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문익환의 ‘교회공동체’의 의미와, 그 과제



A. ‘교회공동체’의 정의



   공동체(共同體)란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혹은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이 그 스스로 환경을 개척할 수 없기에, 같은 환경 혹은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의 관계 속에 공동체를 통해,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해 나간다. 이렇게 인간의 공동체에서는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적 이해를 통해,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함께 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각주:1] 그러므로 이런 교회공동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삶 전체를 이해해야한다.


   예수의 삶 전체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각주:2] 이것은 예수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통해서만 조명됨을 뜻한다.[각주:3]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현실과 상관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거나, 실재가 아닌 하나의 상징 혹은, 신화론적 표상 등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교회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에게 직접 도래하기보다, 교회공동체를 통해 개인에게 다가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일치시키거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피조물 세계에 종속시켜서도 안 된다. 즉,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가 아무리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공동체의 차이는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각주:4]


   이 점에 있어서 개인과 교회공동체와의 관계를 보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각 개인은 무한자에 대한 이해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곤고히 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피조물 세계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로서 교회’ 안에 자연스레 종속시키는 제도적인 굳어짐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본질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보다, 교회공동체 자체의 존립을 더 중요시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교회공동체는 제도화되었고 부패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한스 큉은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섯 가지 패러다임을 구분하면서, ‘패러다임‘에 대해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 · 가치 · 행동양식 등의 총체적 상황”[각주:5]이라고 말한 쿤(T. S. Kuhn)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이렇게 한스 큉이 교회공동체 역사의 ’패러다임‘을 구분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본질적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그에 응답인 교회공동체의 총체적 상황들(발생, 성장, 경직화)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와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함에 있다.[각주:6] 즉, 앞서 말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공동체의 상관관계를 ’패러다임(시대적인 상황과 고착화과정 그리고 문제해결)‘으로 구분함으로서,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교의 변하지 말아야할 본질과, 변해가는 시대 속에 교회공동체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각주:7]


   이렇게 한스 큉은 교회공동체에 대해,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하나님 나라의 열매이자 통로라고 말하면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게 그 존재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각주:8] 이에 관련하여, 몰트만은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는 없다."[각주:9],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각주:10]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참된 존재를 갖고, 교회공동체의 독자적인 존재론을 배제하며 그리스도의 활동 역사를 기술하는 것만을 허용한다고 말했다.[각주:11]


   이처럼 교회공동체의 존재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공동체의 머리’이며,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스 큉은 말한다. 또한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해소하거나,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각주:12]


   이에 대해 몰트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사도직과 성례전, 그리고 작은 형제들, 파루시아가 바로 그것이다.[각주:13] 우선 첫째, 사도직과 성례전에 대해 몰트만은 '사도직'이라는 말을 일차적으로 선포의 의미로 두었다. 즉, 사도적 말씀 선포에 의해 그리스도는 임재 한다. 또한 성례전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는 매개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신앙공동체 속에 임재 한다고 보았다.[각주:14] 둘째,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계신다고 보았다.[각주:15] 즉, 예수는 역사에서 소외받고 가난한 보편적인 이들 모두 가운데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 세계 혹은 교회공동체 속에서만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받는 어느 곳에서나 함께 하심을 의미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파루시아를 약속하셨다. 몰트만은 단순히 이 파루시아를 ‘임재’ 혹은 ‘재림’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미래를 말한다.[각주:16]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저 ‘시간’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질적 변화의 삶을 요구한다.[각주:17]


   그러므로 몰트만이 의도하는 교회공동체는 기독론적인 토대에(예수를 뿌리로), 종말론적인 방향으로(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성령론적으로 현재화된다(교회의 임무).[각주:18] 즉, 교회공동체의 각 개인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으며, 역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메시아적 공동체로,[각주:19] 이 공동체 안에 속한 모든 이는 카리스마적 존재로서 우월이 없이,[각주:20]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제자들이다. 이러한 제자도의 실천은 교회 내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이는 이 세상을 향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는다.[각주:21]


   또한 교회공동체를 한스 큉은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他者)에게 개방하는 자세의 보편성[각주:22]을 가지고, 사도의 정신[각주:23] 즉 그리스도의 뜻과 일에 맞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섬김[각주:24]을 강조하며, 교회공동체는 계급질서가 아닌 섬기는 봉사라고 정의한다.[각주:25]


   정리하자면, 한스 큉은 교회공동체의 핵심을 기존의 교회공동체 틀 안에서 참 교회공동체를 조명하고 있고, 몰트만은 참 교회공동체(메시아적 교회)를 정의하며 기존의 교회공동체 틀을 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몰트만과 한스 큉은 참 교회공동체와 그것을 향한 역사적 교회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함에 있어서, 한스 큉의 견해와 몰트만의 견해는 서로 상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각주:26]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란 무엇인가?


