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이한열 열사 추모사가 자동재생됩니다. 



    B. 목회자 문익환의 신앙삶



   문익환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는 그 시대적 배경과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조상들이 겪었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육진문화(六鎭文化)의 분위기에, 문익환 자신이 태어나 배우고 자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모습들, 또한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기독신앙 그리고 명동촌의 영향이 늦봄 문익환의 신앙삶을 만들었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가 목회자가 된 이유는 그 주변에 그에게 영향을 준 모든 이들이 참 애국자였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며 목회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사회와 교회를 달리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각주:1]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에 올바르게 나아가는 길이라 꿈꾸었던 선생이라는 길이 허무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 느꼈을 때, 그가 목회자라는 길을 선택한 데에는 그의 신앙과 그 공동체적인 환경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각주: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된 문익환이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시대정국(1947-49년)을 꿰뚫어볼 혜안(慧眼)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두고 홀연히 도미하였다.[각주:3] 유학 중 전쟁이 터지면서, 그가 유엔 극동사령부에서 정전회담 통역을 자원하게 되고,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참상과 정치적 기득권들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전환을 하게 된다.

   문익환 목사가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갔을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각주:4] 그는 묵시문학을 통해, 구약역사를 통해 히브리인들에게서 한반도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했다.[각주:5]

   당시 한국기독교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는 전쟁의 여파로 가정이 파괴되고 수많은 이가 죽어가는 고통의 현실 속에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물질적 축복과 위로를 받고자 하는 기복신앙과 신비주의신앙의 흐름이 그 첫 번째 였고,[각주:6] 또 다른 하나는 전쟁을 통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한 기독교인들과 북측 정권의 탄압을 피해 대거 남하한 기독교세력들이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반공을 외치면서도 다른 사회문제에는 이상하게도 기형적으로 무관심한 흐름이 있었다.[각주:7] 이런 상황 속에서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공동체의 현실을 고민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고민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문익환 목사는 한빛교회를 맡아 목회하면서, 한신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구약강의를 나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잃은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 어린 제자들을 짧은 시간 내에 바른 목회자, 바른 교회지도자로 길러내고자 시간엄수, 책임감, 올바른 글쓰기, 말하기 등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학생에게 그는 융통성 없고 인기 없는 교수로 심지어 그의 히브리어수업이 기피되는 현상까지 생겨나기도 했다.[각주:8] 문익환 목사의 이런 융통성없는 엄격한 가르침은 아마도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변해가는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한반도공동체와 한국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였고, 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의 강의와 함께 문익환 목사는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저작활동 연혁을 보면 1955-56년까지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각주:9] 또한 1958-59년까지 기독교사상에 매월 글을 기고하면서 예레미야에 대해 글을 적었는데,[각주:10] 이것으로 비추어보자면 문익환은 세상 사회구조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61년의 기고글들을 보면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 ‘한국 크리스천의 신앙형태’, ‘연세대학교 분규를 슬퍼한다’, ‘섬기는 주로서의 그리스도 고난의 종’ 등 직접적인 사회현상과 구조악에 대한 비판과 느낌이 주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각주:11]

   1964년 문익환 목사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번역했는데, ‘신도의 공동생활’ 옮긴이의 말에서 문익환은 자신이 본회퍼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은 ‘신학보다는 그 같은 생애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너무 어려운 가운데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 신앙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이’ 문익환 자신에게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노라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관심은 본회퍼의 신학에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의 저서들을 읽고 그의 신학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며 '신도의 공동생활‘을 번역하고 출판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각주:12]

   문익환은 본회퍼를 평가하면서 자신이 몇 년간 예레미야에 대한 글을 기고했듯, ‘사랑하는 조국이 망할 것을 하나님 때문에 원하여 민족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의 후배’로 평했다.[각주:13]

   또한 자신이 번역한 ‘신도의 공동생활’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작은 책은 세속 세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고 있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벌써 그리스도인은 세속 세계 속에 뿌려진 씨라고 말한다. 말씀 아래서 성립되고 생명을 보존하고 움직이며 사명을 다하는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하겠다. 교회를 사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이미 비종교적이요 세속적인 이해가 아니겠는가?”[각주:14]


   이렇게 문 목사의 당시 글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한국전쟁 이후 자신의 신앙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한반도공동체를 달리보지 않고, 하나로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신앙인으로 한반도공동체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저작활동 외에도 문익환 목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서번역이었다. 복음동지회[각주:15]에서 시작되었던 성서번역이 빛을 발하면서 문익환은 1968년 4월, 신·구교 성서공동번역의 책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의 공식직함은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위원장’이었다. 그는 이 일에 부름을 받은 것을 “영광이라기보다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축복이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각주:16]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통해 겨레의 정신이 깨어났고, 민중과 여성계의 문맹이 퇴치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나라를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음을 주목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권위만큼 과거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의 권위가 반영되어왔고, 그러다보니 성서를 해석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부패했었다. 그 불합리한 권위체계를 파괴한 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이었다. 1521년 루터는 단호하게,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서 성서 자체로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이양했다. 독일어로 루터가 성서를 번역함으로 인해 기존의 라틴어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했던, 그리고 그 권위에 눌려있던 사람들에게 성서를 다시금 돌려줬고, 성서는 성서로서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음을 문익환은 주목했다.[각주:17]

   이처럼 문익환은 1960년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모두를 성서의 번역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익환 목사는 공동번역의 일을 통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첫째 신교와 구교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험이고, 둘째 신학적인 편견이 걷히는 경험이며, 셋째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무는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각주:18]

