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목사와 교회공동체 8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8

Ⅳ. 문익환의 ‘교회공동체’의 의미와, 그 과제 A. ‘교회공동체’의 정의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의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간다. 이렇게 인간의 공동체에서는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적 이해를 통해,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 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7

C.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의 신앙삶  늦봄 문익환이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현장 그 역사 속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목회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 안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신앙삶의 결과이자, 문익환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처음부터 한반도의 현실에 투신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신앙이 그를 세우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목회자로서, 교수로서, 성서번역가로서, 시인으로서 발전해나가며 단순히 교회 안의 목회자라는 틀을 넘어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신앙삶을 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성과 속을 아우르는 신앙..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6

문익환 목사의 이한열 열사 추모사가 자동재생됩니다.     B. 목회자 문익환의 신앙삶   문익환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조상들이 겪었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육진문화(六鎭文化)의 분위기에, 문익환 자신이 태어나 배우고 자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모습들, 또한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기독신앙 그리고 명동촌의 영향이 늦봄 문익환의 신앙삶을 만들었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가 목회자가 된 이유는 그 주변에 그에게 영향을 준 모든 이들이 참 애국자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며 목회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회와 교회를 달리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5

2. 문익환 목사의 삶 A. 늦봄 문익환의 생애    늦봄 문익환은 1918년 6월1일 과거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베인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1985년 작고)과 어머니 김신묵(1990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문익환목사 집안은 전남 나주 남평 문씨로, 1894년 문익환 목사의 선대가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다 실패하여 함경도로 도피하였다. 도피하게 된 이 지역은 세종 때 윤관이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던 두만강 이남으로 조선시대에 학식이 높아도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학자들은 출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학풍의 ‘육진문화(六鎭文化)’가 넘..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4

1. 시대적 상황C.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   역사는 서구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이 서구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말한다. 산업적인 배경에서 일하고 선진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며, 고도산업국들의 아류(亞流)가 되는 것은 분명 유혹적이긴 하지만, 필히 독재정치를 경험시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근대화는 발전이 아닌 삶의 뒤틀어짐이며, 진보가 아닌 생명의 죽임이었다. 한반도의 대한민국도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를 명목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근대화를 명목으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독재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다. 한일정상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민간기업들로부터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