   교회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스 큉과 몰트만의 견해에서 핵심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역사로서(=아래 머무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로서 교회를 뜻한다. 즉,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며, 교회 자체가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체에 사회를 향한 문턱 혹은, 사회에 대한 문턱을 없애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자인 몰트만과,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의 견해에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 가운데 차이는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전통’[각주:27]에 있다. 그 전통이 교회공동체(가시적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우주적 사역’으로서 사회공동체(비가시적 교회)가 있기에, 각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현존 앞에, 사회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서 ‘교회공동체’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교회공동체’ 사이에 인식범위 차이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진 교회 그 자체로서 교회는 진정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다. 교회공동체와 공동체 안에 속한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이 ‘코람데오와 마라나타’,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와 미래적 임재’[각주:28],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역사와 사회 가운데 존재할 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참 의인’이라 칭해질 것이며, ‘참 교회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성 없는 교회는 없다.’[각주:29] 본회퍼는 이것에 관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서 교회를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라고 말했다.[각주:30]


   본회퍼는 “각 개인은 타자(他者)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각 개인은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각 개인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타자(他者)가 존재해야 한다.”[각주:31]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자를 위해 삶을 살고 죽고 부활 하셨듯, 자신과 공동체를 타자(他者)를 위해 내어줄 때, 진정 각 개인과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공동체성’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고립상태에 있는 개인의 역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 공동체의 역사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을 흡수해버리는 그와 같은 공동체를 원하지 않으시고 여러 인간의 공동체를 원하신다. 공동체와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것이며 서로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집단적인 통일성의 구조와 사회적인 통일성의 구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질적인 것이다.[각주:32]


   이처럼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곧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며, 이는 곧 타자(他者)를 위한 그리스도,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이다.[각주:33] 또한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는 이런 그리스도와 같이 타자(他者)를 위해 행동할 때, 참이 된다.[각주:34]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 그가 온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홀로 은둔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의 원수들 한가운데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치 않고, 벗들 사이에나 있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이여,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했다고 하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각주:35]


