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목사와 교회공동체

문익환, 시대의 예언자! 그가 던진 교회 의미와 과제란..? – 5

숑숑숑~ 2013. 1. 31. 16:52




2. 문익환 목사의 삶



A. 늦봄 문익환의 생애



   늦봄 문익환은 1918년 6월1일 과거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베인 만주(滿洲) 북간도(北間島)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1985년 작고)과 어머니 김신묵(1990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문익환목사 집안은 전남 나주 남평 문씨로, 1894년 문익환 목사의 선대가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다 실패하여 함경도로 도피하였다. 도피하게 된 이 지역은 세종 때 윤관이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던 두만강 이남으로 조선시대에 학식이 높아도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없는 유배의 땅이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지역의 학자들은 출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실질적이고 민중적인 학풍의 ‘육진문화(六鎭文化)’가 넘치던 곳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고조부인 문병규는 두민(頭民)을 지냈는데, 특히 김약연이라는 젊은이를 아꼈고, 동학의 실패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먼저 북간도로 떠난 윤하현(윤동주의 조부)과 연락하여 김약연이 주축이 되어 장소를 물색하고, 문씨 가문과 스승 남도천 가문 그리고 김하규 가문 이렇게 네 가문이 명동촌에 자리를 잡게 된다.[각주:1]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민족교육이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세워진 명동촌은 마을 자체가 독립결사체였다. 독립운동가 김약연이 마을을 이끌며 안중근을 포함한 독립 운동가들이 식객으로 드나드는 명동촌에서 1918년 문익환이 태어난다. 문익환은 나운규, 윤동주, 송몽규 등과 명동학교를 다니게 된다.[각주:2]

   소년 문익환은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과 만난다. 명동학교에서 신식교육을 가르치던 정재면 선생이 명동촌 어르신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기독교 도입을 주장한다.[각주:3] 명동촌을 찾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민족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놈,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가며 싸워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각주:4] 민족을 하나로 엮고 민중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구심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재면 선생[각주:5]의 지속적인 설득에 마침내 명동촌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각주:6]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가 첫 번째 목사로 배출되기도 하였다.

   문익환은 1924년 김약연, 문치정 등 민족선각자들이 세운 공동체학교인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고, 1932년에는 용정 해성소학교를 졸업한다.[각주:7] 이어서 용정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한다.[각주:8] 그러나 이듬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가담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각주:9]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1937년 용정 광명중학교를 졸업한다.[각주:10] 이후 그는 조양천소학교에서 교사로 생활하지만 결국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났던 훌륭한 선생들 모두 교사이기 전에 목회자였음을 깨달았고, 그 목회자들은 모두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38년 일본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각주:11] 평생의 반려자인 박용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1943년 학병을 피하여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하게 되고,[각주:12] 만보산한인교회, 신경중앙교회에서 교회전도사로 일하던 중 해방을 맞아 1946년 귀국하게 된다.

   그 뒤 부모가 있는 김천으로 내려가 배영중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교에서 수학(修學)하다 한국전쟁이 발발되고, 유엔군에 자원하여 도쿄 유엔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며 정전회담 통역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다시 도미(渡美)하여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5-66년에는 유니언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947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한빛교회 목사로 사역하면서, 한국 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수로 구약학을 강의했다. 1968년부터 1976년에는 한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처음으로 함께 번역했던 ‘공동번역성서’ 작업에 구약번역책임위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구약의 시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번역하기 위해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각주:13]

   또한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노동과 민주에 관한 관심을 가지며 행동을 하게 되고, 절친했던 재야지도자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하게 사형 당한 1975년 여름부터 직접적으로 역사에 투신(投身)하기 시작했다.

