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신학적 궁금점들

예수님은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숑숑숑~ 2010. 10. 2. 22:03

왜 굳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을까?
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굳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걸까?
이런 부분이 궁금하죠..?

창세기부터 성경을 쉽게 풀어가면 설명드릴까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풍성하게 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자의 뜻보다, 자신의 뜻대로 하길 원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원대로 사는 인간들은 계속 '자기 뜻 즉, 이기적 소욕'때문에 세상은 점점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어긋나기 시작했죠.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의인의 가족(노아)만을 구원하시지만, 이들 또한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당대 '의인'이라는 호칭과 상관없는 '아브라함'이란 보통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를 이끌어가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자손들을 통해서 세상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해석 가능해집니다.
1.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 만방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심(구약의 전역사를 통해 알 수 있죠).
2.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를 통해 세상 만방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심(갈라디아서 2-3장 참조하세요).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 여러 사람들..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들, 때로는 모세 엘리야 같은 선지자들,
     또는 다윗과 요시아같은 왕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시거나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준 것들이
도리어 사람을 판단하고 억누르게 되는 율법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 넘쳐나고(미가서 6장처럼)..
다시말해, 하나님의 창조계획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셨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죠.

이 문제는 바로 신론적인 문제인데요. 이런거랍니다. 철학의 근본 생성원리와도 비슷한데..
신이라는 절대자를 절대 피조물은 이해할 수 없다. 신을 피조물 스스로 이해하면 신은 신일 수 없다.
쉽게 말해.. 구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나주신 이들(앞서말한 선지자, 왕, 아버지들)이 외에는 절대자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단 거죠.
하나님을 만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나 특정부류에게 전하지만..
사실 말이란 것이 전해질때마다 오해가 생기거나, 단어적 의미적 이해가 달라져서..
점점 '하나님의 뜻'보단, '방법적인 룰'을 답습하게 되면서 그 안의 의미들(사랑 등)이 사라지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 역사 한 중간으로 오신 거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가장 처음 인간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신 것이죠.
이것이 기독론이자, 구원론입니다.
요즘은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는 걸 봅니다.
명제는 맞아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린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되었고, 부활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 더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지금 삐릴릴리님께서 질문하신 것과 같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다면 오신 이유가 뭘까?'란 것이죠.
단지 죽음과 부활만 중요했다면, 예수께서 살아가실 필요도 누추한 곳에 태어나실 필요도 없지요.
물론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문제가 있지만 이게 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마가, 마태, 누가)에서 자신을 '믿으라'하신적이 없습니다.
다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원하신 것이죠.
이것은 앞서 제가 말한 것처럼 창조때의 원래의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이란 것이 단순히 '믿는다'의 의미보다, '예수를 따르는 삶'에 있음이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
명제들은 다 옳고, 맞지만.. 과연 '믿는다'라는 기준이 뭘까요?
구원이란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게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삶'이지요. '예수를 따르는 삶'만이 진정 믿음으로 나오는 삶이겠지요?
그렇기에 바울은 빌립보서(3-4장)를 통해서 푯대를 달려간다. 이미 얻었다 함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문제가 하나더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돌아다녀도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이해한 이가 없어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죠.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오자 그때서야 그들이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세요.
두려워서 예수님이 승천하고도 마가다락방에서 두려워서 보혜사성령님을 간구하던 그들이..
성령이 임하시자, 변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앞에 설교하면서 이제서야 성령을 통해 깨닳은 것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랬을때,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고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제가 뭘 말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도 사람들은 그의 삶을 이해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의 소욕에 너무 젖어있고 그것을 벗어나서 살수없는 이들이기 때문에(갈5:16-25),
예수의 삶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들 마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고 나서야..
이들이 꺼꾸러 예수님의 승천을 이해하게 되었고, 부활이 이해가 되었고,
무엇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가 이해가 되었고,
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아픈이들을 고쳐주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했는지 이해가 되었고,
왜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는지 알게 되었고,
왜 유추한 마굿간의 말 구유에 태어나시게 되었는지도 이해하게 되었으면,
구약의 모든 메시아적 문헌들이 있는 이유와 하나님의 창조계획도 이해하게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성령론적 부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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