   교회공동체는 무엇인가?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사회의 소외된 모든 이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 타자(他者)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진다. 교회는 사회에 예수란 빛의 조명이 되고, 사회는 교회의 존재이유와 바라봐야 할 방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태양의 유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기독교 윤리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타종교와 그리스도교가 맞닿아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통해 예수의 빛이 그들에게 전해진다고 말했다.[각주:36] 본회퍼는 이런 바르트를 넘어, 세상 속에 타자로서 삶을 살 때 우리 자신(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은 진정 ‘존재’하며 ‘참’이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타자에 의해서 ‘존재’된다. 마치 예수가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미 교회가 되었듯, 제자들이 도망치려했던 그곳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내어줬을 때 교회공동체가 성립되었듯,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공동체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하거나 교회자체 존립만을 위해서는 ‘참’이 될 수 없다. 세상이나 원수 속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자(他者)의 삶을 살 때, 우리를 '위한' 존재는 우리를 위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절대 겸손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각 개인의 삶이자, 사회를 향한 생명과 의와 평화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Dietrich Bonhoeffer,『그리스도론』이종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p. 80. [본문으로]
    2. Hans Küng,『교회』정지련 역 (서울: 한들, 2007), pp. 61-72. 참조. [본문으로]
    3. 이와 관련하여 몰트만은 “그는 인격으로 온 하나님의 나라다.”라고 말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본래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예수를 바라보아야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가 본래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Jürgen Moltmann,『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이신건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15-16.). [본문으로]
    4.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신학과 목회』20(2003): 171-176; 182-188. [본문으로]
    5. 한스 큉은 패러다임의 정의에 대해 T.S. Kuhn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Chicago 1962)'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본문으로]
    6. Hans Küng,『그리스도교』이종한 역 (칠곡: 분도, 2002), pp. 25-100. 참조. [본문으로]
    7.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이홍근 역 (칠곡: 분도, 1978), pp. 15-45; 한스 큉은 이에 관해 그리스도교와 교회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비밀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온갖 비본질적인 것들을 헤치고 언제나 다시금 힘차게 뚫고나온 역사"라고 말한다(Hans Küng,『그리스도교』p. 969.). [본문으로]
    8. Hans Küng,『교회』pp. 55-140. 참조. [본문으로]
    9.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박봉랑 외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p 80.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40. [본문으로]
    11. 위의 책, pp. 217-218. [본문으로]
    12.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85-93. [본문으로]
    13.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77. [본문으로]
    14.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pp. 140-142. [본문으로]
    15. 마 25:31-46에 나타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가 동일시하였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위의 책, pp. 142-147. 참조.). [본문으로]
    16. 위의 책, pp. 283-285. [본문으로]
    17.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78-179. [본문으로]
    18. 위의 책, 175. [본문으로]
    19. Jürgen Moltmann,『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pp. 317-337. 참조. [본문으로]
    20. 위의 책, p. 21 [본문으로]
    21. 김동건, “몰트만 교회론의 특징들,” 187-188. [본문으로]
    22. 한스 큉은 이것을 ‘보편성’이라고 말한다(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127-137. 참조). [본문으로]
    23. 몰트만의 사도직에 관한 부분과 그 강조점이 다르지만, 교회론적 의미에서는 크게 몰트만과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24. 한스 큉은 이것을 ‘사도성’이라고 말한다(Hans Küng,『교회』pp. 493-514. 참조.) [본문으로]
    25. Hans Küng,『교회란 무엇인가』pp. 153-194.참조. [본문으로]
    26. 물론 교회론에 관한 논리를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몰트만은 역사나 시대적 교회공동체의 전개를 하지 않고, 참 메시아적 교회공동체에 대해 정의하고 있고, 한스 큉은 역사 시대적 교회공동체의 비 본질을 하나씩 벗겨나감으로서 참 교회공동체를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한스 큉과 몰트만은 논리 전개의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교회공동체에 대한 한스 큉과 몰트만의 견해는 아주 많은 부분이 상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7. 몰트만의 경우는 사도직과 성례전, 한스 큉의 경우에는 하나됨 · 보편성 · 거룩성 · 사도성을, 본회퍼의 경우는 성례전과 말씀을 교회 전통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8. 자가 쓴 ‘현재적 임재와 미래적 임재’의 개념은 몰트만의 ‘파루시아’에 대한 이해와 상응한다(Jürgen Moltmann,『예수 그리스도의 길-메시아적 차원의 그리스도론』 김균진 외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435-474. 참조.). [본문으로]
    29. 여기서 공동체성이란, 믿음, 자원, 기호,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참여자의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로의 공동체성(그리스도적 공동체)을 말한다. [본문으로]
    30. 정지련, “디트리히 본회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과 한국교회,”『기독교사상』10(2006): 95-96. [본문으로]
    31.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hg. v. J. v. Sossten, DBW 1,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6) p. 30. 고재길,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37(2010): 129.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2. Dietrich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hg. v. J. v. Sossten, DBW 1,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86) pp. 50-51. 고재길,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37(2010): 13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3. 유석성.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 사상,"『신학과 선교』 18(1993): 169-195. 참조. [본문으로]
    34. 본회퍼의 이러한 인격개념은 결코 철학적 인격개념이 아니며,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행위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 구별 속에서 신적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김재진. "본회퍼의 계시 현상의 실체적 해석학."『해석학과 토착화: 靑破 김광식 교수 회갑 기념 논총』(서울: 한들, 1999), pp. 173-196. 참조.) [본문으로]
    35. Dietrich Bonhoeffer,『신도의 공동생활』 pp. 19-20. [본문으로]
    36. Paul Knitter,『종교신학입문』유정원 역 (칠곡: 분도, 2007), pp. 54-55. [본문으로]
    Posted by 숑숑숑~

     





       C.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의 신앙삶




      늦봄 문익환이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현장 그 역사 속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목회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 안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신앙삶의 결과이자, 문익환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1] 그가 처음부터 한반도의 현실에 투신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일쑤였다.[각주:2] 하지만 신앙이 그를 세우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목회자로서, 교수로서, 성서번역가로서, 시인으로서 발전해나가며 단순히 교회 안의 목회자라는 틀을 넘어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신앙삶을 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성과 속을 아우르는 신앙삶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장준하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생기고, 10월 4일 그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울대생들의 궐기대회가 있었다. 11월 5일에는 함석헌, 김재준 목사와 김지하 시인 등 15인의 지식인에 의한 시국선언(時局宣言)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2월 24일 장준하는 ‘유신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불과 열흘 만에 40여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박정희는 그 대처로 긴급조치 1호를 시행했고, 체포 1호로 장준하가 체포되었다.[각주:3]


      긴급조치는 폭압의 통치였다. 모든 형태의 파업이 불법임을 선언하며, 1974년 긴급조치 9호는 정권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국가안보의 위반과 다름없는 것을 만들었다. 문익환의 동생이었던 문동환과, 안병무가 정치교수 1호가 되어 1975년 6월 12일자로 문교부의 압력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났고, 얼마 안 되어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등도 실직하게 되었다. 이에 문동환의 주도로 ‘갈릴리 교회’라는 특수한 교회가 만들어졌고, 문익환은 거기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열린 첫날, 장준하가 등산길에 실족사했다는 전화가 왔다.[각주:4]