   그는 가톨릭 측 번역자인 선종완 신부와 상의하여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란 원칙을 정했다.[각주:19] 이 말은 교회 내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지고 교회 밖으로 나아감을, 또한 교회 바깥에서는 더 이상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번역이 아닌 모두가 이해되는 번역을 말하는 것이었다.[각주:20]

   이렇게 시작된 성서번역작업에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고민하며 부딪치기 시작했다.[각주:21]


   “문학작품 중의 문학작품이라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훌륭한 작품으로 옮겨내는냐는 생각이 처음부터 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소. ‘특히 그 시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는 한국시단을 총동원할 심산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더군요.”[각주:22]


   그는 처음에는 직접 번역한 시를 가지고 시인들을 찾아다녔고, 결국에는 그 스스로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공부했고,[각주:23] 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그토록 부끄러웠던[각주:24] 시인이 되었다. 문익환은 목사에서 시인이 되면서, 더 이상 목회자란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시인들의 자유로운 습성을 따라 고민과 삶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파격적인 삶으로서의 전환에 대한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70년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한 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각주:25]


(문익환 시 ‘전태일’ 중 일부분)


   문익환은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가 그의 정신을 움직였고, 그 다음은 전태일이 그의 육신을 움직였다. 청년은 죽었지만, 그 청년이 민중의 삶 속에서 부활했음을 문익환은 깨달았다. 그 또한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부활시킬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1970년 그는 번역작업에 매달리겠다고 한빛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번역작업을 위해 고민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필요로 하고 부르는 곳에는 어디든 달려갔다.[각주:26]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늦봄 문익환이 자신이 그토록 고민했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익환은 1973년 6월 1일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발행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아호인 ‘늦봄’을 썼다. 그 시집의 발행일이 6월 1일 그의 55번째 생일인 것을 보면 그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각주:27] 시집을 내기 시작하면서 시인이 되어 시를 통해 세상을 이야기하고 이해했고, 그것은 삶이 되어 돌아왔다.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 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째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가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살일 겁니다[각주:28]


(문익환 시 ‘난 발바닥으로’ 전문)


