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단상/작은 성찰

목회자입장에서 생각해본 '개신교가 개독교가 되어버린 이유'.

숑숑숑~ 2010. 10. 6. 13:01

1. 기복주의.
대표적인 조용기목사의 핵심(요한 3서 2절)이기도 한 기복주의는
쉽게 말해 계시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개신교+가톨릭+동방정교회), 이슬람)와,
한반도샤머니즘의 결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에서
영혼이 잘 되면, 네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 즉, 예수 잘믿으면 건강과 물질적 복이 들어온다는 것은
절대 계시종교가 아닌, 샤머니즘적인 Give&Take(예로 물떠놓고 빌면 이뤄진다식)를 말하고 있죠.

그리스도교에서 '복'이란.. 한반도에서 흔히 생각하는 '복'의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복'은 개인의 뜻대로 이뤄지는 것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복'은 인간의 뜻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하죠.
예를 들어봅시다.
다들 부모님이 계실텐데.. 하나님을 열심히 믿은 부모님이 삶이 평탄치 않거나, 고통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실하신 그 부모님은 '복'을 받은 것일까요?
빌립보서의 말씀만 보더라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고 그 스스로 '기쁘다' 말하며 자신의 삶이 비천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바울을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아서 불행한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예수는 부자청년에게 자신의 것을 두고, 예수를 따르라고 했던 말씀 그 하나만 해도
기복주의는 문제가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무언가를 다른 이보다 많이 가졌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것을 빼앗겼단 것이 되니. 이웃사랑이 아니겠지요?
요즘 '청부론'같은 것이 유행인데.. 이 모든게 겉만 번지르르한 자기방어기제 일 뿐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기복주의신앙안에 해석되고 동요되고 있기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2. 대형교회(Mega Church).
보통 대형교회들이 기복주의적인 요소를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모이는 것인지 모르지요.
물론 기복주의적인 요소들이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정말 드뭅니다.

왜 대형교회들이 개독교라고 말하는 이유인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 무엇이든지 대형화되면 구체화되고 체계화됩니다.
그것은 본질과 비본질의 주부를 바꾸어버릴 위험이 생깁니다.
즉, 유지를 위해 원래의 본질을 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둘째,
 체계화된 시스템은 유지를 위해 예수가 가르치고 삶으로 보인 사랑의 요소를
현격한 법과 규율로 바꿔버릴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대형교회 목회자가 예수처럼 목양할 수 있을까요?
또한 대형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수 있을까요?
즉, 그 대형의 유지를 위해..
소수의 교회의 유지를 위해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위주로 움직이거나,
대형교회 안에 수많은 시각과 가치관, 운영의 모습,
가운데 매우 보편적인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법적인 매임의 관점하에 움직일 것입니다.

셋째, 대형교회는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죽이고 수평이동을 하게됩니다. 

넷째, 대형교회에는 공동체성이 없습니다.

다섯째, 목회자가 성도를 제대로 목양할 수 없다.
세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를 같이 설명해야될텐데요.
우선 요즘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나 공동체성이 없습니다. 즉, 내 교회라는 소속감?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더 편한 것, 예배만 드리는 것, 화려한 것들을 쫓아가다보니 지체로서의 역할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 부분을 좀더 논리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회에는 세례를 받고, 입교한 이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습니다.
공동의회, 재직회 그리고 당회지요.
예산이나 교회의 행정적인 일들 그리고 계획과 임직 등의 모든 교회 일들을 이 모임을 통해 결정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대형교회에서는 이러한 모임 중 공동의회와 재직회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장로와 목사가 모이는 당회에서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되고,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모 교회 재건축, 목사세습, 헌금불법운용)를 만들게 되지요.
결국 성도로서 머리된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한 역할을 대형교회에서는 하기 어려움으로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성도 개개인의 삶을 절대 파악할 수 없고
이러한 목양의 부분은 그 담임목사에게 나태함을 주게 되어집니다.
그러다보면 담임목사는 설교이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요.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대형교회 목사들의 정치참여,
혹은 신학적 개발미비로 인한 언변실수 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대형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큰교회가 하는 역할이 있고, 작은교회가 하는 역할이 있지 않느냐?'는 식의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굳이 문제를 일으키는 대형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게 할 필요가 없고,
작은교회가 큰교회가 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목회윤리적, 교회사적 대안이 분명히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하지 못하고, 개교회주의적이며, 대형교회가 작은교회를 무시하는 목사들의 의식 등의 태도와,
큰 교회를 작은 교회로 분할해서 내려놓기가 어렵다는 이유들이 있지요(이동원목사가 이 일을 하려다 포기했죠).