      그렇게 장준하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늦봄은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조사하게 되고, 단순한 실족사가 아닌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각주:5] 늦봄이 장준하 영결식의 장례위원장을 맡으며 장준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장준하가 말했던 현실의 사회악이 무엇인지 절실히 파악했고 그것에 동의되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해보였다.[각주:6]


      문익환은 장준하가 바라본 한반도의 상황과 사회악에 동의하면서 장준하를 땅에 묻지 않고 역사 속에 살리고자,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사설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고자 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인쇄가 불발되고 늦봄은 그 사회악을 더욱 절실히 느끼며 절망하게 되였다.[각주:7]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3.1절이 가까워져 오는 즈음에, 장준하를 생각하며 책상에 둔 ‘씨의 소리‘을 보게 되었고, 그 안에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장준하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것에 공감하여 하룻밤 만에 문건을 만들게 된 것이 바로 ’3.1 민주구국선언문(民主救國宣言)‘이었다.[각주:8]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각주:9]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4. 유신정권은 퇴진해야 한다.[각주:10]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 3.1절 기념 미사를 드린 자리에서 3.1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었고, 문익환 목사는 그렇게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각주:11] 당시 이 일을 정부는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규정하고, 가담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하였다.[각주:12]


      이렇게 해서 시작되고 계속된 늦봄 문익환의 민주운동은 말 그대로 민(民)이 주(主)가 되는 의식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었다. 당시 장준하의 죽음 이전에 박정희정권은 베트남의 통일을 ‘월남 패망’이라는 용어로 민중운동을 탄압하는 선전으로 사용하며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이어갔는데, 그것은 그나마 전태일 열사가 지펴 올린 민주에 대한 불씨조차 꺼트릴 위기였다.


      민이 하나가 된다면 세계 최강의 힘을 가진 외세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으며,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전 민족의 뜻을 하나로 모은 영웅이었다, 자유주의가 독재를 하면 분단된 사회의 민중은 공산주의를 선택해서라도 국민통합의 길을 가게 된다![각주:13]


      이렇게 문익환 목사는 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교회의 설교나, 수필, 문인들과 동생들(문동환과 인권운동가들)과의 대화에서도, 옥중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거듭 강조하곤 했다.


      월남전의 종식이 나에게 준 충격이 어떤 것이었느냐? 그건 이런 것이었죠. 이 땅에서 이대로 독재가 계속되어 민주화의 가망이 없다는 것이 우리 겨레의 확신이 되면, 우리 겨레도 월남 민중과 같은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두 독재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면 우리 겨레도 어쩔 수 없이 월남 민중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구나. 이 같은 예감에 나는 몸서리쳐지는 걸 느꼈던 거죠.[각주:14]


      이러한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민중이 이념을 넘어서 국민통합을 열망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바로 ‘민주(民主)’라고 생각했다. 즉, 민(民)이 하나가 되고 주인(主)이 된다면 어떠한 거대한 힘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만약 독재로 인해 민주화의 가망이 사라지게 되면, 원하지 않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민(民)이 주(主)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즉, 그는 이데올로기나 독재 같은 것을 넘어선 민족의 통합과 민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구심점이 되는 인물인 장준하가 죽는 위기에 놓이자,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를 대신하여 민족의 열망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1976년 갈릴리교회에서 있었던 새해설교[각주:15]의 일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온 누리가 맡겨집니다. 하느님 대신으로 이 세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영광이죠. 이를테면 하느님의 창조대업이 서느냐 무너지느냐 하는 막중한 책임이 사람의 어깨에 메어졌다는 말입니다. 책임이죠.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 영광스러우면서도 막중한 책임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누리를 하느님 대신 책임진다니, 무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창조의 핵심인 생명을 짓바수지 않고 아끼는 일이죠. 생명을 짓밟지 않고 떠받드는 일이죠. 생명을 멸시하지 않고 찬양하는 일이죠. 생명을 깎아 내리지 않고 북돋우는 일이죠. 생명을 죽이지 않고 싱싱하게 키우고 꽃피우는 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일이죠.[각주:16]


      즉, ‘하나님의 창조대업에 대한 사람의 책임성은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이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으로서 민주통일운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인 한반도의 ‘생명 바그라짐’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행동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다시 살펴보면, ‘민족통일의 기회는 남과 북의 정치가들의 자세 여하로 다가올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고 했고, 또한 통일된 나라를 위한 정책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강조했는데,[각주:17] 이러한 강조는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이 멸시당하지 않고 풍성케 함에 대한 사회적 표현이자,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늦봄 문익환 목사는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을 달리보지 않고,[각주:18] 이것들을 한반도의 민중이 원하는 궁극적 실현이며, 한반도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풍성케 하는 삶이라 이해했다.