   이처럼 늦봄 문익환이 역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투신한 것은 단순히 절친한 장준하의 죽음에서 폭발한 단순한 혈기가 아닌, 아주 오랜 시간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라는 문익환의 신앙삶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은 단순히 종교라는 틀로 국한된 삶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한반도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목회자로서 문익환의 신앙삶은 북간도의 그의 공동체가 그를 신앙인에서 목회자로 이끌었던 것으로 시작하여, 전쟁의 참상(慘狀)과 이기(利己)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한반도공동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 직접적인 삶의 행동으로 한반도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교수로서 엄격하게 가르쳤다. 또한 글을 통해 자신의 그 실질적 고민들을 분출하고 나누고 드러냈으며, 성서번역을 통해 일그러진 한국교회와 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꿈꾸었고, 번역 중에 부딪힌 시를 통해 시인이 되어 목회자라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나 성과 속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는 문익환이 되었으며,[각주:29] 사회의 전태일 사건을 통해 목회자 문익환이라는 종교적 틀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예수를 따르는 신앙삶으로서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김형수,『문익환평전』pp. 193-194. [본문으로]
  2. 명동촌의 신앙을 가진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김약연 목사, 이동휘 선생, 정재면 목사, 한준명 선생, 아버지였던 문재린 목사, 삼촌이었던 이권찬 목사 등 문익환의 공동체적 환경은 그리스도인 즉, 바른 삶(애국)을 살아가는(예수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공동체적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3. 그는 이와 관련하여 방북재판 상고이유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유학감으로서 또다시 사회주의와 대결하지않고 후퇴를 하는 겁니다”(문익환,『문익환 전집 제 5권 - 통일 3』 (서울: 사계절, 1999), pp.88-89.) 또한, 문익환은 유학당시 아내였던 박용길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떠났다(김형수,『문익환평전』p. 818.). [본문으로]
  4. 위의 책, p. 325. [본문으로]
  5. 1963년 12월 “기독교사상”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전쟁 때문에 학업이 중단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루터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한국인의 기독교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냐는 문제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문익환, "내가 영향 받은 신학자와 그의 저서,"『문익환 전집 제 10권 - 신학 1』(서울: 사계절, 1999), p. 256). [본문으로]
  6.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pp. 614-619. [본문으로]
  7. 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pp. 171-173. [본문으로]
  8. 그 당시 문익환 목사의 별명은 “문이 꽝!”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구약이나 히브리어과목 때문에 낙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성적을 잘 받기 어려웠다. 또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묵과하지 못하는 엄격성 때문에 제자들의 문익환 교수에 대한 불평과 항의가 많았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329-332; 336 참조.). [본문으로]
  9. 1955년 - 4월 세상의 소금, 12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1956년 - 1월 하나와 아흔아홉; 엘리야의 기도와 바알선지자들의 기도;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2월 감사하는 사람, 3월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손님, 4월 오늘이라는 이날; 노아홍수의 교훈, 5월 무엇이 위기인가; 참 지도자, 6월 알지못하고 구하는 기도; 주의 제자들; 가지는 믿음과 주어지는 믿음, 7월 감사하는길, 8월 먼저 구할 것, 9월 그리스도인은 남다른가, 10월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11월 개인의 중요성;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서; 슬픔을 아는 사람, 12월 따뜻한 사람; 불가피한 생. [본문으로]
  10. 예레미야의 인물과 시대, 예레미야의 소명,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 예레미야의 슬픔 등. [본문으로]
  11. “기독교는 곧 아편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중독증에 걸려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문익환, “4월 혁명의 느낌 몇 토막,”『문익환 전집 제 6권 - 수필』(서울: 사계절, 1999), pp. 16-18.) 문익환 목사가 이와 같은 글을 적은 내면을 알기 위해서 당시 4.19혁명에 대한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의 인식들을 찾아보면, 첫째, 마산학생들의 부정선거에 대한 데모를 공산당 취급하여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서울에서 백리밖에 안되는 땅에 있는 공산당이 어떤 짓을 할지몰라 불안’해하는 내용의 1960년 4월 25일 기독공보 머릿기사가 실렸고, 또한 같은 해 5월 9일자 사설에는 학생들의 데모가 ‘빨갱이들의 조종’으로 몰고 가 반공이라는 이름 밑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함으로써 오히려 북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 ‘반공단체’들을 ‘깡패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은 매우 부족했고 편협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1960년 4월 22일 NCC의 ‘이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건의문’에 의하면, 해방 이후 한국 교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과된 사명이 기독교적 국가건설과 공산세력에 대결할 중대한 책무임을 확인하고, 3.15선거가 국민의 주권을 유린한 부정선거라고 규정하며 이로 인해 발생한 4.19는 경찰의 지나친 억압과 살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중대 사태에 대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공산주의와 싸울 민주주의 기반을 상실시켰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볼 때, 한국교회의 사회적 인식은 이데올로기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pp. 183-188.). [본문으로]
  12. Dietrich Bonhoeffer,『신도의 공동생활』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4), p. 9. [본문으로]
  13. 위의 책, p. 7. [본문으로]
  14. 위의 책, p. 11. [본문으로]
  15. 복음동지회는 장윤천, 장준하, 전경연, 김덕준, 홍태헌, 백이언, 김정준, 전택완, 이호운, 윤성범, 이병섭, 유동식, 유재선, 서남동, 박대선, 김용옥, 이재면, 고영춘, 김찬국, 조선출, 이여진, 박창환, 김하태, 이장식, 문희상, 지원용 등 각 교파 신학교의 중견신학자들이 망라된 단체로, 다달이 월례회와 회보 발행을 하면서도 회칙도 회장도 없는 자원봉사단 체제로 운영되었고, 1956년부터는 ‘임마누엘신학강좌’를 열었고, 1957년부터는 성서 번역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김형수,『문익환평전』p. 338.). [본문으로]
  16. 위의 책, p. 375. [본문으로]
  17. 당시 한국기독교는 교단분열과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양적 부흥은 되고 있었으나, 목회자들은 사회상황에 휘둘리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가졌었다. 그 가운데 피해와 아픔을 가지는 것은 순진한 성도들이었다. [본문으로]
  18. 위의 책, p. 375. [본문으로]
  19. 문익환,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문익환 전집 제 6권 - 수필』 pp. 300-307. 참조. [본문으로]
  20. 문익환은 이와 관련하여 실 예를 들고 있는데, “나는 얼마 전에 한 청년을 만나 이야기한 일이 있다. 그는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대뜸 “크리스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워놓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쳤더니, 잠언 25장에서는 “피인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은 것 같으니라”가 되어 있는데, 로마서 12자에서는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놓으리라”가 되어 있다. 이러니 그런 인상을 받을 수밖에. 공동번역에서는 “그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워주는 셈이 된다.”로 되어있다. '머리'가 '얼굴'이 되고 '숯불'이 '모닥불'이 되고 '셈이 된다.'는 말이 붙음으로 해서 원수에게 보복한다는 뜻은 사라지고 원수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으로 잘 나타내게 되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381-382.) [본문으로]
  21. 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89. [본문으로]
  22. 형수,『문익환평전』p. 388. [본문으로]
  23. 한국 시를 탐독하기 시작, 서가에는 ‘현대시학’ 3호부터 꽂혀있음(위의 책, p. 822.). [본문으로]
  24. 어릴 적 윤동주로부터 자신이 지은 시를 보여주고 부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이현주 목사(동화작가)는 ‘아하, 목사님은 일찍이 윤 시인으로 말미암아 시를 알게 되셨으면서도 그로 말미암아 시를 두려워하시는 구나’라고 말했다(채희동 “민중신학자의 생애와 사상 (3) : 늦봄 문익환의 삶과 사상 -님은 겨레의 예언자요 통일의 사도이시라-” 89-90.). [본문으로]
  25. 문익환, “전태일,”『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서울: 사계절, 1999), pp. 247-250. [본문으로]
  26. 김형수,『문익환평전』pp. 401-403. [본문으로]
  27. 그의 인생을 보노라면, 그가 처음부터 특별했거나 천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세심했고 유했으며 늘 고민했다. 그랬기에 윤동주와 송몽규를 보내며 아파했고, 역사에 투신하기 전까지 이데올로기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전쟁의 참상에 절망했고, 시대 앞에 침묵했었다. 그는 늦봄이 되기까지 보통의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본문으로]
  28. 문익환, “전태일,”『문익환 전집 제 1권 - 시집 1』p. 215. [본문으로]
  29. 문익환, “룻의 이삭주이,”『문익환 전집 제 10권 - 신학 1』(서울: 사계절, 1999), p. 526. [본문으로]
Posted by 숑숑숑~




1. 시대적 상황


C.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


   역사는 서구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이 서구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말한다. 산업적인 배경에서 일하고 선진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며, 고도산업국들의 아류(亞流)가 되는 것은 분명 유혹적이긴 하지만, 필히 독재정치를 경험시키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근대화는 발전이 아닌 삶의 뒤틀어짐이며, 진보가 아닌 생명의 죽임이었다. 한반도의 대한민국도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를 명목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근대화를 명목으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독재를 시작했다.[각주:1]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다. 한일정상화를 서둘러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달러의 차관을 받았으며, 민간기업들로부터 한국수출 총액의 1.5배에 달하는 투자를 받아냈다.[각주:2] 또한 미국이 벌이고 있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30만여명의 장병을 복무시켰고, 이에 따라 베트남은 한국기업들의 개척지가 되어 한국강철수출 총량의 49퍼센트와 수송장비수출의 52퍼센트를 흡수하였다.

