 '성령'에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되는 죄의 용서, 또 기독교의 희망이 귀속됨을 이해할 때,
진정으로 교회의 의미와, 성도의 부분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질의 3. 개신교가 유독 가톨릭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유
           (단, 일부 개신교는 가톨릭에 호의적인 교단도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은 정말 단호히 말하고 싶습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뿌리이며, 한 형제이며, 머리된 그리스도의 한 지체입니다.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부분과, 교황무오설 같은 부분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즉, 삼위일체되신 절대자에 대한 부분은 같다는 겁니다.
만약 가톨릭을 근거없이 부정한다면, 그것은 개신교를 근거없이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대형교회들과, 몇몇의 개념없는 보수교단과 이단들이 가톨릭을 부정하고 헐띁느냐면,
그건 마치 이 시대에 기득권들이 '반공'만을 외치며 기득권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거라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것입니다.
더이상 신학이 없고, 제대로된 성경해석도 없고,
기복주의만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의지할 것이란 적을 만드는 것 뿐이죠.
이 점에 대해서는 목회자로서 정말 가톨릭의 형제들에게 머리숙여 죄송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