      사실 당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관하여, 일부 민주운동가들은 먼저 민주화가 되어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선민주 후통일(先民主 後統一)을 주장했고, 반면 보다 급진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통일이 되어야 민주화도 가능하다는 선통일 후민주(先統一 後民主)를 주장했는데,[각주:19] 문익환 그에게 있어서 민주운동이나 통일운동은 어느 것 자체가 절대적이진 않았다고 할 수 있다.[각주:20]


      늦봄 문익환에게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은 모두 한반도공동체성을 바르게 돌려놓는 작업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신앙삶의 고민이었고, 생명(生命) 즉 ’지상의 삶이 죽음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에 대한 책임성‘이었으므로 그는 이것을 향해 투신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익환의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은 생명과 평화운동[각주:21]으로, ‘종교성’이란 틀에 가두지 않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삶의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커다란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우리 겨레는 검은 리본을 쓰고 탈색된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분통이 다 터졌는데 ‘무슨 파’니 ‘무슨 그룹’이니 하고 우리에게 씌워지는 검은 리본이 감긴 틀이 어찌나 그리 많은지! 우리에게는 터뜨릴 분통마저 남아있지 않다. … 우리 다 이 틀에서 걸어 나가야한다. 모세가 왕궁에서 걸어 나갔듯이! 아모스가 양을 몰고 들로 나갔듯이! 세례요한이 광야로, 예수가 인간사회 속으로 걸어 나갔듯이! 사울이 헤롯의 성전에서 걸어 나갔듯이! 루터가 수도원에서 걸어 나갔듯이![각주:22]


      문익환 목사는 그렇게 선지자들이 그러했듯, 세례요한과 사울과 루터가 그러했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 그 시대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해, 근현대사에서 어지럽게 억눌리고 잃어버린 한반도의 공동체성을 되찾기 위해 걸어 나갔다.


      그런 그에게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그의 행동의 적극적 전환의 계기가 있었는데,[각주:23] 바로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주제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다, 눈앞에 학생회관 옥상에서 원예과 1년 이동수 군(23)의 투신을 목격했던 것이다.[각주:24] 문익환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부는 문익환 목사를 이동수의 분신을 선동한 배후조종자로 지명수배 했고, 그는 다음날 계명대학교 강의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자진출두하게 되었다.


      통일운동은 내 생의 핵심이 되었다. 자나 깨나 통일이 생의 전부나 다름없이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 꽃 같은 청춘을 아낌없이 민족 제단에 바치는 걸 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온 몸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 한다’ ‘이 분단의 장벽을 뚫는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일성이 민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가슴을 두드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각주:25]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는 분단의 장벽, 깊어만 가는 불신의 심연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민족의 제단에 초개처럼 버리는 걸 보면서, 이 젊은이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라는 사람이 무언가 이 장벽을 깨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휘말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각주:26]


      이 민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도시민과 농민으로, 고용주와 피고용자로 등등 사회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보아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주종관계를 일소하는 일을 민주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지배자-피지배자로 분열되어 있는 민족을 통일하는 일입니다.[각주:27]


      늦봄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그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분단된 국토와 이념, 그 가운데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며, 이 모든 한반도 근현대사의 엉킨 첫 단추를 다시 제대로 잠그는 일이었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중 일부분)[각주:28]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풀어버리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사십사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고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문익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 일부분)[각주:29]


      이 시처럼 문익환 목사는 평양에 갔다. 아무도 갈 수 없다던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두 번에 걸쳐 회담하고 북조선 조국통일위원회와의 공동 명의로 ‘평화통일원칙 9개항’을 발표했고,[각주:30] 돌아와 그는 체포되었고, 구속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해 온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여 ‘느슨한 연방제’라는 표현을 여섯 번째 항에 포함시킨다. 이후 이 4.2 공동선언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0년부터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교류 협력사업,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한민족이 가져야 한다는 햇볕정책으로 실현되었고, 6.15 공동선언의 기초가 되었다.[각주:31]


      민주통일운동가이자, 목회자였던 문익환이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1993년 3월 26일 통일신학동지회가 주최한 모임에서 그는 ‘통일신학’에 대해 강연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민주통일운동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말했다. 그는 먼저 한국기독교와 기독교인을 평가하면서 ‘한국 기독교인은 이 민족의 역사에서 아주 탈락할 것‘을 예상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기독교인들은 한 눈으로는 하늘나라, 한 눈으로는 세상나라, 이 둘을 보고 있기에 다들 사팔뜨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즉, ’성과 속을 구분하지 말고 이원론적인 것을 극복해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런 이원론적인 삶을 해소하고 화해시키며, ’마음의 평화 뿐 아니라, 땅의 평화‘를 말하는 ’예수의 평화를 통일‘로 보았다. 즉, 평화는 생명사랑운동이며, 그럼으로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 주장하며,[각주:32] ‘남쪽과 북쪽마다 좋은 것을 인정하고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말했다.[각주:33]