   독재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허울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착취해 갔다. 한국 노동시장은 외국 자본가들에게는 천국이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미국 임금의 1/10을 받고 2.5배의 생산성을 올렸다. 이러한 산업화를 통해 농촌은 죽어갔고, 가난한 농민의 자녀들은 미숙련(未熟練) 혹은 반숙련(半熟練) 노동자 대열로 흡수되었다. 무너져 가는 농촌에서 나온 10대의 여성들은 부모나 가족을 위해 방적, 편물, 재봉, 신발, 단순조립, 식품가공 등을 하며 과다한 노동시간과 성적학대에도 불만을 낼 수 없었다. 그들의 하루 임금은 다방의 커피 한 잔 값에 해당될 뿐이었다.[각주:3]

    계속되는 독재정부와 산업화의 착취구조에서 한 청년의 죽음[각주:4]으로 한국의 정치 사회 정세는 갑자기 격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산업화가 만든 희생자가 아니었다.[각주:5] 그는 잊고 있던 한국에 민(民)주(主)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이후 산업화에 대한 투쟁, 독재정부로부터의 투쟁, 민중운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9년 8월의 YH사건[각주:6]을 시작으로 부마시민항쟁 그리고 결국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해방의 기쁨이 분단의 고통이 되었듯,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또 다른 정권을 만들었다. 또다른 군부정권이었다.

   1980년 5월 전국에서는 전두환의 군부가 물러가길, 학원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들이 거셌다. 18일,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戒嚴軍)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신군부의 무차별 진압과 언론통제로 인해 세계는 알아도 한국은 모르는 비참한 현실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군부세력은 형식적인 방법을 갖춰 정권을 득하게 되었고, 박정희정권과 차별성을 강조했지만 결국은 모양은 다르나 본질은 같은 군부독재였으며, 계속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護憲措置)[각주:7]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제 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으나,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것은 군부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각주:8]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냉전과 경쟁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남쪽 내의 민주화 운동은 더 이상 반국적(半國的) 운동을 넘어 통일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이 있었지만 그것은 보기 좋은 허울뿐이었고, 7.7선언 이후 전민련 대표들이 북쪽 대표를 만나러 판문점으로 가다 경찰의 저지를 받거나, 6.10학생회담, 8.15행사 불가 등의 모습을 보면서 문익환은 방북을 결심하게 되고,[각주:9] 결국 김일성 주석을 만나 4.2공동선언을 하게 되면서 통일에 관한 논의는 더욱 강하게 계속 되었다. 이후 1990년대가 되어 독일 통일, 걸프전, 소비에트 해체 등의 국제적 변동과, 국내에서는 3당 야합을 통한 김영삼의 대선성공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1994년에는 4.2공동선언을 함께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이처럼 1961년 5월 16일부터 1994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근대화의 명목으로 시작된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가진 독재시대의 시작이었으며, 더불어 함께하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고유의 한반도공동체성은 근대화 즉 경제발전의 과정 속에서 개발과 이익 앞에 무너져간 시기였다. 한국 기독교 역시 경제개발과 발맞추어 ‘양적부흥’이란 허울로 공동체성 없는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전태일 열사 사건 이후 한국 기독교는 사회선교 혹은 양적성장이라는 두 흐름으로 구분되어 발전해나갔다.

   또한 남과 북은 ‘한반도’라는 공동체성를 생각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각기 기득권 사수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이용책을 쓰며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던 민주운동들은 강압과 회유 앞에 좌절되었다. 이러한 좌절의 국내 상황과는 달리 국제정세가 독일 통일과, 소비에트 해체 등으로 이념적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한반도 근대사의 엉킨 매듭을 바로 풀 시작점인 ‘통일’에 대해 사람들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문익환 목사는 이데올로기와 독재로 잃어버린 한반도공동체의 정신을 통일을 통해 다시금 찾고자 방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의 노력때문인지 그 후 통일에 대한 분위기와 관심 그리고 논의들은 고조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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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직 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 1945-1979』p. 457. [본문으로]
  2.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448-453. 참조. 또한 이러한 돈으로 경부고속도로와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는 확보했지만, 근대사에서 다시 꿸 수 없는 단추를 엉망으로 끼워버렸다. 이 점을 가지고 장준하는 박정희를 향해 제 2의 일본에 의한 식민화라고 말했다. [본문으로]
  3. 위의 책, pp. 527-536. 참조. [본문으로]
  4.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5분경, 서울 음대로 들어가는 골목 평화시장 입구 사람들의 틈에 서있던 한 청년이 불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멍청히 바라보다가 어느 누군가 불을 꺼야한다는 말에 술렁대었지만 어느 누구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작업복에 검은 빛 바바리코트를 입은 청년은 한 일 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불길이 상체에 붙어 타오른지 2분후 행인 중 몇 명이 잠바를 벗어 덮어씌웠다. 하지만 불은 점점 더 거세졌다. 시장 경비원은 2층으로 소화기를 가지러 뛰어갔다. 이때 이를 악물고 서있던 청년은 갑자기 벌떡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섰다. 청년의 눈썹과 머리털은 타버렸거나 그을려 불길로 새까맣게 뒤범벅이 돼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달라” 그는 외치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끝내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청년 전태일(23세)은 메디컬센터를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밤 10시 끝내 숨졌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 532. ; 김형수,『문익환평전』(서울: 실천문학사, 2004), pp. 398-399.). [본문으로]
  5.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자 농민들의 집단적 죽음현상을 미리 막아내기 위한 ‘자기몸 저항’이었다(정성한,『삼천리반도 금수강산』(서울: 그리심, 2008), p. 107). [본문으로]
  6.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인 와이에이치 무역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1일 사이에 벌어졌으며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이 되었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535-536.). [본문으로]
  7.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서중석,『한국현대사 60년』(서울: 역사비평사, 2007), p. 192.). [본문으로]
  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558-559. [본문으로]
  9. 1989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 회의를 제의하면서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김수환 추기경, 전민련의 백기완 선생과 함께 문익환 목사를 평양에 초청했다. 이에 백기완과 문익환 목사는 초청수락 성명을 발표했었다(김형수,『문익환평전』pp. 685-686; p. 82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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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상황.