   이후 58세 때인 1976년 3월 1일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명동성당에서의 ‘3.1 민주구국선언(民主救國宣言)’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옥살이를 했고, 그 때부터 늦봄 문익환의 집 거실 벽엔 간디의 글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가 붙여졌다.[각주:14]

   문익환은 이 사건으로 투옥되어 22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해 다시 수감되었고, 1980년 5월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정권에 의한 '내란예비음모죄'로 3번째 투옥되었다가 31개월 만에 출옥, 1986년 인천5·3항쟁과 서울대 연설사건, 그리고 1989년 3월 26일 전국을 뒤흔든 방북사건, 1991년의 '분신정국'으로 재수감 될 때까지 어떤 감옥행도 두려워하지 않는 민주와 통일을 향한 열정의 삶을 살았다.

   "통일은 다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 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통일의 전망과 희망을 증언하던 늦봄 문익환 목사는 19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18일 오후 8시 20분 자택에서 졸도하여, 한일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는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교회' 목사(1983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소위 '분신정국'에서 강경대 열사 등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의 활동(1991년), 옥중에서 미국 친우협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92년),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 제창(1993년),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 등으로 시대의 어두움과 장벽을 불사르고 한반도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새벽을 여는 길을 앞서서 헤쳐 갔다.[각주:15]