      그는 어느 날 양 떼를 따라 시내산 기슭을 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그리로 여러번 지나다녔을 것입니다. 그곳은 결코 거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대상도, 강도떼도, 목자도, 먹을 것을 주우러 다니는 부인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다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는 똥오줌을 싸는 양 떼를 아무 두려움 없이 그리로 몰고 지나갔던 것입니다. 그의 몸에는 때 묻은 더러운 옷이 그대로 걸쳐져 있었고, 그의 발에는 더러운 신이 그대로 신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경내로 들어가는 차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상 입는 옷을 입고, 일상 가진 마음가짐으로 자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거룩하지도 않은 속된 땅에서 모세는 홀연히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 종교적인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사회는 속된 것이라는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모든 장소가,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각주:34]


      이렇게 목회자이자 민주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의 삶을 요약하자면,


      첫째,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철저한 신앙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민주통일운동은 ‘민족과 한반도에 대한 종교적 섬김’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목회를 떠나 민주와 통일이라는 사회적 운동에 미쳐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에게 신앙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이 없었다면,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의 삶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에서 사회로’를 외치고 고민했고, 민주통일운동가로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외치고 고민했던 신앙삶이었다 말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자신이 고민했던 신앙삶을 삶으로 나타낸 이였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은 말로 되는 것도 아니요, 통일을 원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세의 변화입니다. … 당신들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을 할 것이면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답해야 합니다. … 이 물음은 사실 7천만 겨레가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정말 통일을 원하는가?[각주:35]

      늦봄은 그저 말로만 통일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민주와 통일에 대한 꿈만 꾸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꿈꾸던 한반도의 평화가 현실이 되도록 행동했다. 문익환 목사에게 있어서 통일이란 단순히 철책선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 근대사 속의 모든 고통을 없애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실천이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다 죽어간 이들의 ’부활’이었다.[각주:36]


      셋째, 그의 행동했던 신앙삶은 한반도공동체성 회복과, 한국 교회공동체성 회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어느 한편을 이롭게 하고 한편을 불리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말이 무엇이겠느냐는 걸 찾아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각주:37]