이렇게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예수를 따름을 주장하면서 자기들끼리 모이기 원하는 대형교회적 문제와 분위기 때문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3. 신학없는 목회자.
작은 교회에서는 과다한 업무로 인해, 큰 교회에서는 분할되어 목양보다 다른 것에 신경쓰는 나태함 때문에..
혹은 성도들과의 헌법적인 모임을 통한 계획과 진행보다, 성도들의 무지로 인한 목사의 일방적인 결정 때문에..
목회자들은 신학에 대한 자기개발과 노력이 부족함을 봅니다.
또한 신학 뿐 아니라, 헌법에 대한 이해, 그리고 행정에 대한 인식,
사회에 대한 이해 및 역사에 대한 개념도 없어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지요.
이 점에 있어서,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신학에 꾸준히 노력할 수 있도록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시간을 줘야되고,
목회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생각하며 날마다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힘을 키워야 겠지요.
그럼에 있어서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질문도 많이 하고,
일방적인 가르침의 시간보다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예수를 따름을 주장하면서
교만하고 나태한 바리새인적인 모습을 가진 목회자들 때문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4. 알려고 하지 않는 성도 혹은 자신의 지식만을 옳다 여기는 성도.
이 두 부류가.. 참 대한민국 개신교에 큰 문제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많이 알리고 신학을 가르쳐 주려해도..
바쁘다고 관심없어하고, 편한 것을 찾아 대형교회로 가는 성도분들 때문에 저 같은 목회자는 개척도 하기 어렵네요 ^^;
지금 종교포럼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종교포럼이 생기기 전에 비게에나 이정토에서 이런 종교적 부분들이 나오면 여러번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그때 보면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글에 추천도 많이 해주셨구요.
그런데 종교포럼이 생기고 여기서 미꾸라지처럼 잘못된 것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도
잘못된 것을 지적하거나, 왜 잘못되었는지 말하는 이는 드뭅니다. 왜 그럴까요?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괜한 시비에 연관되어서 귀찮아지지 않길 원해서 겠죠?
이런 것이 여기 뽐뿌 뿐일까요? 뽐뿌는 그나마 낫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인터넷 어디에도 바른 신앙과 성경과 신학을 가진 이들이 없어요.
온통 틀린 말들과,
자기 느낌식의 '영적?'이야기(제 개인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걸 영적으로 풀이하시는 분들이 많은거 같아서..)들만 난무하고,
이단들의 말들과, 과격한 예수천국불신지옥식의 명제들만 요동치고,
거기다 언론에서 터진 몇몇 개념없는 교회의 일들까지 더해져서..
더더욱 개독교로 오해되어가는 듯합니다.
바른 신앙인들, 그리스도인들이 없어서..
신학을 알려고도 성경을 제대로 알려고도 하는 이들이 없어서..
알아도 괜한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쉬쉬하는 이들이 많아서..
혹은 자기가 어줍지않게 조금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정말 그리스도교가 엉뚱하게 오해되고 마치 다 그런식의 일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발톱에 때만도 못한 우리(목회자나 성도 모두)는 과연 달려가고 있나요?
아님 서서 다 이루었다라고 교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나요?

이렇게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의 현주소는 예수를 따름보다, 자기 만족함에 자기가 만든 예수를 주라고 주장하는
나태하고 교만한 성도들 때문에 대한민국 개신교가 개독교라고 불릴 수 밖에 없습니다. 




5.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만 매달려 있고,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함.
신약성경의 저작시기들을 보면,
바울서신이 먼저 기록이 되었고 그 다음에 복음서들이 기록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요즘처럼 차가 있거나, 인터넷이 되거나 하지 않았고, 인쇄술이 발달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삶에 대한 내용들은 빨리 퍼져나갈 수가 없었겠지요. 물론 체계적인 복음서기록도 없었을테구요.
그랬을때 바울 또한 예수에 대해서 알았지만 그 자세한 예수의 삶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예수를 전하게 되지만,
그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바울이 온 대서양을 돌아다니며 전했던 것은 자신이 깨달은 명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잘 알지 못했으니깐요.
사실 바울서신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구체적 삶 내용은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느냐고요?
복음서들이 바울서신 이후에 기록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그리스도인)는 바울이 깨달은 명제에만 집중하고 있지,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는 그만큼 집중하고 있지 않음을 봅니다.
제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지 않단 말이 아닙니다.
명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명제와 명제 사이에 있는 과정과 상황을 알아야 가능한 것이지요.

제가 무엇을 말하느냐고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바울처럼
"예수께서 나 자신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그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지요"
하지만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명제는 이해되지 않는,
어쩌면 강압적인(역사적으로 제국적인 선교등이 많았으니) 부분들이 많아서
이들에게는 이러한 명제는 단순한 반발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예수의 삶이요,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우리부터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고, 예수의 삶을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매번 찬양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니,'예수의 향기'니를 외치면서
그 삶은 너무나 성과 속을 구분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요?
너무나 이중적으로 교회에서만 거룩한 척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바로 그런 이중적인 이들을 저주했음을 잊고 있진 않은가요?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다른 모든 이들이 무시한 그 소외된 이들과 함께함을 잊고 있진 않은가요?
예수께서는 사랑을 위해 오셨지, 종교를 위해 오시지 않았음을 모르시나요?
예수께서 자신을 믿어야 천국간다는 소리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를 모르시는가요?

그리스도인에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소욕적 인침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삶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삶으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바울처럼 하루를 다이루었다가 아닌 달려나가며 매일을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 이 5가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되었을때, 지체로서 머리되신 예수를 쫓았을때
개신교는 더이상 개독교라는 소리를 안듣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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