   문익환 목사의 가족은 부인 박용길 장로, 큰 아들 문호근 씨, 큰 딸 문영금 씨, 둘째 아들 문의근 씨, 셋째 아들 문성근 씨가 있으며, 저서로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1984)’,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걸어서라도 갈테야(1990)’ 등이 있으며, 시집 ‘새삼스런 하루(1968)’, ‘꿈을 비는 마음(1978)’과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등이 있다. 또한 번역서로는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등이 있다. 그 밖에 산문집과 옥중서한집 등 1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이처럼 문익환 목사의 생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맞물려있고 매우 복잡하다. 이런 문익환 목사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면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의 기간과, 민주통일운동가로서의 신앙삶의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부분의 기점은 절친했던 장준하의 죽음이지만,[각주:16] 그 죽음이 단순히 목회자에서 민주통일운동가로의 전환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삶을 살아온 그리스도인이며, 평생 자신을 목사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생각했던 이였기 때문이다.[각주:17] 그럼에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의 기간과, 민주통일운동가로서의 신앙삶의 기간을 시대적 상황과 함께 깊이 고찰함으로서 문익환 목사의 신앙삶의 전환과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형수,『문익환평전』pp. 88-93; 조현 “해방의 등불 된 ‘간도의 대통령’ - 한국판 모세’ 김약연 선생,“[2007.6.18] [본문으로]
    2. 조운찬 “다시 쓰는 독립운동列傳 - 남북 국립묘지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2005.6.27] ; 정경호,『함께 부르는 생명평화의 노래』(서울: 한들출판사, 2009), pp. 200-237 [본문으로]
    3. 김형수,『문익환평전』pp. 95-98; 서굉일,“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연구(Ⅰ)”, 『신학사상』 32(1981): 128; 서정민,『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서울: 기독교문사, 1990), p. 144. [본문으로]
    4. 문익환의 모친인 김신묵의 이름 또한 이동휘의 부흥회를 통해 얻어졌다. 당시 여인들에게는 이름이 없었고, 이동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남성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말하며 여성이 함께 하는 독립을 말하고, 명동촌여성들은 ‘믿을 신(信)’자 돌림의 자매가 된다. 문익환은 이후 신(信) 자 항렬의 동기에 대해 “가문족벌의 장벽을 훨훨 떨쳐버리고 한겨레 의식이 확인 확산”된 것으로 평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98-101. 참조.) [본문으로]
    5. 정재면(1882-1962)은 평남 숙천군 태생으로 평양의 숭실학교, 상동교회 부설 기독청년학원을 졸업했고,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신민회의 파송으로 북간도 명동촌으로 오게 되었다. 1908년 규암 김약연으로부터 명동서숙 교사로 초청받았으나 성경을 정식과목으로 또한 기독교개종을 설득하여, 명동촌은 북간도 기독교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이후 간민회 총무, 1919년에는 명동촌 대표로서 의사부원으로 선출되여 상해임시정부 북간도대표로 되었다. 1923년 은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되었으며 1925년부터 2년간 중국 남경 금릉대학 신학부와 평양신학교에서 1년 공부 후 목사안수를 받고,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은진중학교 목사로서, 해방 전에 귀국하여 청진과 원산에서 목회했고, 해방 후에는 ‘기독공보’사장으로 역임하고, 경기도 양주 장흥면에 소재한 교회에서 목회 하던 중 1962년 소천하였다. [본문으로]
    6. 정경호,『함께 부르는 생명평화의 노래』p. 212. [본문으로]
    7. 1년 만에 다른 학교를 다시 졸업한 이유는 당시 명동소학교가 일본에 침략을 받은 조선에 속하지도 않았고, 중국에 속하지도 않았기에(명동학교는 중국과 일본의 행정망을 피한 학교였다.) 중국국적의 학교를 다닐 필요가 있었다. [본문으로]
    8.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로 전학한 이유는 당시 중학교가 ‘5년제’가 정규학제였는데 은진중학교는 4년제로서 고등학교나 전문학교, 또는 대학 예과와 같은 상급학교로 진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문익환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모처람 찾아온 고국 땅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에서 학생 생활을 하는 것도 겨우 한 학기. 일본 신사참배문제가 터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1936년 4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전 중학생들이 아침 예배시간이 끝나자 들고 일어났다. 요샛말로 ‘데모’에 나섰던 것이다. (…) 우리는 그때 학교에서 처벌받은 것이 아니다. 그냥 그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아서 자퇴한 것이다”라고 회고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180.) [본문으로]
    10. 당시 용정에는 기독교 계통의 은진중학교, 민족주의 계통의 대성중학교, 사회주의 계통의 동흥중학교, 친일계통의 광명중학교 이렇게 네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5년제 정규학교는 광명밖에 없었다. 문익환은 교사를 꿈꾸고 있었기에 정규학교를 졸업해야 했고, 결국 광명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광명중학교는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로서 정일권을 포함해 박정희의 5.16쿠테타의 직접적 인맥들이 이 학교 출신들이었다(위의 책, pp. 181-188.). [본문으로]
    11. 그가 평양신학교가 아닌 일본신학교를 선택한 데에는 삼촌이었던 이권찬 목사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른 형편없는 보수화를 염려하고 진보적인 신학을 배우라”는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익환은 이권찬 목사의 말을 듣고 일본 신학교로 가게 되었지만, 은연 중 침략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다.(위의 책, pp. 193-200.). [본문으로]
    12. 일본에서 문익환은 윤동주, 송몽규, 장준하 등과 함께 있었는데 그때 강제징병에 대한 반응이 다 달랐다. 문익환은 “일본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일본인 교장과 담판을 짓고 동생 문동환과 함께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을 갔고, 장준하는 “입대 이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합류하자”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탈출하여 김구를 만나 광복군에 가담하게 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입대하여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군대내에서 모반을 일으키자”라고 말했는데, 동료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끌려가 옥중노동 혹은 생체실험으로 죽었다. 문익환은 평생 그 일에 대해 가슴 아파했고, 이후 장준하의 죽음과 함께 급변했던 문익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위의 책, pp. 221-228.). [본문으로]
    13. 사실 구약번역책임위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이 무리없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의 고민에서 시작된 번역은 시편의 시 번역에서 한국시단에 도움을 청하며 ‘시’를 이해하려다 결국 본인이 시인이 되었던 경우였다. [본문으로]
    14. 감옥에서 그의 신앙은 비로소 교회를 벗어난다.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찮은 장소, 모든 하찮은 사람들 가운데 거룩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으로]
    15. 위의 책, pp. 813-832. 연보참조. [본문으로]
    16.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민중과 신학』 3(2000): 90-93. [본문으로]
    17. 홍근수, “통일운동의 선구자, 늦봄의 숨결“, 『말씀과 교회』 21(1999): 242-244; 편집부, “문익환 목사의 숨결, 사랑, 그리고 생명", 『기독교사상』 3(1999): 15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