      이처럼 그가 바랐던 것은 이 혼란하고 복잡했던 그리고 고통 받고 상실되었던 한반도 공동체성의 회복이었다. 한반도의 온갖 ‘생명 바그라짐’을 ‘생명 아우러짐’으로 돌려놓길 원했고, 어떤 특정한 세력의 힘에 의한 불완전한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 바꾸길 원했다. 그것은 단순히 혼란스럽던 한반도공동체성의 회복만이 아니였다. 한반도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한국교회사의 문제이며, 한국교회 공동체성의 회복이기도 했다.[각주:38]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았던 늦봄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공동체에게는 ‘종교적 섬김’을, 한국교회 공동체에게는 ‘사회적 섬김’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한국교회 대다수는 문익환 목사의 우려에서 나온 섬김의 삶을 잊은 채 역사와 공동체성을 등한시했고, 도리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은 이들에게 문익환 목사의 신앙삶은 ‘예수의 사랑과 삶’으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각주:39]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목회자로서 문익환의 신앙삶에 있어서 그의 끊임없는 고민이었던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인이 됨으로서 목회자란 틀을 벗어나게 되고, 전태일 열사로 인해 사회로 가까워지고, 절친했던 장준하의 죽음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민주통일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일본에서 강제징병에 학병을 피해 북간도로 돌아가게 되면서 그는 윤동주와 송몽규를 잃고 아파했으며, 광복 후 전쟁전의 혼란기에서 그는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감으로서 조국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고, 장준하의 죽음을 통해서 장준하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적 상황에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을 아파하며 그의 대타라고 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된다(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의 형성과 성격", 『한국기독교와 역사』 27(2007): 176-177. ; 김형수,『문익환평전』pp. 431-441.). 또한, 복음동지회 친구들과 ‘조언하기 게임’을 할 때, 전택부가 말하길 “야인이 되소서. 험하게 놀기도 하시고..”라고 정확히 정곡을 찌른 촌철살인적 말을 듣기도 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359.). [본문으로]
    3. 위의 책, pp. 420-421. [본문으로]
    4. 위의 책, p. 422. [본문으로]
    5. 위의 책, p. 430. [본문으로]
    6. “조사(弔詞)를 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문익환 목사였다. 기자로서 이런저런 현장을 많이 보고 섬뜩한 일도 겪어보았지만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괴수를 향해 그렇게 직격탄을 날리는 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 얼굴과 목소리는 기독교회관 강당 뒷자리의 그 부드럽고 유순한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김종철,『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서울: 개마고원, 1999) 참조) [본문으로]
    7. 이와 관련하여 문익환 목사는 “1976년을 맞이한 나는 온 겨레와 함께 암담하기만 했었죠. 장준하는 죽고 말았고, 동아일보 광고란에서 불타오르던 민의 민주 열망도 동아일보 사주 측의 배신으로 사그러들었고, 언론자유를 수호하려던 기자들은 쫓겨나고 학원마저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버렸고, 그러나 내게는 성서번역이라는 나의 생을 건 일이 있어서 그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암담한 오늘의 역사를 잊으려고 했던 거죠.”라고 말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435-439.). [본문으로]
    8. 장준하의 의문사를 접하고 문익환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장준하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정으로 쓰려고 현상한 사진을 한 장 더 빼어 모셔둔 것으로 늦봄은 사진을 보면 마치 산 사람에게 이야기 하듯 말을 걸곤 하였다. 2월 어느 날, 문익환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살아있다면 이번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 때 ‘내가 하는 걸 형은 왜 하지 못해?’라는 장준하의 음성을 들었다(위의 책, pp. 440-441.). [본문으로]
    9.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이태영, 이우정,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 등이 서명했으나, 실제 작성자인 문익환은 번역의 이유로 명단에서 빠져있다. 하지만 스스로 작성했음을 시인하여 함께 재판을 받게 된다. 이 구국선언문 재판은 일명 ‘민주교실’로 불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피고들의 구성이 전직 대통령, 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인물, 전 외무장관, 한국의 사상가, 야당의 거물, 기독교계 장로, 신구양 교회의 지도자들, 대학교수, 거기다 여성운동가와 변호사들까지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민주교실’ 에피소드로는 함석헌 선생이 상복을 입고 재판정에 등장하자, 사람들이 놀라 물으니 “민주주의가 죽었어.”라고 한 에피소드부터, 김대중씨의 정치, 경제, 외교,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논리적 해박함과 달변에 검찰 측은 쩔쩔 매었고 함석헌 선생이 그 모습을 보며 “진짜 대통령은 여기 있다.”고 했던 에피소드와, 피고 신문 중에 서로 더 잘 안다고 발표하듯 손들고 답하겠다고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본문으로]
    10. ‘3.1민주구국선언문’의 요약한 4개 항 중 1번부터 3번은 ’3.1민주구국선언문‘ 내용의 각 항목이며, 요약 4번째 항인 “유신정권은 퇴진해야 한다.”는 민주구국선언문 전체에 걸쳐 의미되고 있는 부분이다(문익환, “민주구국선언,”『문익환 전집 제 3권 - 통일 1』(서울: 사계절, 1999), pp. 13-18. 참조.). [본문으로]
    11. 구속을 각오한 서명을 받으면서 “너도 끼워줄까? 안 끼워주면 나중에 섭섭해 할 텐데..”라며 흥겨운 놀이를 권하듯 하였다. 그의 이런 낙천성은 사소한 생각과 노선의 차이를 넘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저항의 민중운동을 흥겹고 희망찬 싸움으로 만들어 가면서, 문익환 목사는 간디의 말을 빌어 “신랑이 신부 방에 들듯이!” 기쁜 마음으로 감옥을 찾았다. [본문으로]
    12. 김응교, "고마운 사람, 문익환 목사", 『복음과 상황』 6(2004): 12. [본문으로]
    13. 김형수,『문익환평전』p. 437. [본문으로]
    14. 위의 책, pp. 437-438. [본문으로]
    15. 본 설교는 1975년 8월 17일 장준하의 죽음과,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 사이의 설교이다. [본문으로]
    16. 문익환, “빛이 있었다면,“ 『문익환 전집 제12권 - 설교』(서울: 사계절, 1999), p. 178. [본문으로]
    17. 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의 형성과 성격”, 185. [본문으로]
