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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의 정경 권수차이

가톨릭은 성서를 구약 46권, 신약 27권 총 73권이라고 말합니다.개신교는 성서를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이라고 말하구요. 가톨릭과 개신교는 왜 구약 권수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먼저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약 차이는 가톨릭이 토빗, 유딧, 집회서, 바룩서, 지혜서,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 이외에 에스더서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를 구약성서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이것들을 구약성서에 포함하고 제2경전이라 합니다.개신교에서는 이것들을 외경이라고 하구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성서권수가 다르게 정해졌을까? 당시의 사회와 교회는 구약의 부분에서 70인역에 있는 각 권들을 정경으로 인식했었지요. 그런데 팔레스테인에서 유대인(유대교)들이 주후 1세기 무렵 정경확정을 할때에는 가톨릭에서 인정하..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7

C.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의 신앙삶  늦봄 문익환이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현장 그 역사 속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목회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 안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신앙삶의 결과이자, 문익환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처음부터 한반도의 현실에 투신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신앙이 그를 세우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목회자로서, 교수로서, 성서번역가로서, 시인으로서 발전해나가며 단순히 교회 안의 목회자라는 틀을 넘어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신앙삶을 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성과 속을 아우르는 신앙..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6

문익환 목사의 이한열 열사 추모사가 자동재생됩니다.     B. 목회자 문익환의 신앙삶   문익환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조상들이 겪었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육진문화(六鎭文化)의 분위기에, 문익환 자신이 태어나 배우고 자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모습들, 또한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기독신앙 그리고 명동촌의 영향이 늦봄 문익환의 신앙삶을 만들었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가 목회자가 된 이유는 그 주변에 그에게 영향을 준 모든 이들이 참 애국자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며 목회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회와 교회를 달리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그리스도교 공동체성과 교회 공동체성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 이후 교회공동체는 생겨났다. 그것을 그리스도교 교회라고 하고, 우리는 분명히 머리된 예수를 위시하여 그 공동체성을 발현한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 교회 공동체성과, 2천년전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성은 과연 동일할까? 특히 이 나라 현재의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과 지금 현재 교회 공동체성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교 공동체성에 대해 분명한 정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성 그리스도교가 생성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현현과 승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두려웠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여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절기를 맞아 리더를 잃었던 현재의 상황을 어찌할 바..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5

2. 문익환 목사의 삶 A. 늦봄 문익환의 생애    늦봄 문익환은 1918년 6월1일 과거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베인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1985년 작고)과 어머니 김신묵(1990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문익환목사 집안은 전남 나주 남평 문씨로, 1894년 문익환 목사의 선대가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다 실패하여 함경도로 도피하였다. 도피하게 된 이 지역은 세종 때 윤관이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던 두만강 이남으로 조선시대에 학식이 높아도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학자들은 출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학풍의 ‘육진문화(六鎭文化)’가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