B. 1945년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해방이 되자 바로 분단이 되었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일본이 항복하자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이 조선 내에 있는 일본군에 항복을 받으러 가기에는 시간이 걸렸고,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 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에 발을 디뎌놓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38선을 나누기 시작했고,[각주:1] 결국 북쪽엔 소련이, 남쪽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신탁통치에 관해 미국은 조선이 독립하여 자치정부를 이끌려면 40-50년 정도는 선진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2] 즉, 조선에 대해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에 조선 사람들에 의한 자치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조선에서 소련의 지배를 막는 일이며,[각주:3] 조선의 독립(獨立)과 자주(自主)는 고려대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각주:4]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소련이 모르고 있지 않았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꼭 실시해야 한다면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면서 나아가 강대국들이 꼭 개입해야 한다면, 조선 사람들이 먼저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하고 그를 4대국이 후원하는 것으로 그치자고 했다. 이게 바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에서 통과된 내용이다. 즉, 소련이 제안했던 것은 신탁통치(trusteeship)가 아니라 후원 또는 후견(tutelage) 제도로서, 조선 사람들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원조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에 의해 핍박받던 조선의 민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쌀을 골고루 입에 넣을 수 있는 평화(平和)였다. 그것은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주의이며, 소련은 그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소련은 강대국의 개입을 꺼려했고(가만히 두면 자신들의 이념으로 넘어 올 것이라 예상함), 미국은 4개국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당시 중국도 사회주의정권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자본주의 정부 성향이 될 것이라 생각함).

  다시 말하자면,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기하고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미루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던 조선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소련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조선의 독립을 앞당겨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각주:5] 어찌되었던 미국과 소련간의 대화는 불발되었고, 한반도문제를 유엔(the United Nations)에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세계정세는 2차 대전 이후 모든 강대국들이 침체하게 되었고 그에 비해 피해가 적었던 미국이 세계정세의 패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나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멸망을 주장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 능력에서 미국의 몇 안 되는 경쟁자였던 소련이었다. 소련은 그리스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고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으로 하여금 그리스 공산주의자를 지원하여 권력을 장악하도록 시도하는 등 공산주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스 뿐 아니라 터키에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지자, 두 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영국은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영국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두 나라를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나서서 소련의 침투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1947년 3월 발표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다. 소련의 세력 확장에 맞서 자유국가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각주:6] 중동 지역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 나라가 공산화되면 중동 지역에서 서구 세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중동의 석유 자원도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트루먼 독트린의 후속 조치로 나온 것이 3개월 뒤에 발표된 마샬 계획(Marshall Plan)이다. 즉,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유럽을 지키기 위한 경제적 처방으로,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 경제를 복구하고 나아가 경제 혼란을 틈타 공산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유럽에 전폭적인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각주:7] 이로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은 분명해졌다. 그리고 한반도의 문제는 미국의 영향아래 있었던 유엔으로 넘어갔고, 1948년 5월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강행되고[각주:8] 이를 바탕으로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1948년 9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섬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체제 분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남쪽의 상황은 정치적 계파에 따라 이념적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일제의 식민지 반봉건(反封建)적 잔재모순과 미국소련의 분단구조 속에서 제 2의 해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각주:9] 이런 정치적 계파들의 미국에 대한 대처가 미국에게는 눈에 가시가 되었고, 미국은 이승만과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상처가 있는 기독교계[각주:10]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승만은 반공(反共)이라는 기치(旗幟)를 내걸고 정부수립을 하게 되고,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정치 인사들을 처단했다.[각주:11]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유럽평화대학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이름도 전쟁의 성격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며,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각주:12] 이처럼 한국전쟁은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단순한 북에 의한 침략전쟁이 아닌 이념에 의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38선을 두고 1945년 9월부터 1950년 6월 이전에 남북 사이의 이념 갈등과 투쟁 과정에서 약 10 여만명이나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이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한쪽의 시각이라 할 수 있다.[각주:13] 그러나 이 전쟁에 관해 한 가지 분명하고도 명확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승리자도 없는, 그저 한반도의 민중(民衆)들만 고통을 당했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민중들은 이념에 대한 직접적 부정인식을 가지게 되고, 하나의 형제라는 인식은 점점 더 옅어져만 갔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민중들의 아픔을 이용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오직 경찰력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정권이 영원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결국 항의하는 학생들이 주축으로 일어난 1960년 4월 19일의 혁명을 통해 이승만은 하야했고 이기붕 일가는 동반자살 하였다.[각주:14]

  시대적 아픔들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정권이 무너지고, 국민들은 진정 민주화가 되길 바랐지만, 결국 1961년 5월 16일 다시금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coup d’État)로 인해 민주(民主)의 길은 멀어졌다.