    18.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한다. 민주회복 이외에 우리가 바라는 통일에 이르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은 둘이 아니다.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회복이 곧 통일이다. 민주회복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통일에 이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인 것이다.”(문익환, “같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인가,“ 『문익환 전집 제4권 - 통일 2』(서울: 사계절, 1999), p. 203.) [본문으로]
    19. 당시 기독교계 민주화와 통일과의 관계에 대한 것은 아래의 논문과 책을 참조바람(김흥수,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역사에 대한 재검토”,『신학과 현장』1(1991): 253-278 ; 정성한,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 pp. 235-372.). [본문으로]
    20. 문익환 목사는 이러한 선민주 후통일 혹은, 선통일 후민주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분리해서 선후관계로 규정하기보다, 서로 결합하고 병행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말했다. 즉, 남한사회와 민주화를 추구하는 민주화운동은 통일에 유리한 조건을 여는 것이고, 반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통일운동은 안보논리를 바탕으로 독재를 강화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민주화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의 형성과 성격", 186.). [본문으로]
    21. 문익환 목사의 세 번째 감옥생활(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에서 민주운동과 통일운동은 모두 평화운동이라고 깨달았다. 당시 그는 나라는 분단되고,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이라는 4강의 이권각축장이 되어버려서 초강대국들의 긴장고조는 한반도 국민들의 뜻과 상관없이 전쟁을 일으킬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익환은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화약고이기 때문에 이의 극복은 우리의 민족적인 관심사인 동시에 세계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나라가 세계 평화를 깨뜨리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화약고의 구실을 하느냐, 세계평화의 열쇠가 되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서 벌이는 운동”이라 말했다(문익환, “7.4 공동성명 이후의 민족문제”,『취영 홍남순 선생 고희기념논총』(서울: 형성사, 1983), p. 90.). [본문으로]
    22. 김형수,『문익환평전』p. 622. [본문으로]
    23. 물론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다르게 보지 않고 하나로 보았다. 다만,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항쟁을 지나면서 민주화운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위의 책, p. 683.). 또한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문익환은 “그들은 결코 나라를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최고도 아니요. 나라에 대한 충성이 우리의 마지막 충성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명령이면, 누구나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라고 하는 무인격적인 힘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즉, 광주시민들을 보며 나라를 넘어 민족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은 이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위의 책, pp. 606-620.). [본문으로]
    24. 이 날 늦봄이 집을 나설 때 어머니 김신묵이 아들을 불러 세워 놓고, 대학생들의 분신죽음을 걱정하며 죽기보다 살아서 싸우길 부탁했다. 문익환은 강연에 앞서 어머니의 부탁의 말을 하려던 찰나 이 일이 벌어졌다(위의 책, p. 631.). 그것이 생애 가장 큰 충격이라고 문익환은 말했다(위의 책, p. 637.). [본문으로]
    25. 문익환,『걸어서라도 갈테야』(서울: 실천문학사, 1990), pp. 25-26. [본문으로]
    26. 문익환, “상고이유서,”『문익환 전집 제5권 - 통일 3』(서울: 사계절, 1999), p. 94. [본문으로]
    27. 위의 책, p. 92. [본문으로]
    28.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pp. 152-154. [본문으로]
    29. 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문익환 전집 제1권 - 시집 1』pp. 13-16. [본문으로]
    30.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p. 200. [본문으로]
    31.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97-99. [본문으로]
    32. 모든 통일은 좋은 것이라는 부분은 장준하의 통일에 관한 주장을 문익환이 강력히 동의한 것이다. 『씨의 소리』 1972년 9월호서 장준하는 “민족적 양심 앞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가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것 이상의 명제는 없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런 대원칙 아래서 굳어진 논리, 고집스러운 자세를 고쳐가야 한다. 근본과 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앞선 당위이며, 가치며, 무엇이 거기에 따르는 것인가를 가려야 한다. 모든 통일이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의 명령은 없다.”(김형수, 『문익환평전』 p. 427.) [본문으로]
    33. 문익환, “통일신학에 대하여,“ 『문익환 전집 제11권 - 신학 2』(서울: 사계절, 1999) pp. 371-386. 참조. [본문으로]
    34. 문익환, “거룩한 땅,“ 『문익환 전집 제12권 - 설교』(서울: 사계절, 1999), pp. 297-298. [본문으로]
    35. 문익환, “상고이유서,”『문익환 전집 제5권 - 통일 3』p. 245; 249; 261. [본문으로]
    36. 정경호,"분단된 한반도의 신앙인들이 이해해야만 할 “난장이 그리스도” -지구촌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향햐여-", 『신학과 목회』 19(2003): 211-212. 평양 봉수교회 예배 후 그에게 부활은 각별한 의미로 “민주는 민중이 되살아나는 일이요, 통일은 민족이 되살아나는 일이다“라고 믿었다. ”민족통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일만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통일운동은 부활신앙을 역사 속에서 사는 일입니다”라고 말한 후 ‘거리의 부활’(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이란 노래를 불렀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713-714). [본문으로]
    37. 위의 책, p. 712. [본문으로]
    38. 정경호,"분단된 한반도의 신앙인들이 이해해야만 할 “난장이 그리스도” -지구촌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향햐여-", 197-213. [본문으로]
    39. 2010년 현재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북녘형제들을 선교의 대상이외로는 잘 이해하지 않는다. 그 근거로 한상렬 목사의 방북이후 개신교의 그에 대한 비판이 이를 입증한다. 문익환의 죽음에 교회보다, 사회가 더 아파했다. 그가 199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그의 상여를 들겠다고 나선 이들은 다름 아닌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 소속의 해고노동자들이었다. 전태일 아닌 거짓을 꾸짖던 문익환 목사는 마침내 전태일들의 손으로 운구되어 떠났다. [본문으로]
    Posted by 숑숑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