  이처럼 1945년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겉으로는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The Korean War)’의 상황이었지만, 사실상 몇몇의 이익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고, 그 고통을 한반도공동체가 고스란히 받고 분열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과 분단의 순간도 미국과 소련의 이익분배의 과정이었고, 대한민국 건국의 과정도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기득권 사수의 과정이었으며, 요한 갈퉁이 주장한 바와 같은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 또한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과정의 연속이자,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권의 명분을 가지기 위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역시 이 이데올로기적인 시대적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고, 한반도의 사회적 상황과 매우 비슷하게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교단분열과정을 겪었다.[각주:15]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한반도공동체의 분열과 기득권 사수는 결국 한반도공동체의 민(民)의 주(主)의식에 의해 멈춰지긴 했지만, 그 기득권의 빈자리가 다시금 군부(軍部)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또 다른 독재(獨裁)가 시작되었다.[각주:16]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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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45년 8월 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 국무 전쟁 해국 3부 조정위원회의 존 맥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라는 두 젊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조선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고, 3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들은 그저 지도를 펴고 수도 서울을 미군의 점령지로 포함시키자는 단순하고 즉흥적인 생각에 지도상의 38도선을 선택했을 뿐이었다(양호민,『방일영문화재단 한국현대사강좌 1: 38선에서 휴전선으로』(서울: 생각의나무, 2004), pp. 41-51. 참조.). [본문으로]
  2. 김학준,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서울: 한길사, 1980), p. 67. [본문으로]
  3. 안진,『미군정과 한국의 민주주의』(파주: 한울, 2005), p. 64 ; [본문으로]
  4.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김동노 외 역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1), p. 264. [본문으로]
  5.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만나 미,영,소 3국의 외상(Byrnes, Bevin, Molotov)들은 한국문제에 대한 정책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상하고 있었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의 중국을 포함한 4국의 구상을 검토해보면, 미국은 자신이 기계적 다수를 확보할 수 있는 유엔이 주관하는 신탁통치안을 입안하여 친미적 정부의 수립을 모색하였고, 소련도 역시 당시 한국현실에 비추어 친소적 공산주의적 정부수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즉시 독립안을 원했다고 추측된다. 한편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전통적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로서 중경임시정부의 역할을 기대해서인지 즉시독립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한국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던 영국은 한국의 독립이 자국의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한국에 식민지상태의 존속을 원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중국은 내전중인데다 삼상회의 당사자도 아니었기에 정책결정에 참가할 수 없었으며, 영국 또한 직접점령자가 아니었기에 한국문제에 관한 한 제 3자에 불과했다. 따라서 다른 의제도 대부분 그러하였지만 특별히 한국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소련만이 협상 당사자였으므로 정책결정은 미국과 소련 양국의 타협과 양보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46”, 『해방전후사의 인식 3권』(서울: 한길사, 1988), p. 224.) [본문으로]
  6. 김일영,『방일영문화재단 한국현대사강좌 4: 건국과 부국 현대한국정치사 강의』(서울: 생각의나무, 2004), p. 55. [본문으로]
  7. 김학준,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p. 104. [본문으로]
  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pp. 297-298. 참조. [본문으로]
  9. 여운형 계(인민당), 박헌영 계(공산당), 백남운 계(신민당), 김구 계(한독당) [본문으로]
  10. 정성한,『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서울: 그리심, 2003), pp. 55-96. 참조. [본문으로]
  11. 안진,『미군정과 한국의 민주주의』 pp. 89-91. 참조. [본문으로]
  12. 2005년 10월 15일 학술단체협의회와 민교협을 비롯한 5개 학술단체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국가보안법과 강정구 교수 필화사건〕학술토론회에서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 외교학)교수가 발표한 내용 중 일부 발췌. [본문으로]
  13. 남쪽 안에서 일어난 이념 갈등은 빼더라도,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남북의 군대가 격렬하게 충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남침도 있었고 북침도 있었다(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p. 346-356; 364-365. 참조.). [본문으로]
  14. 김용직 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 1945-1979』(서울: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pp. 249-252. 참조. [본문으로]
  15.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pp. 624-642. 참조. [본문으로]
  16. 강정구, "박정희정권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 『역사비평』38(1997): 215;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pp. 55-58; Bruce Cumings,『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p. 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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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상황.


A. 1918년부터 1945년까지


  19세기의 조선은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된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의 전통사회는 안으로는 매관매직 등의 부패와 기존의 양반 지배세력들에 반하는 민중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팽배로 서구열강들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일본이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빌미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이라는 불평등조약을 조선이 체결함으로 인해 일본의 경제적 침탈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이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을사늑약(Eulsa Treaty 1905)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미국과 일본과의 가츠라-테프트밀약(Memorandum of Taft and Katsura 1905)[각주:1], 그리고 헤이그밀사사건(Hague 密使事件)을 구실로 고종이 퇴위되고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 불리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1907)을 통해 조선의 행정권이 빼앗기고, 마침내 기유각서(己酉覺書 1909)를 통해 사법권과 1910년 경찰권까지 빼앗기며 한일강제병합(1910)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치밀한 식민지작업[각주:2]의 과정에서 도처에서 애국운동과 의병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일제는 무단통치를 하게 되었고, 조선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더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 1919년 3월 1일의 국민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국민적 운동은 일본을 당황스럽게 했고, 일본은 강경한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그 노선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문화정치 역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여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보통경찰을 대폭 증가시키고, 치안유지법들을 통해 통제와 탄압을 강화한 것이었다.

  이 3.1운동의 여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와 조선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민족독립에 앞장섰던 기독교 중 다수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내세주의적 신앙, 선교사들의 친일경향, 새로운 사상에 대한 경시풍조 등으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각주:3] 그러자 조선사회에서는 그에 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또한 조선사회의 이런 일반의 반(反) 기독교적 분위기에 사회주의의 대두는 여러 문제들을 야기 시켰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기치(旗幟)는 폭력적 방법 등을 통해 기독교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그 지향하는 목적과 방향에서 일치점이 있음을 시인하고 수용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통한 기독교 내외부의 자극을 영향으로 사회운동의 전환점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이 넘어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자체를 인정치 않고 거부하면서 기독교는 사회주의를 반박하며 현실적인 개혁운동으로 나아갔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함께 탄압당하는 처지가 되자 양자 간의 이해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각주:4]

  이렇게 3.1운동 이후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여파가 컸고, 일제 또한 문화정치로 한민족 내부로는 분열을 야기 시키는 분할(분열)정책을 펴고, 유학생을 유치하여 장기적인 친일파 양성을 주도하고, 교육정책을 통해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형제인 것처럼 서구열강과의 대결구도를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전쟁준비를 위한 신사참배(神社參拜)[각주:5], 창씨개명(創氏改名)[각주:6], 강제징용(强制徵用)[각주:7] 등을 강요했다. 이러한 조선 나름의 여파와, 일제의 변화는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과 선각자들을 제 3국으로 내몰았고, 한반도 내에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의 침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가지게 만들었다.

  조선의 이러한 일반적 상황 속에서 북간도에서는 또 다른 시대적 상황 즉,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시작되었다(물론 조선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지만 북간도는 더욱 치열했다). 다행히 조선처럼 현실적 삶을 회피하는 부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선각자’의 땅도 아닌 민족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각주:8]

  또한 당시 세계사적으로 1929년 12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북간도에서는 1930년 가을 곡식가격이 폭락했고, 그러한 주민들의 경제상황이 암담해짐에 따라 공산이데올로기는 더욱 활발해졌다. 이어 정치군사적인 대변혁이 잇달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시화 되면서 중국과 일본 양군은 1932년 1월 1일부터 산해관(山海關)에서 충돌하여 5월 31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일본이 동삼성(東三省)과 열하(熱河) 및 내몽골 동부를 판도로 하는 ‘만주국’을 세웠다. 이러한 만주국의 생성은 노골적인 일제의 북간도 침략을 뜻했고, 더 이상 북간도의 민족적 교육기관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도 북간도도 일제의 제국주의적 허망한 야심의 끝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또한 경험하고 있었을 상황에 갑자기 뜻하지 않게 해방이 되어버렸다. 해방은 낯선 손님과 같았다. 그나마 해방 이전에는 이념들 간의 논쟁이 있어도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서로 일치되었지만, 갑작스런 해방‘됨’에 이념논쟁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고, 그것은 엄청난 혼란이 되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보면, 사회주의세력들의 확산이 계속 조선 안에서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항복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화도 싫었고[각주:9], 조선이 중국이나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 또한 싫었다.[각주:10]

  이처럼 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대적 상황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가고 타의에 의해 해방되어가는 상황으로서, 기존의 유교적 한반도공동체의 정신이 멸절되고 그 공백을 기독교의 정신이 채우는 듯하지만, 이도 이데올로기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게 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공동체정신이 분열되고, 강대국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해방은 이루어지지만 곧 공동체정신의 분열처럼 남과 북으로 나눠지는 모습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1. 이 밀약은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일본과 한 밀약으로서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당시 선교사 알렌이 미국정부의 공사가 되었고,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행동에 대한 보고와, 조선인의 호소를 무시된 것은 이미 알렌이 미국정부로 소외되었고, 조선내 미국공사의 지위가 내려갔음을 말한다. 가츠라-태프트조약 이후 미국은 알렌의 공사직을 경질시키고,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기도 한다(김승태, “한말 일제침략기 일제와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 6(1997): 65-100. 참조.). [본문으로]
  2. 1905년부터 문란한 화폐정리를 핑계로 3백만원을 차입하고, 금융공황 구제로 1백50만원, 교육제도 및 도로항만 개수 및 확충으로 1천만원 차입하는 등의 차관공세에 조선정부는 원금만 1천6백50만원 채무를 가지게 되었다(조항래,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일제경제침략과 국채보상운동』(성남: 아세아문화사, 1994), pp. 61-63. 참조.).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기존 조선의 토지제도를 해체하여 원활한 식민지내 상품과 자본 수출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서류신고를 하지 못한 토지는 국유화하여 조선총독부가 대지주가 되었다(한국 민주사 연구회 편,『한국민중사 1』(서울: 풀빛, 1986), p. 129.). [본문으로]
  3. 3.1운동 관계 피검자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총 19,525명에서 기독교인은 3,426명으로 17.6%를 차지하고, 특히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이르며, 이들 기독교가 당시 총인구의 1.5%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려하고, 이들 모두 과격시위자가 아닌 주동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박해에 따른 자체 내의 분위기와, 일제의 선교사정책에 따른 분위기들이 3.1운동 이후 한국기독교가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한국 기독교사 연구회,『한국기독교의 역사 2』(서울: 기독교문사, 1991), p. 38. 참조;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서울: 기독교문사, 1998), pp. 408-419. 참조.). [본문으로]
  4. 김권정,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한국기독교와 역사』 5(1996): 78-116. 참조. [본문으로]
  5. 신사는 면 단위로 다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신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고 어떤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마다 그 곳에서 절했으며, 아침마다 황국신민서사(“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라고 낭독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독립을 외친다던지, 신사참배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하던 이가 없었을 만큼 사회적 분위기는 그 만큼 힘들었다. 그랬기에 1935-45년 사이 조선의 분위기는 심각했다(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 하』 pp. 494-500. 참조.). 이와 관련하여 1936년 5월 가톨릭의 신사참배 허용을 시작으로, 1936년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1938년 장로교까지 신사참배에 굴복되었다(위의 책, pp. 503-506. 참조.). [본문으로]
  6. 일제의 압제 하에 학교에서는 우리말(한글)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으며,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교육기관의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선생 중 몇 명 또한 일본인이었다. 자신의 성도 쓸 수 없도록 창씨개명을 하도록 하여 이름까지 다 바꾸고 자신의 문화와 가족의 역사를 말살하여, 철저히 일본에 속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몇의 사람들은 일본사람을 따라다니거나 그들에게 아첨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즉, 이런 친일파들은 부역이나 여러 공출 같은 것들을 빼주는 대신, 동네주민의 생활을 보고함으로서 농사짓고 숨겨둔 것들까지 모두 빼앗아갔다 [본문으로]
  7. 아이들은 학교수업의 일환으로 동네구석구석의 깡통, 철 등을 주워오고, 집안에 있는 놋그릇, 제사 때 쓰는 제기조차 모두 헌납해서 일본군이 전쟁에서 쓸 총알을 만드는데 썼다. 또한 농사했던 곡식이나 먹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빼앗는 공출을 보냈고, 심지어 소나무 솔방울, 싸리나무 껍질까지 공출 안한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져서 먹을 식량마저 다 뺏기고, 만주에서 콩깻묵이라는 ‘콩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끼로 가축의 사료나 비료 따위로 쓰이는 것’을 먹으면서 배를 채워야 했기에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장로교회는 1939년 4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교회 종을 떼어내어 탄환과 비행기로 만들어 헌납하기도 하였다(위의 책, pp. 524-534. 참조.). [본문으로]
  8. 이 사상적 대립을 통해 명동학교는 그 이름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알제가 ‘명동’이란 이름을 개명시키려 부던히 노력했음) 학교 경영권을 공산당에게 넘겼고 명동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인민학교로 바뀐지 6개월도 되지 않아 1929년 9월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학교로 강제편입 되었다. [본문으로]
  9. 강만길,『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서울: 삼인, 1999), pp. 139-140. 참조. [본문으로]
  10. 이혜숙,『미군정기 지배구조와 한국사회』(서울: 선인, 2008), p. 65. [본문으로]
Posted by 숑숑숑~

본 글은 ‘문익환 목사와, 교회의 본질, 그리고 이시대의 과제’에 대한 글을 각색하여 매주 혹은 며칠 단위로 연재할 생각입니다. ^^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바쁜 일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바쁜 시대정신과 그로인해 생각할 겨를도 없는 삶은 한반도사회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생의 풍성함보다 이데올로기적인 편가름과 흑백논리에 가까운 무분별한 대치를 만들었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다. 삶에서 하나님을 매개하거나 이웃을 향한 풍성한 사랑을 고민하기보다,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기복신앙과 개인구원에만 치중함으로서 교회공동체의 본연의 모습을 잃고 사회적 문제 중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의 문제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한반도에서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본연의 한반도공동체성과, 한반도교회공동체성은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바른 답을 하기 위해선 우리의 현대사 100년를 바르게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대응력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던 식민지 시기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진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독재의 시기가 복잡하게 얽혀져있기에 그 시대를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도 복잡한 현대사에 영향을 받아 이데올로기적인 교회의 모습과 분열, 양적 성장과 기복신앙의 현실을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한민족 공동체의 현대사와 공동체성 상실의 시대에 사회와 교회공동체를 바르게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는 창(窓)이 있을까?

필자는 신앙인으로서 한반도 근현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문익환 목사를 주목하려한다. 그의 인생은 앞서 복잡했던 한민족 현대사를 꿰뚫고 있고, 목사 번역가 시인 민주운동가 통일운동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그 복잡한 현대사를 살아갔다. 그렇기에 마치 우리가 실타래같이 엉킨 한민족 근현대사를 풀지 못하고 오해하거나 단면적으로 이해하듯,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빨갱이 목사 혹은 민주 통일의 생을 산 영웅 등으로 단면적이고 극단적인 오해를 하고 있음을 본다. 무엇이 그를 오해케 했고, 무엇이 그의 참 모습이며, 그가 일생을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물음에 답을 함으로서 한반도 현대사를 풀어가고, 오늘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관(觀)을 찾아보려고 한다.

  본 글은 문익환 목사의 삶을 조명하고 그가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 처했는지, 그리고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알아봄으로서 그가 바랐던 것과 그가 이해한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유추하고자 한다. 또한 그 결과를 통해 현실의 사회공동체와 교회공동체의 상황을 바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 한반도에서 살아갈 것이며 한국 교회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여야 할 것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럼에 있어서 본 글은 다음의 세 가지 부분으로 전개할 것이다. 첫째, 한민족 근현대사 속에 한민족 사회공동체와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문익환 목사의 삶의 기간 안에서 비추어 볼 것이다. 둘째, 문익환 목사의 목회자로서 삶과, 민주통일운동가로서 삶을 시대적 상황과 함께 조명해 볼 것이다. 셋째, 전통적인 교회공동체의 의미와 지향해야할 교회공동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문익환 목사가 그의 신앙삶에서 이해한 교회공동체를 분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공동체의 문제와 그 과제를 다루어 볼 것이다.

 

to be continued..




해당 글은 Theological Thinking 3.0에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Posted by 숑숑숑~